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누가복음 16장 19~31절: 무감각이라는 무서운 죄와 십자가 사랑으로 여는 영원의 문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법 앞에서》(Vor dem Gesetz)에는 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도 문지기의 위엄에 눌려 평생 동안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문턱에서 허망하게 늙어 죽어간 한 시골 사람의 가슴 아픈 비극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이와는 정반대이지만 한층 더 비극적인 신앙적 현실을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 비유 속에서는 문 안에 거하는 부자가 자신의 집 대문 바로 앞에 누워 있는 한 가난한 인간의 절규와 고통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완고하게 외면합니다. 한 울타리와 하나의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매일같이 화려한 자색 옷을 입고 입안이 즐거운 풍성한 잔치를 즐겼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 대문 밑바닥에 엎드려 상 위에서 떨어지는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 걸음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가까웠지만, 그 영혼의 사이에는 생전에도,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끝내 건너가지 못한 깊고 어두운 마음의 간격이 무섭게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완전히 닫혀 버린 시선과 냉담한 마음을 통찰하며, 사람의 영혼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무감각’이라는 영적 질병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는지를 엄중하게 묻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순히 지상에서의 물질적 부유함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거나, 혹은 가난하고 병든 형편 그 자체를 천국 구원의 자동적인 조건으로 내세우는 세속적인 사회학적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강해 설교가 강력하게 붙드는 신학적 핵심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잠시 맡겨주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섬김의 기회를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사용했는가, 그리고 내 집 문앞에 놓인 타인의 처절한 고통을 십자가적 사랑의 책임으로 성실히 받아들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원한 세계를 분명히 증언하지만, 그 영원함에 대한 소망은 결코 성도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과 이웃을 향한 의무를 헛되게 비워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엄중한 복음은 “오늘 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금 네 곁에 있는 누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것인가?”를 이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엄숙하게 묻고 있습니다.

1. 닫힌 문 앞에서 복음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묻는다 (누가복음 16:1~12, 19~23)

누가복음 16장 전체에 흐르는 두 가지 핵심 비유, 곧 앞부분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뒷부분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결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줄기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선 청지기의 비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재물과 유한한 삶의 기회를 다가올 영원을 위해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 신학적 도전이라면, 뒤이어 나오는 부자의 비유는 그 모든 자원을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적 만족과 이기적인 안일함을 위해서만 소진해 버린 인류의 종말론적 비극을 참혹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그 모든 시간과 재능, 물질은 궁극적으로 내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청지기적 자산이며, 참된 청지기의 지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자원을 장차 맞이할 영원의 때를 위해 가장 가치 있게 선용하는 데서 비로소 증명됩니다.

예수님께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행한 도덕적 부정함이나 계산적인 속임수가 선으로 미화되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던 위치와 권한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날이 온다는 임박한 사실을 정직하게 자각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데 주저 없이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지기의 기민한 모습은, 마치 자기가 가진 물질과 수명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소유를 움켜쥐고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미련함과 정반대되는 종말론적 지혜를 신선하게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시간과 누리는 재물, 그리고 수많은 섬김의 기회에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의 셈함과 결산이 기다리고 있으며, 진실한 청지기의 믿음은 바로 이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깨어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 비유 속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참혹한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된 이유 역시 단지 그가 지상에서 남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입었던 화려한 자색 옷과 고운 베옷, 그리고 날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호사스러운 잔치의 열기가 그의 영적인 눈과 귀를 어둡게 가리어,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던 나사로의 처참한 고통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 앞의 이웃을 도울 만한 물질적 능력이나 여력이 없었던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곁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거룩한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무감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외형적 물질의 부유함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깊은 영적 문제는, 바로 그의 마음의 문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무섭게 닫혀 있었다는 신앙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무조건 음부의 불꽃 속에 떨어진다”는 식의 입체감 없는 단순한 도식으로 오해하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소유의 절대적인 크기보다, 그 소유를 대하는 영혼의 중심 태도와 나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사랑과 자비를 성실히 실천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부자가 지었던 결정적인 죄는 풍요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풍요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잔치 안에 봉인해 두고,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이웃에게 은혜의 줄기를 흘려보내지 않은 영적 이기심과 무관심에 있었습니다. 깊은 성경 묵상은 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도리어 그동안 내가 냉정하게 외면해 왔던 내 삶의 대문 앞을 겸허히 바라보게 만드는 은혜의 거울이 됩니다.

2. 하나님이 맡겨주신 신령한 부요가 은혜의 유통 채널이 될 때 (누가복음 12:48)

장재형 목사는 이 깊은 강해 설교를 통해 ‘부요함’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통장 잔고나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 짓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깊이 있는 신학적 지식, 언제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세련된 환경, 그리고 충만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의 자유를 넉넉히 누리고 있는 현대의 성도들 역시 영적으로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받은 ‘영적 부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은혜와 진리가 오직 자기 자신의 신앙적 위안과 자기가 속한 소그룹 공동체의 이기적인 만족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면, 그 풍성함は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강물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담장 밖의 주린 이웃들을 막아서는 높은 차단벽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많이 받았다는 거룩한 사실은 결코 남들 앞에 내세울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야 할 무거운 사랑과 나눔의 책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영적 자기중심성’은, 겉으로 노출되는 세속적인 탐욕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감추어져 있어서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풍성한 말씀을 듣고 감복하면서도 그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영적 안정과 내면의 평안만을 위해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그 신앙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깊고 고결해 보일지 몰랐어도 정작 주린 이웃과 열방을 향해서는 그 어떤 생명의 열매도 건네지 못하는 거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과 은혜를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그것을 나만의 영적 창고에 쌓아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더 먼 곳, 더 어두운 곳으로 진리의 빛을 흘려보내야 할 거룩한 사명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신학적 통찰 역시 누군가를 겸손히 섬기고 세워주는 진실한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로 재誕生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나눔은, 내가 쓰고 남은 잉여 자원을 시혜적으로 던져주는 세속적 동정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주리고 차가운 길거리에 방치된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외형적 자비의 행위는 물론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심각하게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진리를 깊이 배워 영적으로 바로 서며, 다시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온전히 세워주는 영적 투자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설교가 영적 기근에 허덕이는 오지의 현장에 기독교 서적과 진리의 자료들을 정성껏 모아 보내는 노고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 한 권은 소소해 보일지 몰라도, 진리의 양식이 턱없이 부족한 오지의 사역자에게는 닫혀 있던 하늘길을 활짝 열어주는 생명의 손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준엄한 신학적 질문은 오늘날 풍요를 누리는 수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앞에도 동일하게 정면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의 자료와 깊이 있는 가르침, 그리고 따뜻한 교제의 기회가 차고 넘치는 선진적 환경에서 그것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소비하는 동안, 지구 반대편이나 우리 곁의 어두운 그늘 밑에서는 단 한 권의 성경책과 단 한 번의 진실한 가르침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가난한 영혼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사랑은 단순히 일시적인 결핍을 미봉책으로 덮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 인격적으로 회복되고, 나아가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가슴에 품고 섬길 수 있는 사역자로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인내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또 다른 거룩한 섬김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깊고 긴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손 안에 오롯이 소유되는 순간보다, 나를 통과하여 낮은 곳으로 거침없이 흘러가는 그 거룩한 순간에 비로소 본래의 영롱한 빛을 세상 앞에 드러냅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는 얼마나 수많은 말씀을 머리로 듣고 기억하느냐로만 측정되지 않으며, 내가 들은 그 진리의 말씀이 과연 주린 이웃의 굶주림과 외로움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덜어주었는가 하는 영적 현장에서 비로소 매섭게 시험받습니다. 참된 사랑은 그저 내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도의 소중한 시간과 재물, 지식과 입술을 실제로 움직여 고통받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순종은 거창한 결심이나 구호에 있지 않고, 오늘 내 곁에 찾아온 이웃의 처절한 필요를 더 이상 남의 일로 방관하거나 미루지 않는 실천에서부터 힘차게 시작됩니다.

