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영혼의 거울: 로마서 2장을 통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복음 성찰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인류 역사의 지혜로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과 같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현미경 같은 예리함을 발휘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어둠을 직시할 때는 시력을 잃은 듯 무력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근시는 신앙의 영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유창한 종교적 수사, 수십 년의 신앙 경력과 교회 내의 중직이라는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이미 구원의 안전지대에 안착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2장 12절에서 29절에 이르는 바울의 준엄한 선언은 이러한 안일한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그것을 모르는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라는 심판대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관통하는 핵심 관점 또한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은 피부에 새긴 표식이나 손에 든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의 만지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외형적 경건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물음은 비단 고대의 유대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은밀한 불의를 용인한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늘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화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도 똑바로 날아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증서, 매주 거르지 않는 주일 성수,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 자체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순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투영하며 ‘표면적 신앙’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유대인인 자가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없듯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자는 결코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은 소유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통회하는 회개가 없으며, 입술에는 복음의 언어가 가득하나 삶의 궤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내면의 양심, 그 피할 수 없는 법정

바울은 율법이라는 명문화된 기록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어둠이 단지 지식의 부재라는 변명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증거와 도덕적 지침을 이미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거창한 행위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은밀한 미움, 탐욕의 찌꺼기, 자기 의로 가득 찬 교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행해진 불순종의 순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고발은 시리도록 아프고 무겁지만, 결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왜 유일한 희망인지를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의 날카로운 영적 진단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줄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룩하고도 간절한 초대장입니다.


3. 성령의 칼로 새기는 ‘마음의 할례’

로마서 2장의 위대한 절정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새기는 관습적인 할례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죽어있는 문자와 율법 조문에 갇힌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면의 본질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신앙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돌처럼 단단해진 완고한 마음이 살점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가는 변화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에 목매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는 삶으로 그 목적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이며, 복음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체화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의식과 전통은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자기 의를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로 전락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고안해낸 형식을 완수함으로써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겸손한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자신의 죄를 먼저 세밀하게 살피며,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됩니다.


4. 사람의 갈채를 넘어 하나님의 인정을 향하여

바울은 장의 말미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보상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찰나의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의식하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사람들에게 신실해 보이기 위해 종교적 외양을 다듬는 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 가슴에 남기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나는 그저 종교적 무대 위의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 영적인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아는 자만이 쏟아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 복음의 찬란한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가두려는 어두운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뱉는 말,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머무는 사람에게, 비로소 참된 성경 묵상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blogwaves.co.kr

davidjang.org

올리벳 대학교(설립자 장재형 목사), 개교 22주년 감사예배 성료…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라”

올리벳 대학교(Olivet University, 이하 OU)는 지난 3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캠퍼스 채플에서 창립 22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거행했습니다. 이번 예배는 지난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동체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에 깊은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다가올 선교의 새로운 지평과 도약을 향한 공동체적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날 예배의 주된 메시지는 OU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선포하며 대학의 영적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번 22주년 기념 예배는 히브리서 12장 1~2절과 사도행전 20장 17~38절을 중심 본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히브리서의 권면을 예배의 핵심 주제로 선포했습니다. 대학 측은 이 말씀이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문구를 넘어, OU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전 공동체 구성원이 가슴에 새겨야 할 절대적인 이정표임을 강조했습니다.


🛡️ “오직 믿음·은혜·말씀” –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는 교육 철학

장재형 목사는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의 올리벳 대학교를 지탱해 온 불변의 영적 원리로 종교개혁의 3대 가치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을 다시금 천명했습니다. 그는 이 고백들이 대학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영적 근간이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도 대학의 정체성과 선교적 사명을 규정하는 핵심 가치가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교수진과 학생, 임직원들은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함께 기록하며, 학문적 성취보다 신앙 중심적 사명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지식 전달을 넘어 영혼을 변화시키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초심을 다지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 21년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소박한 시작에서 세계적 선교 대학으로”

이날 메시지는 올리벳 대학교가 걸어온 지난 21년간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많은 도전과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공동체를 보호하고 지탱해 오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들이 이어졌습니다. OU는 아주 작은 규모의 소박한 출발을 시작으로, 교회와 신학교, 종합대학교로 거듭났으며, 현재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교육 사역 네트워크로 확장되었습니다. 대학 공동체는 이번 22주년을 단순한 연례 행사가 아닌,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고 새로운 선교적 시즌(New Season)을 여는 강력한 출발점으로 선포했습니다.

