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 묵상: 신약 성경의 고대 도시들과 바울 선교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복음의 질문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소리 없이 방향을 틀어, 1453년 5월 29일 찬란했던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던 그 비극적인 순간은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영원히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만을 세상에 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신약 성경의 생명력 넘치는 초대 교회들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찬란한 비잔티움 기독교 문화가 꽃을 피우며 번성했던 그 거룩한 땅이,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지배 질서 안으로 속절없이 넘어가게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명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깊은 영적 설교는 바로 이 비극적인 함락의 장면에 멈춰 서지 않고,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신약 성경 속 고대 도시들의 구석구석에 선명하게 새겨진 사도 바울의 열정적인 선교 발자취와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눈부신 흔적들을 조용히 따라갑니다. 단순한 과거의 유적지나 폐허가 된 낯선 지명을 답사하는 호기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연 살아 있는 복음이라는 거대한 능력이 어떻게 당시 타락한 도시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오늘날 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의 풍요 속에서도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뜨거운 첫사랑을 목숨 걸고 지켜내야만 하는지 우리의 영혼을 향해 엄숙하게 묻습니다.

오늘날 터키라는 지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 아나톨리아의 거친 땅 위에는 찬란한 역사를 품은 에베소와 갈라디아, 라오디게아와 버가모, 비시디아 안디옥과 드로아, 골로새와 서머나 같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성경의 도시들이 눈부시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대 도시들은 단순히 사도 바울이 거쳐 지나간 무대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땀방울이 머물고 목숨을 건 교회가 세워졌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울 같은 믿음과 세상의 썩어질 우상 숭배, 값없는 은혜와 인간의 교만한 자기 확신이 피 터지게 충돌했던 치열한 영적 전쟁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 도시들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먼 옛날의 낡은 지도를 펼쳐보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위태로운 신앙이 과연 어떤 반석 위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거룩한 성경 묵상입니다.

복음은 도시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에베소는 거대한 상업의 물결과 음란한 종교 의식이 함께 뒤엉켜 소아시아의 경제와 문화를 쥐락펴락하던 중심 도시였습니다. 시내 한복판에 웅장하게 솟아 있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온 도시의 명성과 막대한 경제적 부를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각종 마술과 주술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을 교묘하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영적 어둠의 요새 같은 곳에 약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머물며 생명의 복음을 거침없이 선포했고,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예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먹고사는 생업의 현장까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이 도시의 거대한 우상 숭배 질서와 정면으로 거칠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한 도시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절대적으로 믿고 무엇을 삶의 가치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중심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목숨처럼 의지하던 수많은 마술책들을 한곳에 모아 불길 속에 던져 넣는 극적인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되어 쓸모없어진 낡은 물건들을 정리해 없애는 단순한 행위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든든하게 붙들어 주리라 맹목적으로 믿었던 세상의 힘을 스스로 내려놓고, 이제는 삶의 중심을 오직 하나님께 새롭게 정하겠다는 철저하고도 두려운 회개의 확실한 표지였습니다. 진정한 복음이란 단순히 인간의 지식 창고에 고상한 문장 하나를 더 보태어 주는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삶의 의지하던 잘못된 토대를 과감하게 바꾸고 내 인생의 걸어가는 방향을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돌이키게 만드는 강력한 영적 능력입니다.

이방 땅 갈라디아에서는 율법과 믿음, 눈에 보이는 할례와 영원한 구원의 문제가 교회 안팎의 가장 뜨거운 중심 질문으로 거세게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자신의 훌륭한 외적인 종교적 표지나 썩어질 전통을 앞세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없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만 값없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목소리 높여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또 다른 무거운 종교적 규범이나 굴레를 억지로 부과하는 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의 수많은 교회들은 참된 복음이 인간의 좁은 민족적 편견과 관습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소식임을 온 세상에 보여 주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역사적인 제1차 선교 여행 도중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문이 활짝 넓어진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드로아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케도니아를 향한 전혀 새로운 선교의 길이 극적으로 열렸고, 바울은 자신이 익숙하게 머물던 안식의 영역을 과감히 떠나 푸른 바다를 건너는 모험에 나섰습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서로에게 보내진 편지를 기쁘게 나누어 읽으며 멀리 떨어진 한 교회가 받은 생명의 말씀을 이웃 공동체와 아낌없이 공유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세상의 도시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각각 세워나갔지만, 결코 그 교회들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외딴섬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촘촘히 엮어 놓았습니다.