3. 세속적 표적보다 가까운 말씀, 회개는 오직 오늘 시작된다 (누가복음 16:27~31)

음부의 참혹한 불꽃 속에서 신음하던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제발 죽은 나사로를 지상에 남아 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이 끔찍한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간청을 향한 아브라함의 단호한 대답은, 그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그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무덤을 깨고 살아 돌아오는 초자연적이고 극적인 표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이미 완고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패역한 마음은 결코 자동으로 돌이켜지지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참된 회개는 눈을 사로잡는 새로운 기적이나 신비한 표적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경으로 가까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히 듣고 ‘지금 바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결단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 경악스러운 대목は,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습관적으로 늘어놓던 영적인 핑계와 게으름을 조용하지만 완벽하게 벗겨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게 더 눈에 보이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나면, 내 삶에 더 강렬한 신앙적 체험이 주어지면, 혹은 내 여건이 조금 더 특별해지면 그때 가서 온전히 순종하겠다”고 생각하며 결단을 차일피일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삶과 성경 속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으며, 우리가 그동안 모른 척 미루어 두었던 사랑의 책임과 섬김의 의무 역시 이미 우리 눈앞의 대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나를 인도할 진리의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빛나는 진리 앞에서 자기의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고 마음을 활짝 열려는 성도의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음부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절규하며 호소하는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신학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의 혀는 자신의 대문 앞에 누워 신음하던 나사로를 따뜻하게 부르거나, 그를 불쌍히 여겨 도우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자비로운 말을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피폐한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그의 혀가 지상에서 완고하게 침묵한 뒤, 그는 마침내 영원한 심판의 불길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혀를 위한 작은 자비를 구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적 눈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입술의 말이 누구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고, 누구를 실제로 살리는 자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가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실천입니다.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난 죽음 뒤에는, 천국과 음부라는 두 자리 사이에 결코 넘어가거나 돌아올 수 없는 거대한 영적 구렁(가스마)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영원한 단절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순간에 갑자기 도래한 낯선 운명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매일같이 미루어 왔던 순종의 거부와 끝내 열지 않았던 마음의 닫힌 대문이 그대로 영원 속에서 굳어져 버린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세상 물질에 대한 내 안의 질긴 집착을 믿음으로 풀어내며, 그동안 외면했던 이웃을 향해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골든타임은 오직 호흡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심판의 두려움에 앞서 우리에게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무한한 “영원한 소망”이요 참된 은혜입니다.

4. 영원을 믿는 참된 성도는 오늘 내 곁의 문을 연다 (마태복음 25:40)

비유의 결말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지상적 자리가 죽음 이후 완전히 뒤바뀌는 반전의 구조는, 지금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형편이나 물질적 조건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판단이 결코 아님을 명백히 증언합니다. 지상에서 나사로가 겪었던 처절한 고난과 질병이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 잔치에 취해 있던 부자의 화려한 쾌락 역시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마침표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과 불의를 마침내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이 찬란한 종말론적 소망은, 오늘 고통받는 자를 기쁨으로 붙들어 주며, 동시에 풍족함 속에서 자만하는 자를 겸손하게 낮추는 영적 평형수가 됩니다. 영원을 진실로 믿는 성도는 현실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도피하지 않으며, 도리어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매순간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더 무겁고 엄중한 영적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늘의 소망은 우리가 바치는 선한 수고와 눈물의 헌신이 당장 눈앞의 세속적인 보상이나 칭찬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조차도, 십자가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영혼을 단단히 지탱해 줍니다. 순전한 복음으로 한 영혼의 아픔을 돌보고, 진리의 말씀으로 그를 세우며, 나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나누는 거룩한 섬김은 세상의 타산적인 계산법 안에서는 심히 작고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는, 지상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성도의 은밀한 수고와 눈물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단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온전히 기억하신다는 찬란한 믿음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인도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보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이 땅의 고통에 무심해지거나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마음을 품고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더 오래 견디며 성실하게 지켜내는 사람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 설교에 도도히 흐르는 종말론적 긴박감은, 결코 성도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도리어 아직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내 손에 쥐어진 작은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며, 세상으로 향했던 완고한 마음을 십자가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성도의 골든타임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오직 ‘오늘’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 결산이 찾아오기 전,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유예 시간이며, 오늘도 내가 주님의 말씀에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찬란한 소망의 증거입니다. 영원을 향한 참된 믿음은 눈앞의 현실을 버리고 떠나는 도피적 시선이 아니라, 오직 현실 속에서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의 아픔을 끝까지 놓지 않고 가슴에 품는 거룩한 사랑의 시선입니다.

결어: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

영원을 사모하며 준비한다는 것은 결코 성도에게 허락된 오늘이라는 소중한 일상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내 삶의 대문 앞에 놓여 있는 거룩한 사랑의 책임을 더 늦기 전에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내게 위탁하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신령한 재능들을 그저 나만의 화려한 잔치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으로 움켜쥐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려내는 은혜의 통로로 겸손히 내어놓고 있습니까?”

지금 나의 삶과 마음의 대문 밖에는 과연 누구의 간절한 기다림과 눈물이 오랫동안 쌓여가고 있으며, 나는 과연 언제 그 닫힌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갈 것입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이 거룩한 계절, 내 안의 영적 무감각과 이기적인 자아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뜨리고, 내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사로를 향해 따뜻한 은혜의 손을 내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영원의 눈을 가지고 오늘 내 앞의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우리를 온전히 덮으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으로 도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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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설교: 율법의 멍에를 벗고 은혜의 자유를 입다 (Olivet University)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남긴 거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거대한 대자연의 심연을 홀로 마주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인간의 뒷모습을 강렬하게 포착해 냅니다. 바위산 정상에 홀로 올라 발아래 펼쳐진 구름과 안개를 고독하게 굽어보는 그 단독자의 실존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절대적인 자율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근대 인간의 거대한 열망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주체적 독립의 정점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실재는 눈부신 해방이 아니라, 사방으로 정처 없이 일렁이는 자욱한 안개처럼 허무하고 아득한 존재론적 방랑과 깊은 영적 불안뿐입니다.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율의 충동이 어떻게 도리어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 무거운 속박이 되는지 이 예술적 풍경은 고요히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거룩한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는 장엄한 신학의 정점 또한,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오만한 자율의 시도가 어떻게 처절한 영적 속박과 종살이로 귀결되는지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서사에서 출발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등장하는 “두 여자의 비유”는 단순히 고대 교회의 특수한 교리적 분쟁을 수습하기 위한 과거의 낡은 기록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내밀한 영적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오래된 성경의 본문을 오늘의 척박한 강단 위로 생생하게 끌어올려 복음과 은혜, 행위와 율법의 거대한 소용돌이 사이에서 우리 영혼의 닻이 참으로 어디에 내려앉아 있는지를 엄중하게 되묻습니다.

