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법 앞에서》(Vor dem Gesetz)에는 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도 문지기의 위엄에 눌려 평생 동안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문턱에서 허망하게 늙어 죽어간 한 시골 사람의 가슴 아픈 비극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이와는 정반대이지만 한층 더 비극적인 신앙적 현실을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 비유 속에서는 문 안에 거하는 부자가 자신의 집 대문 바로 앞에 누워 있는 한 가난한 인간의 절규와 고통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완고하게 외면합니다. 한 울타리와 하나의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매일같이 화려한 자색 옷을 입고 입안이 즐거운 풍성한 잔치를 즐겼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 대문 밑바닥에 엎드려 상 위에서 떨어지는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 걸음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가까웠지만, 그 영혼의 사이에는 생전에도,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끝내 건너가지 못한 깊고 어두운 마음의 간격이 무섭게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완전히 닫혀 버린 시선과 냉담한 마음을 통찰하며, 사람의 영혼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무감각’이라는 영적 질병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는지를 엄중하게 묻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순히 지상에서의 물질적 부유함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거나, 혹은 가난하고 병든 형편 그 자체를 천국 구원의 자동적인 조건으로 내세우는 세속적인 사회학적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강해 설교가 강력하게 붙드는 신학적 핵심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잠시 맡겨주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섬김의 기회를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사용했는가, 그리고 내 집 문앞에 놓인 타인의 처절한 고통을 십자가적 사랑의 책임으로 성실히 받아들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원한 세계를 분명히 증언하지만, 그 영원함에 대한 소망은 결코 성도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과 이웃을 향한 의무를 헛되게 비워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엄중한 복음은 “오늘 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금 네 곁에 있는 누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것인가?”를 이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엄숙하게 묻고 있습니다.
1. 닫힌 문 앞에서 복음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묻는다 (누가복음 16:1~12, 19~23)
누가복음 16장 전체에 흐르는 두 가지 핵심 비유, 곧 앞부분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뒷부분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결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줄기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선 청지기의 비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재물과 유한한 삶의 기회를 다가올 영원을 위해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 신학적 도전이라면, 뒤이어 나오는 부자의 비유는 그 모든 자원을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적 만족과 이기적인 안일함을 위해서만 소진해 버린 인류의 종말론적 비극을 참혹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그 모든 시간과 재능, 물질은 궁극적으로 내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청지기적 자산이며, 참된 청지기의 지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자원을 장차 맞이할 영원의 때를 위해 가장 가치 있게 선용하는 데서 비로소 증명됩니다.
예수님께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행한 도덕적 부정함이나 계산적인 속임수가 선으로 미화되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던 위치와 권한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날이 온다는 임박한 사실을 정직하게 자각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데 주저 없이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지기의 기민한 모습은, 마치 자기가 가진 물질과 수명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소유를 움켜쥐고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미련함과 정반대되는 종말론적 지혜를 신선하게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시간과 누리는 재물, 그리고 수많은 섬김의 기회에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의 셈함과 결산이 기다리고 있으며, 진실한 청지기의 믿음은 바로 이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깨어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 비유 속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참혹한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된 이유 역시 단지 그가 지상에서 남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입었던 화려한 자색 옷과 고운 베옷, 그리고 날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호사스러운 잔치의 열기가 그의 영적인 눈과 귀를 어둡게 가리어,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던 나사로의 처참한 고통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 앞의 이웃을 도울 만한 물질적 능력이나 여력이 없었던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곁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거룩한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무감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외형적 물질의 부유함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깊은 영적 문제는, 바로 그의 마음의 문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무섭게 닫혀 있었다는 신앙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무조건 음부의 불꽃 속에 떨어진다”는 식의 입체감 없는 단순한 도식으로 오해하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소유의 절대적인 크기보다, 그 소유를 대하는 영혼의 중심 태도와 나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사랑과 자비를 성실히 실천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부자가 지었던 결정적인 죄는 풍요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풍요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잔치 안에 봉인해 두고,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이웃에게 은혜의 줄기를 흘려보내지 않은 영적 이기심과 무관심에 있었습니다. 깊은 성경 묵상은 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도리어 그동안 내가 냉정하게 외면해 왔던 내 삶의 대문 앞을 겸허히 바라보게 만드는 은혜의 거울이 됩니다.