성령이 머문 자리에는 완전히 다른 삶의 문화가 자라났다

드로아에서 시작되어 바다를 건넌 선교의 발걸음은 마침내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당시 강력한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바울은 영광스러운 유럽 대륙의 첫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 거룩한 시작점에는 멀리서 온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신실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해진 생명의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인 루디아는 사랑하는 온 가족과 함께 기쁨으로 세례를 받은 즉시, 자신의 개인적인 집을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아낌없이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거대한 석조 제구나 화려하게 치장된 웅장한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한 사람의 뜨거운 마음과 활짝 열린 평범한 가정집에서 참된 교회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차디찬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갇힌 채 온몸에 쇠사슬이 묶여 있으면서도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거룩한 하나님을 향해 큰 목소리로 불러 올렸던 감격적인 찬송은, 빌립보 성도들이 가진 신앙의 깊이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입니다. 삶의 고난과 핍박이 완전히 사라진 안전한 뒤에야 비로소 안도하며 부른 노래가 아니라, 숨이 막히는 고난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거룩한 찬송의 소리는 두려움과 절망이 짙게 지배하던 어두운 감옥을 단숨에 하늘의 영광이 가득한 예배의 자리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깊이 조명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감정만 고조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세상의 환경에 이끌려 무너너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도록 인간의 영혼의 중심을 새롭게 붙들어 주는 하늘의 힘입니다.

빌립보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향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섬기고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는 거룩한 가르송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헛된 영광을 최고로 추구하던 당시의 각박한 문화 속에서, 내 것을 내려놓고 연약한 자를 돌보며 가진 소유를 기쁘게 나누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분명히 낯설고 신비로운 질서였습니다. 참된 복음은 성도들을 세상의 도시에서 도망쳐 외딴 산속에 홀로 숨어 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악이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 당당히 머물면서도,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지적으로 세워 나갔습니다.

에베소의 뜨거운 변화 역시 단순한 외형적 종교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우상과 헛된 마술을 과감히 내버린 사람들은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고, 눈에 보이는 썩어질 물질적 욕망보다 영원한 사랑과 평화를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용했던 십자가와 물고기, 선한 양과 포도나무 같은 다양한 신앙의 상징들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되었고, 이후의 기독교 미술과 성화, 웅장한 교회 건축에도 깊은 기독교적 주제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솜씨로 빚어낸 미술과 건축의 화려한 변화보다 훨씬 더 앞서서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바로 완악했던 사람의 마음과 상처 입은 관계의 근본적인 회복이었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의 풍요 속에서도 영적으로 가난해진다

과거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었던 거룩한 도시였다고 해서, 그곳의 뜨거운 믿음이 세월이 흘러도 저절로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에베소 교회는 수많은 영적 수고와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주님을 향한 처음의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뼈아픈 책망을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보기에 바른 일들을 계속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왜 내가 이 거룩한 일을 처음 시작했는지 그 초심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고, 교회의 거대한 외형과 전통을 악착같이 지켜내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에서 진정한 사랑이 차갑게 식어 사라질 수 있다는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당시 상업과 눈부신 금융 발전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한 채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 머물러 매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가진 것이 많고 부유하다는 객관적사실이 결코 그 영혼의 영원한 충만함을 조금도 보증해 주지 않았으며,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오만한 자기 확신은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눈멀고 벌거벗었는지 영적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겪었던 첫사랑의 상실과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졌던 미지근한 영적 나태함은 겉보기에는 서로 전혀 다른 모습처럼 비쳐지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두 살아 있는 복음이 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한참 밀려나 버린 비참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버가모는 온 세상에 황제 숭배와 타락한 우상 숭배가 거세게 몰아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믿음을 끝까지 지킨 거룩한 이들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공동체 내부에는 서서히 도덕적 타락과 잘못된 가르침의 누룩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고난의 상징이었던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세상의 박해와 헐벗은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을 끝까지 지키라는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한 교회는 세상의 썩어질 풍요 속에서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버렸고, 다른 교회는 매서운 환난의 불길 속에서도 오히려 영적으로 더 환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깊이와 영적 가치는 그 도시가 누리는 물질적 번영이나 삶의 편안함의 크기로 결코 측정될 수 없습니다.