존재의 근원적 비대칭성과 자녀의 신분으로 일어나는 영적 혁명

인간 실존이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자 조건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성에 놓여 있습니다. 말씀의 흐름이 영적으로 비추듯, 이 창조적 관계는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처럼 본질적으로 완벽한 비대칭성을 이룹니다. 태양은 해바라기의 실재 여부나 헌신과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하며 무한한 빛을 발산하지만, 해바라기는 태양이 위로부터 쏟아내는 따스한 빛과 은혜가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본질은 이 엄연하고도 엄숙한 진실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창조주를 향한 절대적 의존의 관계 속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는 이러한 창조적 의존을 강하게 거부하고, 스스로 자율과 독립을 선언하며 창조주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오만한 충동이 끊임없이 요동쳐 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역사적 문장을 인간 자율성 충동의 극단적인 표지로 읽어내며, 신의 부재를 선포한 그 비장한 자리에서 도리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공허와 처절한 파열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로 지적합니다. 영원의 실재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유한함은 결국 씻을 수 없는 불안과 정죄의 노예가 될 뿐이며, 이 무거운 속박은 오직 전적인 은혜의 빛 아래서만 진정한 자녀의 자유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인간 영혼이 겪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가장 깊은 뿌리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입니다. 이 비극적인 소외와 단절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거절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주인이 되려 했던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 보여준 역사적 사례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가 먼저 여호와의 살아있는 말씀을 가볍게 버렸을 때, 그 처절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이 완전히 끊어지며 비참한 영적 파멸과 공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이 깊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인류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들려줍니다.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내면에 거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심판자의 두려운 위엄 앞에서 공포에 떨며 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가장 친밀하고 다정한 언어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녀의 신분으로 담대히 일어서게 됩니다. 이 경이로운 호칭의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위로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신분 변화이며, 두려움의 종에서 사랑받는 아들로 옮겨지는 영적 혁명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고대의 조잡한 우상숭배나 현대의 세련된 기복주의, 공로주의, 성과주의가 겉모습만 바꾸었을 뿐 모두 인간을 조건과 점수의 세계에 묶어두는 율법주의의 다른 얼굴임을 폭로합니다. 그 잔인한 체제의 핵심은 인간을 끊임없는 자격 심사 아래 영원히 노예로 묶어두는 데 있기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갈라디아서 5장의 선언은 속박의 회로를 의지적으로 끊어내라는 강력한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조급함의 장막을 걷어내고 기다림의 미학으로 걷는 언약의 길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펼쳐지는 갈라디아서 4장의 비유는 우리 신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깊은 설득력을 획득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가정의 내부 이야기, 곧 여종 하갈과 자유하는 여자 사라,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이삭의 서사를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두 개의 언약을 상징하는 거대한 구속사의 드라마로 재해석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17장까지의 서사를 배경으로 살피면,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지만, 그 장엄한 선언 뒤에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길고 캄캄한 침묵의 시간이 뒤따랐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늙어가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깊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육체를 따라” 인간적인 해결책을 서둘러 도모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겨주는 인간적인 계산을 감행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수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 어떻게 흔히 무너지고 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거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카이로스의 때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유한한 능력과 눈앞의 계산으로 은혜의 결과를 강제로 앞당기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조급함의 순간, 거룩한 은혜의 질서는 차가운 인간 행위의 질서로 순식간에 변질되고 공동체는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약속을 바라보며 견디는 기다림의 미학을 포함하기에, 그 기다림이 무너지면 은혜의 순수한 표지였던 할례 같은 거룩한 상징이 어느새 구원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이 설교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순서의 전도야말로 우리 영혼 속에 독한 율법주의가 싹트는 치명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옛 이름을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시며 언약을 새롭게 하셨을 때 행해진 할례는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순종과 감사의 표지였을 뿐입니다. 은혜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 행위를 원인으로 삼으려는 모든 종교적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육체의 열매를 낳고 영혼을 깊은 불안의 수렁으로 밀어 넣을 뿐입니다.

땅의 예루살렘을 넘어 하늘의 도성이 선포하는 자녀의 자유

사도 바울은 이 극적인 비유의 상징적 대응을 서신 속에서 매우 명료하고 단호하게 제시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엄숙하게 주어진 율법 언약을 완벽하게 상징하며, 그 행위의 체제 아래서 태어난 자들은 결코 온전한 상속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종을 낳을” 뿐입니다. 사도는 하갈을 지리적으로 척박한 “아라비아의 시내산”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는 사도 당시의 막강한 종교적 권력이 지배하던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율법의 신성한 기원과 상관없이, 그것을 인간의 공로와 자격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강요하는 모든 종교적 기득권 체제가 결국 엄격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낼 뿐이라는 슬픈 진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유하는 여자 사라는 땅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찬란하게 상징합니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도성이자 어린 양의 거룩한 신부, 그리고 참된 자유인들의 공동체로 묘사되는 교회는 결코 땅의 방식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신실한 약속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녀를 낳아 자유케 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생물학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에게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기적처럼 태어난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방적이고도 완벽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정점입니다. 이사야 54장의 예언이 노래하듯이,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했던 척박한 여인의 자손이 도리어 땅의 유력한 자들의 후손보다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되는 이 은혜의 패턴은 오직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복음을 신뢰하는 모든 신자는 자신의 육체적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이삭과 같이 존귀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역사 속에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했듯이, 오늘날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도 행위와 성과를 앞세운 완고한 율법주의는 은혜 중심의 순수한 복음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정죄하려 든다. 이 치열한 영적 긴장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기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원리를 공동체의 중심에서 분명히 분별하고 치워야 합니다.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는 준엄한 명령은 특정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왜곡하는 거짓된 체제를 단호히 배제하라는 신학적 요청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이 맺어내는 사랑의 열매와 영원한 안식

이 장엄한 구속사적 비유는 자연스럽게 갈라디아서 5장이 선포하는 기독교 자유의 위대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는 바울의 선포 속에서 자유는 결코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책임을 해체해 버리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를 짓누던 모든 정죄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사랑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해 내는 창조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단호히 벗어던져야 할 “종의 멍에”는 단지 고대의 할례 규정만을 뜻하지 않으며, 인간의 공로주의, 도덕적 완벽주의, 성과 중심의 신앙, 그리고 경건의 외형적인 형식에만 집착하느라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모든 종교적 강박과 내면의 두려움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복음이 선물하는 진정한 자유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역동적인 안식으로 확인됩니다.

이 과정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모든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묵묵히 걸어가게 만듭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아 날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영광스러운 날 완성에 이르게 되는 소망의 서사입니다. 이 역동적인 과정에서 가시적으로 맺히는 결실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짜내어 만드는 고단한 업적의 목록이 결코 아니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넘치는 증거이자, 은혜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결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무서운 유혹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대개 “더 거룩해지자”는 경건한 구호로 시작되지만, 어느새 “더 많이 행하라”는 율법적 압박으로 기울어지며, 결국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점수의 종교로 회귀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진리를 교묘하게 교란하고 인간의 행위를 섞으려는 세력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문제는 성례나 규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격상시키는 치명적인 오용에 있습니다. 만일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완전하고도 충족적인 효력을 손상시키는 일이며, 결국 “은혜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길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서의 신학적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 바로 그 절대적인 결론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모든 종교적 짐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며, 신앙의 중심축을 언제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복음의 능동태 위에 굳건히 두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진정한 자유의 종착지는 놀랍도록 명쾌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이 그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는 이기적인 자기 해방을 넘어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한 명령 속에 온 율법이 요약된다는 사도의 통찰은, 은혜가 율법을 무가치하게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원리를 통해 그 본질적 정신을 완성함을 뜻합니다. 교회가 이 사랑의 원리를 잃어버릴 때 공동체는 순식간에 서로를 채점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지옥”으로 변질되지만, 교회가 서로의 짐을 져주는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때 “위 예루살렘”의 질서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신앙의 출발점을 “내가 해야 한다”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로 옮겨 놓는 일, 곧 은혜를 원인으로, 우리의 행위를 그 결과로 명확히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혈통이나 업적이 아닌 약속의 자녀에 둘 때 섬김이 강요가 아닌 기쁨으로 변화되며,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숨는 종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오는 자녀가 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의 모든 논의는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갈의 장막입니까, 사라의 품입니까. 행위와 자격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체제 속에서 불안과 우월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값없이 주어진 은혜 위에서 자유와 감사의 깊은 호흡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이 실존적 질문 앞에서 갈라디아서의 비유는 더 이상 고대의 낡은 사례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을 남김없이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됩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을 신뢰하고, 성령의 조용한 인도에 귀 기울이며,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작은 걸음 속에서 그 위대한 자유의 여정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복음의 영원한 약속을 붙들고 종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진 당신의 발걸음은, 이제 어떤 사랑의 열매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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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설교: 십자가 복음과 은혜로 빚어내는 참된 교회의 삶 (Olivet University)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그의 저서에서 배를 만들고자 한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게 하거나 일을 지시하기보다, 저 넓고 끝없는 바다를 향한 갈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거대한 돛을 올리고 파도를 가르는 기술의 바탕에는 결국 목적지를 향한 본질적인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건축과 교회의 본질을 세우는 일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테네로 이어지는 바울의 긴박한 발걸음을 추적하며,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 되게 하고 생명을 낳는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본질을 우리 앞에 꺼내어 놓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추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는 성도들의 내면을 찌르는 거룩한 질문입니다. 화려한 목회 기술이나 복잡한 현대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교회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출발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진하고 핍박이 동시에 솟구치던 그 뜨거운 현장 속에서, 바울의 심장은 오직 사랑으로 뛰었고 그의 발걸음은 은혜의 질서 위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갔습니다.