2. 하나님이 맡겨주신 신령한 부요가 은혜의 유통 채널이 될 때 (누가복음 12:48)
장재형 목사는 이 깊은 강해 설교를 통해 ‘부요함’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통장 잔고나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 짓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깊이 있는 신학적 지식, 언제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세련된 환경, 그리고 충만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의 자유를 넉넉히 누리고 있는 현대의 성도들 역시 영적으로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받은 ‘영적 부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은혜와 진리가 오직 자기 자신의 신앙적 위안과 자기가 속한 소그룹 공동체의 이기적인 만족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면, 그 풍성함は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강물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담장 밖의 주린 이웃들을 막아서는 높은 차단벽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많이 받았다는 거룩한 사실은 결코 남들 앞에 내세울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야 할 무거운 사랑과 나눔의 책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영적 자기중심성’은, 겉으로 노출되는 세속적인 탐욕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감추어져 있어서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풍성한 말씀을 듣고 감복하면서도 그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영적 안정과 내면의 평안만을 위해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그 신앙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깊고 고결해 보일지 몰랐어도 정작 주린 이웃과 열방을 향해서는 그 어떤 생명의 열매도 건네지 못하는 거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과 은혜를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그것을 나만의 영적 창고에 쌓아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더 먼 곳, 더 어두운 곳으로 진리의 빛을 흘려보내야 할 거룩한 사명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신학적 통찰 역시 누군가를 겸손히 섬기고 세워주는 진실한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로 재誕生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나눔은, 내가 쓰고 남은 잉여 자원을 시혜적으로 던져주는 세속적 동정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주리고 차가운 길거리에 방치된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외형적 자비의 행위는 물론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심각하게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진리를 깊이 배워 영적으로 바로 서며, 다시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온전히 세워주는 영적 투자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설교가 영적 기근에 허덕이는 오지의 현장에 기독교 서적과 진리의 자료들을 정성껏 모아 보내는 노고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 한 권은 소소해 보일지 몰라도, 진리의 양식이 턱없이 부족한 오지의 사역자에게는 닫혀 있던 하늘길을 활짝 열어주는 생명의 손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준엄한 신학적 질문은 오늘날 풍요를 누리는 수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앞에도 동일하게 정면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의 자료와 깊이 있는 가르침, 그리고 따뜻한 교제의 기회가 차고 넘치는 선진적 환경에서 그것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소비하는 동안, 지구 반대편이나 우리 곁의 어두운 그늘 밑에서는 단 한 권의 성경책과 단 한 번의 진실한 가르침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가난한 영혼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사랑은 단순히 일시적인 결핍을 미봉책으로 덮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 인격적으로 회복되고, 나아가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가슴에 품고 섬길 수 있는 사역자로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인내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또 다른 거룩한 섬김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깊고 긴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손 안에 오롯이 소유되는 순간보다, 나를 통과하여 낮은 곳으로 거침없이 흘러가는 그 거룩한 순간에 비로소 본래의 영롱한 빛을 세상 앞에 드러냅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는 얼마나 수많은 말씀을 머리로 듣고 기억하느냐로만 측정되지 않으며, 내가 들은 그 진리의 말씀이 과연 주린 이웃의 굶주림과 외로움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덜어주었는가 하는 영적 현장에서 비로소 매섭게 시험받습니다. 참된 사랑은 그저 내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도의 소중한 시간과 재물, 지식과 입술을 실제로 움직여 고통받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순종은 거창한 결심이나 구호에 있지 않고, 오늘 내 곁에 찾아온 이웃의 처절한 필요를 더 이상 남의 일로 방관하거나 미루지 않는 실천에서부터 힘차게 시작됩니다.