이 엄숙한 성경의 기록들은 고대 교회들의 과거 잘못을 앉아서 차갑게 평가하고 심판하기 위해 주어진 인류의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 각자의 성도가 거울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비추어 보게 만드는 영적 거울입니다. 내가 처음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복음을 들었을 때 가슴 뛰던 그 뜨거운 사랑이, 어느덧 메마른 의무감만 앙상하게 남은 율법적 습관으로 굳어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일상의 풍요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사보다 영적 무감각과 교만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이 주는 외부의 커다란 위협보다 내 안의 영적 타협이 훨씬 더 깊은 영혼의 균열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비록 세상의 화려한 도시는 결국 언젠가 흉물스러운 폐허로 무너져 내릴 수 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처음 사랑을 끝까지 회복하라는 그 거룩한 말씀의 생명력은 결코 영원히 폐허가 되지 않습니다.

제국의 거대한 성벽이 무너진 뒤에도 복음의 영원한 질문은 남는다

11세기 말 이후 거친 아나톨리아의 역사는 참으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전환의 소용돌이를 맞이했습니다. 1071년에 벌어진 치열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용맹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비잔티움 제국의 방어 군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이후, 비잔티움은 동부의 광활한 영토를 점차 속절없이 잃어버렸습니다. 서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잃어버린 기독교 세력의 영광을 기적적으로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명목으로 시작되었으나, 1204년에 벌어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무자비한 점령과 약탈은 오히려 같은 기독교 제국을 치명적으로 크게 약화시키는 자멸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1261년에 비록 수도를 우여곡절 끝에 다시 되찾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비잔티움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적 방어력은 깊이 쇠잔해진 상태였습니다.

13세기 말부터는 강력한 오스만 투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 전체에서 거침없이 세력을 넓혀 나갔고, 비잔티움 제국의 남은 영토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거대한 수도와 그 주변의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지역들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마침내 역사적인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정예 군대가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거대한 대포들을 대거 동원하여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참히 무너뜨리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천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상징이었던 웅장한 성 소피아 대성당이 하루아침에 이슬람의 사원으로 극적으로 전환된 역사적 사건은, 아나톨리아 땅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표지가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시행했던 독특한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소수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종교적으로 제한적인 자치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으나, 사회의 거대한 중심무대에서는 점차 밀려나 주변부로 전락했습니다. 한때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힘차게 전파하고 수많은 초대 교회가 눈부시게 성장했던 그 거룩한 땅은, 긴 세월의 흐름을 지나 이슬람 중심의 지역으로 완전히 변모했습니다. 이 엄숙한 역사의 흐름은 교회의 외적인 거대한 규모나 화려한 정치적 힘이 결코 그 안에 담긴 믿음을 영원히 보존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뼈저리게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세운 제국과 웅장한 건축물은 당대에 너무나 강하고 견고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의 거룩한 중심도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신약 성경의 고대 도시들과 터키 기독교의 기나긴 역사를 언제나 함께 나란히 바라보는 까닭은, 단순히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막연히 그리워하며 한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처절한 회개와 빌립보 감옥의 감격스러운 찬송, 서머나 교회의 눈물겨운 인내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믿음의 현장 안으로 생생하게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살아 있는 복음은 단순히 어느 시대 어느 도시에 한때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저절로 보존되지 않습니다. 매 시대마다, 매 순간마다 누군가가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듣고, 그동안 잘못 의지해 왔던 세상의 헛된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좁은 길을 기꺼이 선택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현재가 됩니다.