전략을 넘어서는 가장 깊은 동력, 사랑의 관계성

바울이 빌립보에서 모진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는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대지 않고 즉시 데살로니가를 향해 걸음을 옮긴 것은 단순한 종교적 사명감을 넘어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 설교는 그 멈추지 않는 움직임의 배후에 차가운 관례가 아닌 뜨겁고 간절한 관계의 열망이 있었음을 깊이 조명합니다. 자신을 거절하고 고발하며 공격하던 동족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당으로 찾아가 그들을 품으려는 마음은 인간의 의지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역설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첫 번째 기초는 다른 어떤 위대한 사역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관계성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원수까지 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는 깊은 도전은, 선교가 일종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효율성과 정확성, 혹은 눈에 보이는 성과라는 이름 아래 영혼을 향한 기다림과 인내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는 진리는 자칫 상대방의 영혼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결여된 신학적 정확성만을 자랑하거나, 인격적인 관계가 빠진 종교적 열심을 휘두를 때 그 모든 선교적 외침은 공허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무리한 사역은 도리어 영적인 피로감만을 남기게 될 뿐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첫 단추가 되어 올바로 채워질 때, 교회의 모든 영적 질서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부드러운 용납과 끝없는 인내, 심지어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픈 권면과 책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행위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참된 생명력을 얻습니다.

진리를 관통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단순함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담겨 청중에게 전해지는 메시지의 내용 또한 인간의 철학처럼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이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성경을 치밀하게 풀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오직 하나의 진실만을 증명했음을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흩어져 있던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조각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되는 영적 퍼즐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순하지만 우주적인 진실이 정확히 맞춰질 때, 청중의 닫힌 심령에는 성령이 부어주시는 폭발적인 깨달음과 은혜가 빛처럼 쏟아지게 됩니다. 경건한 헬라의 지성인들과 귀부인들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복음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인간의 화려한 수사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진리의 핵이 가진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질서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강단과 사역 현장에도 동일하고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지성을 만족시키는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의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기반합니다. 다채로운 문화적 콘텐츠와 수많은 행사들이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정작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뚜렷하게 서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은 부수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질수록 복음의 광채가 오히려 흐려질 수 있는 역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아무리 화려한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결국 방향을 잃고 거센 파도에 표류하는 배가 됩니다. 반대로 어떤 시대적 환난 속에서도 이 단순하고 명징한 복음의 진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면, 성도들은 세상의 척박한 광야 한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생명의 길을 내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을 뚫고 피어나는 말씀과 공동체의 호흡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탄의 교묘한 시기와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마련입니다. 시장의 불량배들이 선동되어 야손의 집을 거칠게 습격하고, 세상을 뒤집어놓는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두려움 섞인 고발이 울려 퍼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 역사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영적 무기인 시기심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는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내는 전진의 관문이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증명합니다. 환난은 결코 성도들을 위축시키거나 나약하게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의 반경을 베뢰아를 넘어 세상 끝을 향해 확장시키는 강력한 영적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외부의 오해와 내부의 핍박 앞에서 우리는 낙심하여 방어와 도피를 택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정화와 담대한 전진을 기꺼이 선택해야만 합니다.

가혹한 핍박을 넘어선 베뢰아 사람들은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진리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가 비추는 자리는 이러한 베뢰아 성도들의 영적 태도를 말씀과 성령과 공동체라는 세 가지의 강력하고 유기적인 고리로 풀어냅니다. 개인의 골방에서 묵상한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삶의 지표가 되고, 그것이 소그룹이라는 공동체의 용광로 속에서 나누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의 삶이 시작됩니다. 거창한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네이버 카페에 남겨지는 신앙에세이 같은 짧고 진실한 묵상 한 줄이나 성경공부 모임이 지닌 위대한 힘도 결국 이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말씀 앞에 철저히 겸손해질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성도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어떠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영적 면역력으로 자라납니다.

주일의 고백이 월요일의 성실로 이어지는 신앙

복음의 역동성은 결코 한 번의 뜨거운 눈물이나 일회적인 종교 집회의 감격으로 증발하지 않는 영원한 특성을 지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는 다가올 재림에 대한 막연한 소망만을 핑계로 삼아 현재의 일상적인 삶과 책임을 소홀히 하려는 태도를 향한 단호하고 준엄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밤낮으로 땀 흘려 수고하며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지치지 않고 텐트를 만들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숭고한 삶은, 참된 믿음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도피나 금욕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치열하게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책임윤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일 예배당의 무거운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에서 다시 치열하고 아름답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서의 거룩한 신앙 고백이 월요일 아침 일터에서의 땀방울과 정직, 그리고 성실함으로 번져가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믿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삼십 주년을 맞이하며 전 세계 백육십일 개국으로 놀랍게 넓어진 공동체의 사역 지형도 역시 뛰어난 개인기나 우연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낯선 땅으로 짐을 싸서 떠나고, 누군가는 그가 온전히 사역할 수 있도록 물질과 기도로 파송하며, 또 누군가는 현지의 문화를 배우고 언어의 다리를 놓는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교가 차가운 조직의 성과가 아니라, 누군가는 앞장서서 가고 누군가는 뒤에서 보내주며 서로를 생명처럼 굳게 받쳐주는 유기체적 생명 작용임을 깊이 웅변합니다. 결국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은 세련되고 논리적인 기법이 아니라, 입술의 말과 삶의 궤적이 일치하는 정직한 일상의 성실함에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위대한 역사는 화려한 건물이나 통계표의 숫자가 아니라, 늘 흔들리고 아파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야손의 불안한 눈빛과 새 신자의 떨리는 심장, 핍박 속에서도 서로를 염려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체온은 오늘 우리의 곁에 있는 이웃들의 얼굴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의 굉음과 알고리즘의 차가운 속도, 분열의 프레임이 난무하는 삭막한 현대 도시 한복판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쉬지 않고 상한 영혼들을 다정하게 부르며 거룩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갑니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박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할 때, 삼십 년의 묵직한 은혜는 다음 세대의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찬란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깊고 고요한 십자가의 진리가 나의 굳은 내면을 관통할 때, 당신의 오늘 하루는 과연 누구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으로 뻗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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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영혼의 거울: 로마서 2장을 통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복음 성찰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인류 역사의 지혜로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과 같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현미경 같은 예리함을 발휘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어둠을 직시할 때는 시력을 잃은 듯 무력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근시는 신앙의 영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유창한 종교적 수사, 수십 년의 신앙 경력과 교회 내의 중직이라는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이미 구원의 안전지대에 안착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2장 12절에서 29절에 이르는 바울의 준엄한 선언은 이러한 안일한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그것을 모르는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라는 심판대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관통하는 핵심 관점 또한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은 피부에 새긴 표식이나 손에 든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의 만지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외형적 경건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물음은 비단 고대의 유대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은밀한 불의를 용인한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늘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화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도 똑바로 날아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증서, 매주 거르지 않는 주일 성수,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 자체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순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투영하며 ‘표면적 신앙’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유대인인 자가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없듯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자는 결코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은 소유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통회하는 회개가 없으며, 입술에는 복음의 언어가 가득하나 삶의 궤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내면의 양심, 그 피할 수 없는 법정

바울은 율법이라는 명문화된 기록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어둠이 단지 지식의 부재라는 변명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증거와 도덕적 지침을 이미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거창한 행위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은밀한 미움, 탐욕의 찌꺼기, 자기 의로 가득 찬 교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행해진 불순종의 순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고발은 시리도록 아프고 무겁지만, 결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왜 유일한 희망인지를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의 날카로운 영적 진단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줄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룩하고도 간절한 초대장입니다.