3. 세속적 표적보다 가까운 말씀, 회개는 오직 오늘 시작된다 (누가복음 16:27~31)
음부의 참혹한 불꽃 속에서 신음하던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제발 죽은 나사로를 지상에 남아 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이 끔찍한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간청을 향한 아브라함의 단호한 대답은, 그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그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무덤을 깨고 살아 돌아오는 초자연적이고 극적인 표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이미 완고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패역한 마음은 결코 자동으로 돌이켜지지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참된 회개는 눈을 사로잡는 새로운 기적이나 신비한 표적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경으로 가까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히 듣고 ‘지금 바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결단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 경악스러운 대목は,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습관적으로 늘어놓던 영적인 핑계와 게으름을 조용하지만 완벽하게 벗겨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게 더 눈에 보이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나면, 내 삶에 더 강렬한 신앙적 체험이 주어지면, 혹은 내 여건이 조금 더 특별해지면 그때 가서 온전히 순종하겠다”고 생각하며 결단을 차일피일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삶과 성경 속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으며, 우리가 그동안 모른 척 미루어 두었던 사랑의 책임과 섬김의 의무 역시 이미 우리 눈앞의 대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나를 인도할 진리의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빛나는 진리 앞에서 자기의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고 마음을 활짝 열려는 성도의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음부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절규하며 호소하는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신학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의 혀는 자신의 대문 앞에 누워 신음하던 나사로를 따뜻하게 부르거나, 그를 불쌍히 여겨 도우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자비로운 말을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피폐한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그의 혀가 지상에서 완고하게 침묵한 뒤, 그는 마침내 영원한 심판의 불길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혀를 위한 작은 자비를 구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적 눈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입술의 말이 누구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고, 누구를 실제로 살리는 자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가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실천입니다.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난 죽음 뒤에는, 천국과 음부라는 두 자리 사이에 결코 넘어가거나 돌아올 수 없는 거대한 영적 구렁(가스마)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영원한 단절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순간에 갑자기 도래한 낯선 운명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매일같이 미루어 왔던 순종의 거부와 끝내 열지 않았던 마음의 닫힌 대문이 그대로 영원 속에서 굳어져 버린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세상 물질에 대한 내 안의 질긴 집착을 믿음으로 풀어내며, 그동안 외면했던 이웃을 향해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골든타임은 오직 호흡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심판의 두려움에 앞서 우리에게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무한한 “영원한 소망”이요 참된 은혜입니다.
4. 영원을 믿는 참된 성도는 오늘 내 곁의 문을 연다 (마태복음 25:40)
비유의 결말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지상적 자리가 죽음 이후 완전히 뒤바뀌는 반전의 구조는, 지금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형편이나 물질적 조건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판단이 결코 아님을 명백히 증언합니다. 지상에서 나사로가 겪었던 처절한 고난과 질병이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 잔치에 취해 있던 부자의 화려한 쾌락 역시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마침표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과 불의를 마침내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이 찬란한 종말론적 소망은, 오늘 고통받는 자를 기쁨으로 붙들어 주며, 동시에 풍족함 속에서 자만하는 자를 겸손하게 낮추는 영적 평형수가 됩니다. 영원을 진실로 믿는 성도는 현실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도피하지 않으며, 도리어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매순간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더 무겁고 엄중한 영적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늘의 소망은 우리가 바치는 선한 수고와 눈물의 헌신이 당장 눈앞의 세속적인 보상이나 칭찬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조차도, 십자가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영혼을 단단히 지탱해 줍니다. 순전한 복음으로 한 영혼의 아픔을 돌보고, 진리의 말씀으로 그를 세우며, 나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나누는 거룩한 섬김은 세상의 타산적인 계산법 안에서는 심히 작고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는, 지상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성도의 은밀한 수고와 눈물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단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온전히 기억하신다는 찬란한 믿음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인도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보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이 땅의 고통에 무심해지거나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마음을 품고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더 오래 견디며 성실하게 지켜내는 사람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 설교에 도도히 흐르는 종말론적 긴박감은, 결코 성도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도리어 아직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내 손에 쥐어진 작은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며, 세상으로 향했던 완고한 마음을 십자가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성도의 골든타임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오직 ‘오늘’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 결산이 찾아오기 전,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유예 시간이며, 오늘도 내가 주님의 말씀에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찬란한 소망의 증거입니다. 영원을 향한 참된 믿음은 눈앞의 현실을 버리고 떠나는 도피적 시선이 아니라, 오직 현실 속에서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의 아픔을 끝까지 놓지 않고 가슴에 품는 거룩한 사랑의 시선입니다.
결어: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
영원을 사모하며 준비한다는 것은 결코 성도에게 허락된 오늘이라는 소중한 일상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내 삶의 대문 앞에 놓여 있는 거룩한 사랑의 책임을 더 늦기 전에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내게 위탁하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신령한 재능들을 그저 나만의 화려한 잔치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으로 움켜쥐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려내는 은혜의 통로로 겸손히 내어놓고 있습니까?”
지금 나의 삶과 마음의 대문 밖에는 과연 누구의 간절한 기다림과 눈물이 오랫동안 쌓여가고 있으며, 나는 과연 언제 그 닫힌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갈 것입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이 거룩한 계절, 내 안의 영적 무감각과 이기적인 자아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뜨리고, 내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사로를 향해 따뜻한 은혜의 손을 내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영원의 눈을 가지고 오늘 내 앞의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우리를 온전히 덮으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으로 도강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