에베소의 차갑게 부서진 돌기둥들과 라오디게아의 쓸쓸한 폐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를 품은 낡은 성벽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아주 오랜 옛날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없는 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주는 가장 깊고 날카로운 질문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유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지금 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과연 무엇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 있으며, 내가 속해 있는 이 믿음의 공동체는 과연 어떤 영적 문화를 매일 세상 속에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복음이 쓸쓸히 스쳐 지나간 과거의 도시들의 낡은 흔적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오늘 이 거친 세상의 한복판에서 다시 한번 첫사랑을 거룩하게 선택하며 주님의 복음이 새롭게 머물러 살아 숨 쉴 또 하나의 거룩한 도시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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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의 누가복음 16장 19~31절: 무감각이라는 무서운 죄와 십자가 사랑으로 여는 영원의 문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법 앞에서》(Vor dem Gesetz)에는 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도 문지기의 위엄에 눌려 평생 동안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문턱에서 허망하게 늙어 죽어간 한 시골 사람의 가슴 아픈 비극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이와는 정반대이지만 한층 더 비극적인 신앙적 현실을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 비유 속에서는 문 안에 거하는 부자가 자신의 집 대문 바로 앞에 누워 있는 한 가난한 인간의 절규와 고통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완고하게 외면합니다. 한 울타리와 하나의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매일같이 화려한 자색 옷을 입고 입안이 즐거운 풍성한 잔치를 즐겼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 대문 밑바닥에 엎드려 상 위에서 떨어지는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 걸음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가까웠지만, 그 영혼의 사이에는 생전에도,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끝내 건너가지 못한 깊고 어두운 마음의 간격이 무섭게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완전히 닫혀 버린 시선과 냉담한 마음을 통찰하며, 사람의 영혼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무감각’이라는 영적 질병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는지를 엄중하게 묻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순히 지상에서의 물질적 부유함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거나, 혹은 가난하고 병든 형편 그 자체를 천국 구원의 자동적인 조건으로 내세우는 세속적인 사회학적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강해 설교가 강력하게 붙드는 신학적 핵심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잠시 맡겨주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섬김의 기회를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사용했는가, 그리고 내 집 문앞에 놓인 타인의 처절한 고통을 십자가적 사랑의 책임으로 성실히 받아들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원한 세계를 분명히 증언하지만, 그 영원함에 대한 소망은 결코 성도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과 이웃을 향한 의무를 헛되게 비워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엄중한 복음은 “오늘 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금 네 곁에 있는 누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것인가?”를 이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엄숙하게 묻고 있습니다.

1. 닫힌 문 앞에서 복음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묻는다 (누가복음 16:1~12, 19~23)

누가복음 16장 전체에 흐르는 두 가지 핵심 비유, 곧 앞부분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뒷부분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결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줄기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선 청지기의 비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재물과 유한한 삶의 기회를 다가올 영원을 위해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 신학적 도전이라면, 뒤이어 나오는 부자의 비유는 그 모든 자원을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적 만족과 이기적인 안일함을 위해서만 소진해 버린 인류의 종말론적 비극을 참혹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그 모든 시간과 재능, 물질은 궁극적으로 내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청지기적 자산이며, 참된 청지기의 지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자원을 장차 맞이할 영원의 때를 위해 가장 가치 있게 선용하는 데서 비로소 증명됩니다.

예수님께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행한 도덕적 부정함이나 계산적인 속임수가 선으로 미화되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던 위치와 권한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날이 온다는 임박한 사실을 정직하게 자각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데 주저 없이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지기의 기민한 모습은, 마치 자기가 가진 물질과 수명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소유를 움켜쥐고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미련함과 정반대되는 종말론적 지혜를 신선하게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시간과 누리는 재물, 그리고 수많은 섬김의 기회에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의 셈함과 결산이 기다리고 있으며, 진실한 청지기의 믿음은 바로 이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 깨어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 비유 속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참혹한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된 이유 역시 단지 그가 지상에서 남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입었던 화려한 자색 옷과 고운 베옷, 그리고 날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호사스러운 잔치의 열기가 그의 영적인 눈과 귀를 어둡게 가리어,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던 나사로의 처참한 고통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 앞의 이웃을 도울 만한 물질적 능력이나 여력이 없었던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곁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거룩한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무감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외형적 물질의 부유함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깊은 영적 문제는, 바로 그의 마음의 문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무섭게 닫혀 있었다는 신앙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무조건 음부의 불꽃 속에 떨어진다”는 식의 입체감 없는 단순한 도식으로 오해하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소유의 절대적인 크기보다, 그 소유를 대하는 영혼의 중심 태도와 나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사랑과 자비를 성실히 실천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부자가 지었던 결정적인 죄는 풍요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풍요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잔치 안에 봉인해 두고,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이웃에게 은혜의 줄기를 흘려보내지 않은 영적 이기심과 무관심에 있었습니다. 깊은 성경 묵상은 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도리어 그동안 내가 냉정하게 외면해 왔던 내 삶의 대문 앞을 겸허히 바라보게 만드는 은혜의 거울이 됩니다.