3. 성령의 칼로 새기는 ‘마음의 할례’

로마서 2장의 위대한 절정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새기는 관습적인 할례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죽어있는 문자와 율법 조문에 갇힌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면의 본질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신앙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돌처럼 단단해진 완고한 마음이 살점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가는 변화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에 목매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는 삶으로 그 목적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이며, 복음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체화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의식과 전통은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자기 의를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로 전락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고안해낸 형식을 완수함으로써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겸손한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자신의 죄를 먼저 세밀하게 살피며,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됩니다.


4. 사람의 갈채를 넘어 하나님의 인정을 향하여

바울은 장의 말미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보상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찰나의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의식하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사람들에게 신실해 보이기 위해 종교적 외양을 다듬는 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 가슴에 남기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나는 그저 종교적 무대 위의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 영적인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아는 자만이 쏟아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 복음의 찬란한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가두려는 어두운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뱉는 말,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머무는 사람에게, 비로소 참된 성경 묵상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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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반석 위에 종말의 일상을 세우다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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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당신은 무엇으로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


장재형 목사의 에베소서 6장 묵상: 관계의 회복에서 영적 승리까지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중에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라는 걸작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골짜기, 해골을 든 ‘죽음’이 모래시계를 들이밀며 시간을 재촉하고, 기괴한 형상의 ‘악마’가 뒤에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기사는 앞만 응시하며 묵묵히 말을 달립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좌우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의 몸을 감싼 견고한 갑옷과 허리에 찬 검,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합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과 보이지 않는 유혹이 뒤엉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붙들며 걸어가야 할까요? 에베소서 6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대답이자,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략서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에베소서 6장 강해를 통해, 이 장이 단순한 윤리적 지침을 넘어 성도가 땅과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매뉴얼’임을 역설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질서

거창한 영적 전쟁을 논하기 전, 바울의 시선은 가장 내밀하고 일상적인 공간인 ‘가정’과 ‘일터’로 향합니다. 전쟁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치열한 영적 현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한 바울의 선언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단순한 사회적 통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어두신 질서이며, 그 질서에 순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얻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은 기복적인 약속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바로 설 때 임하는 샬롬(Shalom)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 상전과 종이 서로를 ‘하늘에 상전이 계신 존재’로 인식하며 공갈을 그치고 성실히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곧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빛의 갑옷, 그 견고한 위로

일상의 질서를 세운 후, 바울은 시선을 영적 세계로 확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뒤러의 그림 속 기사가 갑옷을 입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듯, 우리 또한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이 여섯 가지 무구는 각각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는 하나의 방어막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전신갑주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은혜의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사탄이 정죄의 화살을 쏠 때 ‘의의 흉배’가 가슴을 지키고, 의심이 몰려올 때 ‘믿음의 방패’가 그 불화살을 소멸합니다. 세상이 요동칠 때 ‘평안의 복음’이 우리의 발을 견고히 하며, 절망 속에서도 ‘구원의 투구’가 우리의 생각을 소망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러하셨듯 사탄의 궤계를 단숨에 베어버리는 권능이 됩니다. 이처럼 전신갑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선물이며 보호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기도의 호흡, 승리를 향한 행진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움직일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신갑주를 설명한 직후 ‘기도’를 언급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기도는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호흡과도 같으며, 전장에 쏟아지는 보급로와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영적 전쟁은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아 싸우는 대리전(代理戰)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쇠사슬에 매인 바울이 구한 기도 제목입니다. 그는 자신의 석방이나 안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감옥이라는 절망적 상황조차 그에게는 복음을 위한 ‘대사’의 직임이 수행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야성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안위를 넘어,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자를 위해 서로 중보 할 때, 우리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영적 군대로서 함께 승리하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위로를 전하며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축복합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동력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뒤러의 판화 속 기사가 어둠 속에서도 앞만 보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도달해야 할 성(城)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관계의 어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점검해 봅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단단히 입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은혜는 준비된 자에게,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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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선택과 유기

로마서 9장에 들어서는 바울의 음성은 교리적 논증을 앞세운 강연자의 것이라기보다, 끊어질 듯한 아픔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자의 탄식에 가깝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8장의 영광스러운 환희가 9장의 깊은 고뇌로 이어지는 지점, 즉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밀어 올릴 때 발생하는 ‘역설의 문법’에 주목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랑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직후, 곧바로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인 연민의 자리로 데려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진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흔히 로마서를 교리(1~8장)와 윤리(12~16장)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학습 습관이 9장에 담긴 바울의 눈물을 가릴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사실 8장의 확신이야말로 9장의 애통을 낳는 모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사랑의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참된 비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언어는 십자가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동시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버림받는 고통을 수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거대한 주제는 차가운 신학적 계산이 아니라 뜨거운 중보의 심장 위에서 읽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야곱과 에서, 혹은 가인과 아벨의 서사를 통해 선택의 신비가 결코 특권이나 정당화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의 통곡을 잊지 않아야 할 책임이며, 선택받은 자의 부르심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을 때, 곁에 서 있는 형의 차가운 시선은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의 은혜가 우리를 ‘집 안에 있는 자’의 안일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으로 이끈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이 나열한 이스라엘의 여덟 가지 특권—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들, 그리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는 호흡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기독교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이라는 거대한 약속의 토양 위에서 완성된 성취임을 잊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뿌리에 대한 존경이 없는 신앙은 교만해지기 쉽지만, 우리 예배의 “아멘”과 “할렐루야” 속에 히브리적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바울이 동족을 향해 품었던 고통은 바로 이 뿌리를 향한 연민이자, 하나님이 시작하신 역사를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로마서 9장의 정점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바울의 눈물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침묵 속에 웅변하듯, 바울의 “끊어질지라도”라는 고백은 비명 없는 비명을 품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받은 자의 자리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것이 신자를 자만이 아닌 소명의 자리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의 아픔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며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자신이 미워했던 이들을 복음으로 다시 찾아가는 사랑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로마서 9장을 단순한 예정론 논쟁의 장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보의 장으로 전환시킵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확인하는 방패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사랑의 사건이며, 그 사랑은 민족과 역사, 전통과 상처의 모든 층위를 관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전하는 자는 거짓 없는 눈물로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은 우리를 더 정교한 지식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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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고린도전서 7장에 담긴 종과 자유