특히 신학 교육과 영적 지도자 양성에 대한 OU의 본질적 사명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학교를 가리켜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모판”**이라고 정의하며, 세계 교회를 겸손히 섬길 목회자와 기독교 리더들을 철저히 준비시키는 사명을 환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올리벳 신학대학 및 신대원(OTCS)과 올리벳 신학교(OTS)가 그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다시금 조명되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학의 시작이자 마침표”

22주년의 주제인 “예수를 바라보자”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기원이자 완성이심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대학을 시작하신 분도 주님이시며, 이 대학을 완성하실 분도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는 학교의 모든 학문적 연구와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에서 구성원들의 시선이 오직 그리스도께 고정되어야 함을 권면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계획이나 지략이 아닌, 주님의 주권적인 인도를 따를 때 대학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 “범사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 미래를 향한 비전

올리벳 대학교는 향후 학업 프로그램의 질적 향상과 국제적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확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박힌 교육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학, 비즈니스, IT 기술, 예술 등 대학 내 모든 분과 학문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에 기여해야 한다는 전포괄적인 신앙관을 제시했습니다.


🙏 사도 바울의 눈물을 본받는 헌신과 기도의 마무리

예배의 결론은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별 설교를 성찰하는 것으로 맺어졌습니다. 겸손과 인내, 그리고 영혼을 향한 눈물과 신실한 가르침으로 요약되는 바울의 사역 태도가 OU의 모든 교육자와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함이 강조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격하며, 앞으로의 22주년을 맞이해 공동체의 뜨거운 연합과 사랑, 그리고 새로운 헌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구성원들은 “예수를 바라보자”는 주제를 삶의 모토로 삼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대학이라는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 올리벳 대학교(Olivet University) 소개

올리벳 대학교(OU)는 성경적 가치관과 정통 신학에 기초한 교육 정체성을 바탕으로, 학문과 사역 전반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비전을 추구합니다. 세계 교회의 영적 부흥을 이끌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교육 사역의 지평을 전 세계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http://blogwaves.co.kr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당신은 무엇으로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


장재형 목사의 에베소서 6장 묵상: 관계의 회복에서 영적 승리까지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중에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라는 걸작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골짜기, 해골을 든 ‘죽음’이 모래시계를 들이밀며 시간을 재촉하고, 기괴한 형상의 ‘악마’가 뒤에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기사는 앞만 응시하며 묵묵히 말을 달립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좌우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의 몸을 감싼 견고한 갑옷과 허리에 찬 검,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합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과 보이지 않는 유혹이 뒤엉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붙들며 걸어가야 할까요? 에베소서 6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대답이자,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략서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에베소서 6장 강해를 통해, 이 장이 단순한 윤리적 지침을 넘어 성도가 땅과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매뉴얼’임을 역설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질서

거창한 영적 전쟁을 논하기 전, 바울의 시선은 가장 내밀하고 일상적인 공간인 ‘가정’과 ‘일터’로 향합니다. 전쟁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치열한 영적 현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한 바울의 선언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단순한 사회적 통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어두신 질서이며, 그 질서에 순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얻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은 기복적인 약속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바로 설 때 임하는 샬롬(Shalom)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 상전과 종이 서로를 ‘하늘에 상전이 계신 존재’로 인식하며 공갈을 그치고 성실히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곧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빛의 갑옷, 그 견고한 위로