2. 하나님이 맡겨주신 신령한 부요가 은혜의 유통 채널이 될 때 (누가복음 12:48)

장재형 목사는 이 깊은 강해 설교를 통해 ‘부요함’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통장 잔고나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 짓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깊이 있는 신학적 지식, 언제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세련된 환경, 그리고 충만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의 자유를 넉넉히 누리고 있는 현대의 성도들 역시 영적으로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받은 ‘영적 부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은혜와 진리가 오직 자기 자신의 신앙적 위안과 자기가 속한 소그룹 공동체의 이기적인 만족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면, 그 풍성함は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강물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담장 밖의 주린 이웃들을 막아서는 높은 차단벽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많이 받았다는 거룩한 사실은 결코 남들 앞에 내세울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야 할 무거운 사랑과 나눔의 책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영적 자기중심성’은, 겉으로 노출되는 세속적인 탐욕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감추어져 있어서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풍성한 말씀을 듣고 감복하면서도 그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영적 안정과 내면의 평안만을 위해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그 신앙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깊고 고결해 보일지 몰랐어도 정작 주린 이웃과 열방을 향해서는 그 어떤 생명의 열매도 건네지 못하는 거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과 은혜를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그것을 나만의 영적 창고에 쌓아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더 먼 곳, 더 어두운 곳으로 진리의 빛을 흘려보내야 할 거룩한 사명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신학적 통찰 역시 누군가를 겸손히 섬기고 세워주는 진실한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로 재誕生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나눔은, 내가 쓰고 남은 잉여 자원을 시혜적으로 던져주는 세속적 동정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주리고 차가운 길거리에 방치된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외형적 자비의 행위는 물론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심각하게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진리를 깊이 배워 영적으로 바로 서며, 다시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온전히 세워주는 영적 투자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설교가 영적 기근에 허덕이는 오지의 현장에 기독교 서적과 진리의 자료들을 정성껏 모아 보내는 노고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 한 권은 소소해 보일지 몰라도, 진리의 양식이 턱없이 부족한 오지의 사역자에게는 닫혀 있던 하늘길을 활짝 열어주는 생명의 손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준엄한 신학적 질문은 오늘날 풍요를 누리는 수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앞에도 동일하게 정면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의 자료와 깊이 있는 가르침, 그리고 따뜻한 교제의 기회가 차고 넘치는 선진적 환경에서 그것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소비하는 동안, 지구 반대편이나 우리 곁의 어두운 그늘 밑에서는 단 한 권의 성경책과 단 한 번의 진실한 가르침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가난한 영혼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사랑은 단순히 일시적인 결핍을 미봉책으로 덮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 인격적으로 회복되고, 나아가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가슴에 품고 섬길 수 있는 사역자로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인내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또 다른 거룩한 섬김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깊고 긴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손 안에 오롯이 소유되는 순간보다, 나를 통과하여 낮은 곳으로 거침없이 흘러가는 그 거룩한 순간에 비로소 본래의 영롱한 빛을 세상 앞에 드러냅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는 얼마나 수많은 말씀을 머리로 듣고 기억하느냐로만 측정되지 않으며, 내가 들은 그 진리의 말씀이 과연 주린 이웃의 굶주림과 외로움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덜어주었는가 하는 영적 현장에서 비로소 매섭게 시험받습니다. 참된 사랑은 그저 내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도의 소중한 시간과 재물, 지식과 입술을 실제로 움직여 고통받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순종은 거창한 결심이나 구호에 있지 않고, 오늘 내 곁에 찾아온 이웃의 처절한 필요를 더 이상 남의 일로 방관하거나 미루지 않는 실천에서부터 힘차게 시작됩니다.

3. 세속적 표적보다 가까운 말씀, 회개는 오직 오늘 시작된다 (누가복음 16:27~31)