고린도전서 7장은 얼핏 보면 결혼과 독신, 부부 간의 성적 윤리라는 실천적 주제를 다루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시선으로 따라가면 그 밑바닥에는 세상의 위계를 거꾸로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또렷하게 흐른다. 그는 7장 21–24절이 왜 신학사에서 난해한 본문으로 남아 있는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 단락이 즉흥적 삽입이 아니라 본문의 중심맥을 드러내는 의도적 전개임을 차분히 밝혀 간다. “결혼을 말하다가 왜 종과 자유를 꺼내는가?”라는 물음은 바울의 글쓰기 전체를 보아야 풀린다. 장재형목사는 6장에서 음행을 다루다가 갑자기 세상 법정의 송사를 책망하는 전환을 떠올리게 한다. 문맥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음란과 가정 파괴의 문제가 신자들의 송사로 번졌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수치를 불신자들 앞에 내보이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더 깊은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사회법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을 지키는 공동체 치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동시에 장재형목사는 균형을 분명히 한다. 교회 밖에서 부당한 피해를 당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시민으로서 정당한 보호를 구해야 한다. 바울의 경계는 어디까지나 “교회 내부의 부끄러운 일”을 세상 법정으로 퍼뜨리는 무책임을 겨냥한 것이지, 법 질서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 관점을 7장으로 가져오면, 결혼 담론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듯한 종과 자유의 언급이 놀랍도록 설득력을 얻는다. 로마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였고, 여성은 법적·사회적 권리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기 쉬웠다. 남편은 아내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강한 권한을 행사했고, 아내가 남편의 의사에 반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버림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7장 21절의 “종”이 단지 경제·법적 신분으로서의 노예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사실상 종처럼 취급된 아내들까지 아우르는 다층적 지시어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뿐 아니라 불의한 질서 속에서 존엄을 잃은 여성 신자들에게 건네는 근원적 위로다. 이어지는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구절은 더욱 급진적이다. 억압적 관계에서 벗어날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면, 신앙은 체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의 선택을 독려한다. 구원의 영성은 현실을 떠난 관념이 아니라, 몸과 관계와 제도 속에서 존엄을 회복시키는 능동적 힘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빛난다.

7장 22절은 이 위로를 신학적으로 마무리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사회가 매긴 위계는 복음 안에서 전복된다. 종이라 불리던 자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정체성이 선포되고, 사회적 자유인·가정의 가장으로 군림하던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새로운 훈련이 시작된다. 힘 있는 자의 자유는 더 이상 사적 이익을 지키는 면허가 아니라 섬김의 소명으로 바뀐다. 그래서 7장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선언이 절정을 이룬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20장 28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피 값으로 산 존재는 어떤 인간 권력의 소유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사병도, 누구의 전리품도 아니다. 이 품격의 신학은 7장 24절의 권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서 구체가 된다. 신분, 가족 역할, 직업과 형편이 우리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부르심이 우리의 정체성과 실천을 이끈다는 뜻이다.

이 전복의 원리는 바울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라 예수께서 삶과 가르침으로 열어 보이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영광을 청탁하자, 주님은 세상의 권력 구조와 제자의 길을 대비시키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주관하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바울의 가정 윤리에 연결한다. 가정의 주도권을 권력으로 행사하던 남편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랑과 희생의 섬김을 명하고, 종처럼 취급받던 아내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존엄을 회복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낮아짐과 순종, 섬김과 자기 비움으로 드러난다. 그 공기가 교회와 가정에 흐르기 시작할 때, 세상의 위계는 사랑의 질서로 바뀐다.

마태복음 19장에 드러나는 이혼 논쟁은 당시 여성의 취약한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 자체가 남성의 자의적 이혼 관행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준다. 신명기 24장의 이혼증서는 그나마 피해 여인에게 사회적 재진입의 최소한을 보장하려는 방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허용의 배경을 “마음의 완악함”으로 진단하시고 창조 원리를 회복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규정하심으로써, 주님은 남성 중심의 이혼 관행에 제동을 걸고 혼인 언약의 거룩을 재건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울타리가 억압의 족쇄가 아니라 약자를 위한 정의의 방패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가 이 사랑의 법을 붙잡을 때, 약한 지체의 눈물을 비용으로 삼는 손쉬운 해체의 문화를 거부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이 미혼자와 과부에게 말하는 대목으로 시선을 옮기면,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권면이 등장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열쇠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시간의식, 곧 카이로스에서 찾는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라는 표현은 허무의 구호가 아니라, 다가오는 주님의 날 앞에서 집중과 절제를 요청하는 부름이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권면은 관계와 감정과 소유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에 예속되지 말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선권을 두라는 지침이다. 장가간 자가 아내를 기쁘게 하느라 마음이 나뉠 수 있고, 장가가지 않은 자가 주의 일에 더 전념할 여지가 있다는 바울의 설명은 소명 배분과 삶의 질서에 관한 성숙한 분별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경우를 상기시키며, 초대교회가 혈연 가족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영적 가족 공동체를 더 큰 질서로 삼았음을 짚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의 이름이 복음서에 분명히 기록된 사실은, 여성의 이름과 증언을 공동체 기억 속에 새겨 넣은 교회의 역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헌신의 전통은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제도화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수도 전통은 마태복음 19장 12절,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에 기대어 온전한 전념을 선택한 이들의 길이다. 개혁 전통이 같은 제도적 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때가 단축된” 시대 감각 앞에서 주를 위하여 독신의 재화를 귀히 여긴 마음은 배울 가치가 있다. 바울의 의도는 결혼을 금령으로 묶으려는 것이 아니라, 혼인의 선함과 독신의 유익을 함께 인정하며 각 사람의 은사와 형편에 따라 “분요함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7장 36–38절에서 딸을 시집보내도 잘하는 일이나 보내지 아니함은 더 잘하는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임박한 때의 영적 집중이라는 특별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부에 대한 권면 또한 재혼은 “주 안에서만” 자유이며, 바울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되다 하되, 누구에게도 일률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소명과 양심, 공동체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메시지를 오늘에 심으려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가정 폭력과 강압, 불의한 구조 앞에서 침묵하거나 영적 언어로 덮어서는 안 된다.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말씀은 피해자에게 탈출과 보호, 법적 구제를 권하는 적극적 사랑의 명령이다. 교회 치리는 죄를 숨기는 내부 논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 회개를 요구하고 약자를 지키는 정의의 실천이어야 한다. 둘째, 힘 있는 자의 회심은 특권의 보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재사회화되는 변혁이어야 한다. 남편의 권위는 군림의 인가가 아니라 책임의 십자가다. 직장과 사회에서의 자유도 자기실현의 전리품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자원이다. 복음은 억압받는 이를 자유인으로 일으키고, 자유인을 섬기는 종으로 낮춘다. 이 역설이 교회와 가정의 체질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다.

결국 관건은 7장 24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 모인다. 소명은 자리 이동의 명령이기 전에 자리 성화의 사건이다.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회적 약자이든 강자이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질서를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 우리를 이끈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복음은 먼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망과 제도, 일터와 가정, 교회와 도시 속에서 몸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의 난해함을 이유로 본문을 비껴 가는 대신, 그 난해함이 열어 주는 더 깊은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권위는 섬김으로 성화되며, 결혼은 예배로 승화된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더 분주해질 이유가 아니라 더 단호해질 이유를 얻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생활의 언어로 바꾸어 가는 일, 그것이 종과 자유, 결혼과 독신의 구분을 넘어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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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세리와 죄인을 향한 복음