일상의 질서를 세운 후, 바울은 시선을 영적 세계로 확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뒤러의 그림 속 기사가 갑옷을 입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듯, 우리 또한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이 여섯 가지 무구는 각각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는 하나의 방어막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전신갑주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은혜의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사탄이 정죄의 화살을 쏠 때 ‘의의 흉배’가 가슴을 지키고, 의심이 몰려올 때 ‘믿음의 방패’가 그 불화살을 소멸합니다. 세상이 요동칠 때 ‘평안의 복음’이 우리의 발을 견고히 하며, 절망 속에서도 ‘구원의 투구’가 우리의 생각을 소망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러하셨듯 사탄의 궤계를 단숨에 베어버리는 권능이 됩니다. 이처럼 전신갑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선물이며 보호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기도의 호흡, 승리를 향한 행진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움직일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신갑주를 설명한 직후 ‘기도’를 언급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기도는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호흡과도 같으며, 전장에 쏟아지는 보급로와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영적 전쟁은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아 싸우는 대리전(代理戰)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쇠사슬에 매인 바울이 구한 기도 제목입니다. 그는 자신의 석방이나 안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감옥이라는 절망적 상황조차 그에게는 복음을 위한 ‘대사’의 직임이 수행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야성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안위를 넘어,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자를 위해 서로 중보 할 때, 우리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영적 군대로서 함께 승리하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위로를 전하며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축복합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동력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뒤러의 판화 속 기사가 어둠 속에서도 앞만 보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도달해야 할 성(城)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관계의 어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점검해 봅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단단히 입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은혜는 준비된 자에게,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합니다.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선택과 유기

로마서 9장에 들어서는 바울의 음성은 교리적 논증을 앞세운 강연자의 것이라기보다, 끊어질 듯한 아픔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자의 탄식에 가깝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8장의 영광스러운 환희가 9장의 깊은 고뇌로 이어지는 지점, 즉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밀어 올릴 때 발생하는 ‘역설의 문법’에 주목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랑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직후, 곧바로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인 연민의 자리로 데려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진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흔히 로마서를 교리(1~8장)와 윤리(12~16장)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학습 습관이 9장에 담긴 바울의 눈물을 가릴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사실 8장의 확신이야말로 9장의 애통을 낳는 모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사랑의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참된 비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언어는 십자가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동시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버림받는 고통을 수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거대한 주제는 차가운 신학적 계산이 아니라 뜨거운 중보의 심장 위에서 읽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야곱과 에서, 혹은 가인과 아벨의 서사를 통해 선택의 신비가 결코 특권이나 정당화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의 통곡을 잊지 않아야 할 책임이며, 선택받은 자의 부르심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을 때, 곁에 서 있는 형의 차가운 시선은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의 은혜가 우리를 ‘집 안에 있는 자’의 안일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으로 이끈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이 나열한 이스라엘의 여덟 가지 특권—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들, 그리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는 호흡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기독교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이라는 거대한 약속의 토양 위에서 완성된 성취임을 잊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뿌리에 대한 존경이 없는 신앙은 교만해지기 쉽지만, 우리 예배의 “아멘”과 “할렐루야” 속에 히브리적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바울이 동족을 향해 품었던 고통은 바로 이 뿌리를 향한 연민이자, 하나님이 시작하신 역사를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로마서 9장의 정점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바울의 눈물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침묵 속에 웅변하듯, 바울의 “끊어질지라도”라는 고백은 비명 없는 비명을 품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받은 자의 자리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것이 신자를 자만이 아닌 소명의 자리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의 아픔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며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자신이 미워했던 이들을 복음으로 다시 찾아가는 사랑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로마서 9장을 단순한 예정론 논쟁의 장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보의 장으로 전환시킵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확인하는 방패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사랑의 사건이며, 그 사랑은 민족과 역사, 전통과 상처의 모든 층위를 관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전하는 자는 거짓 없는 눈물로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은 우리를 더 정교한 지식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blogwaves.co.kr

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