음부의 참혹한 불꽃 속에서 신음하던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제발 죽은 나사로를 지상에 남아 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이 끔찍한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간청을 향한 아브라함의 단호한 대답은, 그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그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무덤을 깨고 살아 돌아오는 초자연적이고 극적인 표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이미 완고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패역한 마음은 결코 자동으로 돌이켜지지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참된 회개는 눈을 사로잡는 새로운 기적이나 신비한 표적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경으로 가까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히 듣고 ‘지금 바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결단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 경악스러운 대목は,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습관적으로 늘어놓던 영적인 핑계와 게으름을 조용하지만 완벽하게 벗겨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게 더 눈에 보이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나면, 내 삶에 더 강렬한 신앙적 체험이 주어지면, 혹은 내 여건이 조금 더 특별해지면 그때 가서 온전히 순종하겠다”고 생각하며 결단을 차일피일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삶과 성경 속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으며, 우리가 그동안 모른 척 미루어 두었던 사랑의 책임과 섬김의 의무 역시 이미 우리 눈앞의 대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나를 인도할 진리의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빛나는 진리 앞에서 자기의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고 마음을 활짝 열려는 성도의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음부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절규하며 호소하는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신학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의 혀는 자신의 대문 앞에 누워 신음하던 나사로를 따뜻하게 부르거나, 그를 불쌍히 여겨 도우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자비로운 말을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피폐한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그의 혀가 지상에서 완고하게 침묵한 뒤, 그는 마침내 영원한 심판의 불길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혀를 위한 작은 자비를 구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적 눈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입술의 말이 누구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고, 누구를 실제로 살리는 자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가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실천입니다.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난 죽음 뒤에는, 천국과 음부라는 두 자리 사이에 결코 넘어가거나 돌아올 수 없는 거대한 영적 구렁(가스마)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영원한 단절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순간에 갑자기 도래한 낯선 운명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매일같이 미루어 왔던 순종의 거부와 끝내 열지 않았던 마음의 닫힌 대문이 그대로 영원 속에서 굳어져 버린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세상 물질에 대한 내 안의 질긴 집착을 믿음으로 풀어내며, 그동안 외면했던 이웃을 향해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골든타임은 오직 호흡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심판의 두려움에 앞서 우리에게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무한한 “영원한 소망”이요 참된 은혜입니다.

4. 영원을 믿는 참된 성도는 오늘 내 곁의 문을 연다 (마태복음 25:40)

비유의 결말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지상적 자리가 죽음 이후 완전히 뒤바뀌는 반전의 구조는, 지금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형편이나 물질적 조건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판단이 결코 아님을 명백히 증언합니다. 지상에서 나사로가 겪었던 처절한 고난과 질병이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 잔치에 취해 있던 부자의 화려한 쾌락 역시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마침표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과 불의를 마침내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이 찬란한 종말론적 소망은, 오늘 고통받는 자를 기쁨으로 붙들어 주며, 동시에 풍족함 속에서 자만하는 자를 겸손하게 낮추는 영적 평형수가 됩니다. 영원을 진실로 믿는 성도는 현실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도피하지 않으며, 도리어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매순간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더 무겁고 엄중한 영적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늘의 소망은 우리가 바치는 선한 수고와 눈물의 헌신이 당장 눈앞의 세속적인 보상이나 칭찬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조차도, 십자가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영혼을 단단히 지탱해 줍니다. 순전한 복음으로 한 영혼의 아픔을 돌보고, 진리의 말씀으로 그를 세우며, 나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나누는 거룩한 섬김은 세상의 타산적인 계산법 안에서는 심히 작고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는, 지상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성도의 은밀한 수고와 눈물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단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온전히 기억하신다는 찬란한 믿음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인도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보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이 땅의 고통에 무심해지거나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마음을 품고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더 오래 견디며 성실하게 지켜내는 사람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 설교에 도도히 흐르는 종말론적 긴박감은, 결코 성도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도리어 아직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내 손에 쥐어진 작은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며, 세상으로 향했던 완고한 마음을 십자가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성도의 골든타임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오직 ‘오늘’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 결산이 찾아오기 전,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유예 시간이며, 오늘도 내가 주님의 말씀에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찬란한 소망의 증거입니다. 영원을 향한 참된 믿음은 눈앞의 현실을 버리고 떠나는 도피적 시선이 아니라, 오직 현실 속에서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의 아픔을 끝까지 놓지 않고 가슴에 품는 거룩한 사랑의 시선입니다.

결어: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

영원을 사모하며 준비한다는 것은 결코 성도에게 허락된 오늘이라는 소중한 일상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내 삶의 대문 앞에 놓여 있는 거룩한 사랑의 책임을 더 늦기 전에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내게 위탁하신 재물과 진리의 말씀, 그리고 신령한 재능들을 그저 나만의 화려한 잔치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으로 움켜쥐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려내는 은혜의 통로로 겸손히 내어놓고 있습니까?”