1. 복음과 사랑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이 왜 ‘사랑’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왜 복음은 곧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장’이라 부르는 성경학자들의 말대로, 그 안에는 구원과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본질은 삶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 곧 우리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흥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그 실천적 내용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어떤 교리나 신앙 체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삶으로 보이신 복음은, 말 그대로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장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도바울이 도시인의 언어로 표현한 이 ‘사랑장(章)’은, 사랑의 속성을 매우 논리적이고 해설적으로 풀어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는 말씀(고전 13:4 이하)은, 세상 도처에서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도덕적 가르침이나 예의범절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구절을 통해, 사랑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적 측면을 담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말씀은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 또한 주를 완전한 사랑으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가르치듯이, 복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시작되며, 그 대상은 모든 이, 심지어 세리와 창기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그 낮추심과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먼저 열리고,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때로는 먼저 지적으로 깨달음이 와서 마음이 열릴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이 먼저 열려서 지적인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과 이성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숙고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틀이나 습관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역사 속 사례 중 유명한 예로, 폼페이(Pompeii)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묻혔을 때, 어미가 아이를 품고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의 본능적 희생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성은 자기 보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올 때, 서로 양보하기보다는 자신이 빛과 양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생존 경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자연적 본성과 달리, ‘자기 희생’을 통해 다른 생명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는 행동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최정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 없이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종종 설교나 강연에서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몸소 보여주신 행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지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은 가장 궁극적 형태이며,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특히 한자로 ‘희생(犧牲)’이라 쓸 때 ‘소’(牛)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도 해석하는데, 소가 평생 밭을 갈고, 자기 힘을 다해 주인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고기, 가죽, 뼈, 심지어 꼬리까지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가 생애를 다해 주인을 섬기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행사가 아닌, 정말 우리가 곁에서 직접 보는 낮은 자리에서의 헌신,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3:1).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배신이나 거부,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감싸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교훈이나 위안이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때,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저변에는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대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곧 ‘복음’인가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의 선언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 삶에서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듯 ‘발 벗고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과 세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가르쳐온 바,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근거로,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복음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99라는 다수를 중시합니다. ‘하나보다 아흔아홉이 더 중요하다’는 이 세상의 평범한 계산식에 길들여져 있으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자원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는 그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 세리와 죄인의 복음

누가복음 15장은 바로 이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란 단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류를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식사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익숙했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구별됨’을 강조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들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심지어 죄인들과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낯선 접촉’을 통해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멀리서 “너희는 죄인이니 당장 회개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죄로 물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원 의지와, 회복된 후에 함께 기뻐하는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데서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5:7). 이는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창기는 당시 율법 체제에서 가장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폄하되었고, 창기는 성적인 죄로 가장 경멸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았던 만큼 용서를 받았을 때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그 감사가 결국 삶의 완전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처럼(롬 5:20), 회개한 큰 죄인이 느끼는 은혜와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풍조는 때때로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이런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여, 더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 더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방치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낮은 곳을 향한 관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올리벳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사랑’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선교적 접근에서, 복음은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deed(행동)가 따라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복음 사역을 확장해나갈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고, 그들과 밥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애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바쁜 일상, 혹은 우리의 이기심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장벽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재정적인 자원이 풍성해질수록, 자칫하면 ‘잃어버린 자 한 명’보다 ‘이미 모인 많은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역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5장 5절, 6절을 보면,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그 양을 되찾았을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이는 그저 물건 한 점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생명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단지 도덕적 반성이나 형식적 죄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며, 그 속에는 자신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는 그 죄된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의 심각성, 그리고 자신이 그 죄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을수록, 감사와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 사람은 복음의 힘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범할 것이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사랑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죄로 쓰러져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 사용하여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다른, 복음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가 당연한 질서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서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신뢰가 우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닫힌 집이 아니라, 늘 열려 있고, 새로운 기회를 제시해주며,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의 그늘진 곳, 가난하고 병든 자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이주민 등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리와 죄인의 복음’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많은 재정과 자원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성공’을 인정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이웃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때로는, 조직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의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지에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역을 펼치며,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내년 교회 30주년을 맞아 가난한 나라에 300개의 학교를 지어주자”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목적이 단지 ‘건물 건립’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의 실제적 혜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교육받고, 질병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는 단순한 선교 프로젝트를 넘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복음’의 실천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세계입니다. 한 명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뒤로 남겨두는 세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세계, 죄인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말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은 단지 범죄자들이나 특정한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나는 의인이니,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된 ‘잃어버린 양’이었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던진 질문 중, “우리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찰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늘리는 일, 교인 수나 헌금을 늘리는 일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일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사랑의 수고를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자기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즉,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 용서의 기쁨을 서로에게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세리와 죄인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 큰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받아 더 큰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혁명적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것처럼,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요청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을 깨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사명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복음 공동체라면, 그들을 찾아다니며 보살펴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세리도, 사랑에 실패한 창기도, 삶에서 방황하는 청년도, 병실에서 고통받는 환자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영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힘 있게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 감동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하늘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세리와 죄인의 복음’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시금 깊이 깨닫길 간절히 소망하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사회와 선교지 곳곳에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길 호소합니다. 도시와 농촌,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를 막론하고,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소명을 감당할 때, 결국 복음은 삶으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죄인들이 회개와 용서,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격하고, 함께 구원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듣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까지 품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이, 실은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할 사명의 핵심이며,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헌신자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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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아담과 그리스도

1.  아담 한 사람의 죄와 그 영향

로마서 5장 12-2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여 아담과 그리스도를 극명히 대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가 우리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문이라고 강조한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고, 그 결과 사망이 만인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와 생명이 임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로마서 5장 12-21절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신학적 개념은 ‘원죄(original sin)’이다. 장재형목사는 원죄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반발, 즉 “왜 내가 죄 지은 적이 없는데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느냐”라는 항변을 자주 언급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범죄가 어떻게 자기 책임으로 전가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라는 폭군 같은 권세가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오늘날 인류가 사망의 그늘 아래 살고 있음을 구체적인 예로 든다. 만약 우리 본성이 갈망하는 에덴동산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었다면, 지금의 세계가 고통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원치 않는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고, 그것이 우리를 폭군처럼 억압한다. 설사 “인간은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니 죄인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나와 상관있다고 성경이 말하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해도, 성경은 그 시작점이 아담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즉, 아담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리를 바울이 설명할 때, 율법과 죄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덧붙여 말한다. 로마서 5장 13절에 따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율법은 모세 이후에 주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죄 자체는 이미 존재했다. 단지 법적 기준으로 ‘죄’가 확정되지 않았을 뿐이며, 모세 율법이 제시된 이후라야 죄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나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이미 그것은 ‘죄’이지만, 명문 율법이 없었기에 ‘법을 어겼다’는 식의 개념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다 해도 죄는 계속 존재했고, 율법은 죄를 죄로 더 분명히 인식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율법 자체가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율법으로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 주목하면서, 비록 아담처럼 직접 금지된 열매를 먹은 행위는 하지 않았어도 그 죄의 결과로서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죄론’이 갖는 무게이다. 한 사람 아담이 머리가 되어 범죄에 들어갔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그 죄의 영향력 아래 태어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이 대목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일컫는 부분을 특히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온 것처럼,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생명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아담이 상징하는 ‘옛 사람’에 속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새 사람’에 속할 것이냐를 묵상해야 한다.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강조한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구원이 전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전가(imputation)’라는 신학적 개념을 장재형목사는 다시 한번 자세히 풀이한다. 우리가 직접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넘어왔고, 반대로 우리의 의로움이 전혀 없음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처럼 죄의 전가(original sin)와 의의 전가(Christ’s righteousness)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철저히 신적인 주권과 은혜에 의한 사건이다.

이와 연동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5-47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난 육의 존재이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신령한 분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산 영(a living being)이라면, 둘째 사람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놓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므로, 두 대표자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대표성에 대해 “대표이론(Doctrine of Representation)” 혹은 “연합이론(Principle of Representation and Corporate Solidarity)”으로 설명한다.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범죄가 전가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그분의 의가 전가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구조적으로 서로 얽혀 있듯이,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순종은 그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띤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상의 예시로도 풀어낸다. 가령,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을 때, 어떤 부족 문화권에 사는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름이 아니라 부족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그 공동체와 ‘연대’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영적 차원에서 아담의 ‘머리됨’ 아래 한 몸체로 연대되었기에,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를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머리(new head)가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그분이 이루신 의의 공로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종자 개량론”이라고 비유적으로도 설명한다. 이사야서 53장 10절에서는 고난의 종이 죽지만 씨를 본다고 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종자’가 나타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아담’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핵심적이고 으뜸 되는 죄는 불신앙(unfaith)과 불순종(disobedience)이다. 아담에게서 드러났던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믿지 않고 어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만약에 아담이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다면, 사망과 죄의 지배가 인류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불신앙의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지만,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대표이론, 그리고 연합의 원리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려면 먼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못 박혀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얻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본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적이고 죄된 생명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갈라디아서2장 20절). 그럴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된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역시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설명한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온 인류가 복을 받는 언약이 주어졌고, 동일한 원리로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전가했고, 예수 한 사람이 의를 전가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장면에서도,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라는 언급이 나오듯이, 죄와 복은 결코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온 공동체와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연대적 결과를 낳는다.

민수기 16장 고라의 반역 사건에서, 고라의 죄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소유까지 전부 징벌받는 장면은 대표이론과 연대성의 무시무시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수아서 7장의 아간의 범죄에서도 아간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이 돌로 쳐서 불태워진다. 그들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이유는 죄의 연대적 파급 효과를 두려워했고, 죄가 공동체 전체에 미칠 영향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암소와 염소와 양을 쪼개어 놓고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고난을 받는다”라고 예언하셨는데, 이는 언약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의 작은 순종 혹은 불순종, 완전함 혹은 미흡함까지도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 부분이 후대에 결과적으로 연결되어 나간다. 이처럼 한 개인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개인 이상으로 공동체와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불러오는 여파가 후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대표이론이 갖는 무시무시함이자 동시에 복된 약속이기도 하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는 장면도 바울이 말하는 대표성과 공명한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온 백성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의 기도로 인해 하늘이 열리고 닫힌다는 사실은 한 개인의 위치와 권세가 결코 개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로마서 5장 20-21절에 이르러, 바울은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려 온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 “생명과 영생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죄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던 세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로 바뀐다. 이로써 인류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서 고통받던 낡은 역사는 지나가고,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새 역사가 열린다(고린도후서 5장17절).

장재형목사는 결국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아담 안에 속한 옛 본성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새 본성이냐를 묻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 안에 살 때 우리는 의와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바울이 말하는 대표이론과 연대성은 그저 난해한 교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 아니면 은혜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를 결정짓는 실제적인 문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넘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며, 아담의 죄와 정죄가 걷어낼 수 없었던 깊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2.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와 구원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강조되는 주제는 아담과 결정적으로 대조되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새 아담’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앞서 아담이 죄의 문을 열어 죽음과 파멸이 임하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의와 생명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여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한 사람(아담)의 범죄’와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을 명확히 대비시킨다. 죄와 불순종이 지배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의와 순종이 확립되었고, 그로 인해 죄인이었던 자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반복적으로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전가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이루신 결과를 우리가 ‘공로 없이’ 전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 은혜의 정수다.

이러한 사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으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을 초래했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도야말로 복음서와 사도서신 전반에 깔린 핵심 줄거리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한 개인의 죽음과 부활 이상이며, 모든 인류의 머리(대표)로서 죄가운데 있는 자들을 대신해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나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을 받나? 내가 못한 것을 예수님이 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적용되느냐?” 하고 묻는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대표이론”과“연합의 원리”가 해답을 제시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인간은 본래 아담과 죄의 연대 속에 태어나 죄의 종속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새 대표자가 되셔서 그 죄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움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시인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장재형목사는 ‘종자의 근본적 변화’로도 설명한다. 마치 씨앗 자체가 새롭게 바뀐 것이기에, 이제는 다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7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해 왕 노릇했다면,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두고 사망과 죄가 왕 노릇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은혜와 의가 왕 노릇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다고 해석한다. 바울은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사람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새 생명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스리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죄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우리를 의와 생명의 왕권 아래로 이끌어,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누리게 하는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다시 끌어온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는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지만, 떨어진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삶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친히 요한복음 15장 9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초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 영적 성장과 풍성함의 필수 열쇠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대표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라고 부른다. 연합은 그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문제이기에, 교회가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의와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넘어서는 실재적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기록된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사용하는 세 가지 비유―노예시장(속량), 법정(칭의), 제단(화목제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대속적이며, 실재적인 의미를 갖는지 설명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고, 우리가 죄인이지만 법정에서 ‘의롭다’ 선고받게 하셨으며,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의 담을 허무셨다. 이런 모든 구원 은혜가 ‘대표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말한다.

이와 같은 대표이론은 세상적인 예시로도 설명될 수 있다. 국가의 대표자가 체결한 조약 하나가 국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듯이, 가정의 대표가 집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기면 그 구성원 전체가 거기에 연대적으로 영향을 받듯이, 한 사람의 결정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전반에 미치는 것이다. 영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담이 죄의 문서를 ‘도장’ 찍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 묶어놓았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와 생명의 문서를 ‘도장’ 찍어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죄의 심각성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크고 전인적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5장 20-21절의 결론부에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선포한다. 사망이 왕 노릇하던 곳에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죄가 극심한 상황을 본다 해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사는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폭발적으로 드러났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은혜가 죄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며, 생명이 사망보다 무한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인용한다.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 노릇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날마다 인식해야 하며, 나아가 삶 속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전체적으로, 로마서 5장 12-21절에 드러난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이 구원의 대서사를 붙들 때, 인간의 죄에 대한 자기연민이나 절망, 또는 “과연 내가 바뀔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자리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아담의 타락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새 아담’과 연합되어 의와 생명,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었음을 날마다 확인해야 한다. 그저 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근본이 뒤바뀌었다는 선언이기에, 사망이 왕 노릇하던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벗어나, 이제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를 성도 개인의 경건 생활, 교회 공동체의 비전,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확대해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한 개인의 믿음과 순종이 결코 개인 한 사람의 테두리 안에 그치지 않고,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대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이 흐르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잠재력과 사명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된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표권을 위임받아, 죄가 만연한 곳에 은혜와 생명을 실어 나르고, 불의가 가득한 곳에 정의와 사랑을 전파하며, 절망이 짙은 곳에 희망을 심는 삶을 살게 된다.

로마서 5장 12-21절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죄와 사망, 그리고 의와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인류와 개개인에게 전개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아담의 불순종이 몰고 온 재앙적인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구원과 생명의 복된 소식을 장중하게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설교하며, 각 성도가 “도대체 나는 어떤 대표 아래 있는가?”를 성찰해 보길 권면한다. 아담 아래 남아 있다면 죄의 무게에 영원히 눌릴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로써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바울의 결론은 그저 개인적 깨달음이나 신앙적 위로를 넘어, 실제 존재의 혁신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복음이야말로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라고 역설하며, 이 복음의 능력이 신앙고백 차원을 넘어 삶의 변화를 이끌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본문의 핵심은 단지 죄가 있다, 은혜가 있다를 넘어서는 ‘생명의 실제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선언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너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신자는 아담의 죄와 연합된 옛 정체성을 끊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정체성을 살아내는 소명을 가진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성도들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붙들기를 촉구한다. 첫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와 생명의 운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담의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더욱 크고 더 강력하다. 죄가 깊을수록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고백을 현실 속에서 체득할 때, 신자들은 참된 자유와 소망을 얻는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류가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망의 권세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믿는 이들이 그 사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날마다 은혜와 의, 그리고 생명의 실체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로마서 5장이 전하는 가장 기쁜 소식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과 정죄가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의롭다 함과 생명이 임했다. 이 단순한 진술 안에는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구속사(救贖史)가 집약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이 진리를 붙들 때, 과거 아담이 열어버린 죄의 세계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펼쳐 보인 새로운 에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이 땅 위에서부터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 설파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변함없이 강력하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성과 연합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죄와 사망이 얼마나 강한 폭군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는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이 선언은, 우리가 매일 죄와 싸우고 넘어질 때조차도 여전히 우리를 붙드는 복음의 능력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구원의 근본 원리인 대표성과 연대성,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한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옛 대표인 아담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따른 결과는 죄와 사망의 지속이거나, 아니면 의와 생명의 새 역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 현실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가 전해야 할 참된 희망의 메시지라고 힘주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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