지금 나의 삶과 마음의 대문 밖에는 과연 누구의 간절한 기다림과 눈물이 오랫동안 쌓여가고 있으며, 나는 과연 언제 그 닫힌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갈 것입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이 거룩한 계절, 내 안의 영적 무감각과 이기적인 자아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뜨리고, 내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사로를 향해 따뜻한 은혜의 손을 내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영원의 눈을 가지고 오늘 내 앞의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우리를 온전히 덮으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으로 도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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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영혼의 거울: 로마서 2장을 통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복음 성찰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인류 역사의 지혜로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과 같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현미경 같은 예리함을 발휘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어둠을 직시할 때는 시력을 잃은 듯 무력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근시는 신앙의 영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유창한 종교적 수사, 수십 년의 신앙 경력과 교회 내의 중직이라는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이미 구원의 안전지대에 안착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2장 12절에서 29절에 이르는 바울의 준엄한 선언은 이러한 안일한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그것을 모르는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라는 심판대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관통하는 핵심 관점 또한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은 피부에 새긴 표식이나 손에 든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의 만지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외형적 경건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물음은 비단 고대의 유대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은밀한 불의를 용인한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늘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화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도 똑바로 날아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증서, 매주 거르지 않는 주일 성수,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 자체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순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투영하며 ‘표면적 신앙’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유대인인 자가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없듯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자는 결코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은 소유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통회하는 회개가 없으며, 입술에는 복음의 언어가 가득하나 삶의 궤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내면의 양심, 그 피할 수 없는 법정

바울은 율법이라는 명문화된 기록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어둠이 단지 지식의 부재라는 변명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증거와 도덕적 지침을 이미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거창한 행위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은밀한 미움, 탐욕의 찌꺼기, 자기 의로 가득 찬 교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행해진 불순종의 순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고발은 시리도록 아프고 무겁지만, 결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왜 유일한 희망인지를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의 날카로운 영적 진단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줄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룩하고도 간절한 초대장입니다.


3. 성령의 칼로 새기는 ‘마음의 할례’

로마서 2장의 위대한 절정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새기는 관습적인 할례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죽어있는 문자와 율법 조문에 갇힌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면의 본질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신앙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돌처럼 단단해진 완고한 마음이 살점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가는 변화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에 목매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는 삶으로 그 목적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이며, 복음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체화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의식과 전통은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자기 의를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로 전락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고안해낸 형식을 완수함으로써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겸손한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자신의 죄를 먼저 세밀하게 살피며,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됩니다.


4. 사람의 갈채를 넘어 하나님의 인정을 향하여

바울은 장의 말미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보상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찰나의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의식하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사람들에게 신실해 보이기 위해 종교적 외양을 다듬는 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 가슴에 남기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나는 그저 종교적 무대 위의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 영적인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아는 자만이 쏟아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 복음의 찬란한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가두려는 어두운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뱉는 말,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머무는 사람에게, 비로소 참된 성경 묵상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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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벳 대학교(설립자 장재형 목사), 개교 22주년 감사예배 성료…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라”

올리벳 대학교(Olivet University, 이하 OU)는 지난 3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캠퍼스 채플에서 창립 22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거행했습니다. 이번 예배는 지난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동체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에 깊은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다가올 선교의 새로운 지평과 도약을 향한 공동체적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날 예배의 주된 메시지는 OU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선포하며 대학의 영적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번 22주년 기념 예배는 히브리서 12장 1~2절과 사도행전 20장 17~38절을 중심 본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히브리서의 권면을 예배의 핵심 주제로 선포했습니다. 대학 측은 이 말씀이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문구를 넘어, OU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전 공동체 구성원이 가슴에 새겨야 할 절대적인 이정표임을 강조했습니다.


🛡️ “오직 믿음·은혜·말씀” –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는 교육 철학

장재형 목사는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의 올리벳 대학교를 지탱해 온 불변의 영적 원리로 종교개혁의 3대 가치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을 다시금 천명했습니다. 그는 이 고백들이 대학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영적 근간이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도 대학의 정체성과 선교적 사명을 규정하는 핵심 가치가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교수진과 학생, 임직원들은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함께 기록하며, 학문적 성취보다 신앙 중심적 사명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지식 전달을 넘어 영혼을 변화시키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초심을 다지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 21년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소박한 시작에서 세계적 선교 대학으로”

이날 메시지는 올리벳 대학교가 걸어온 지난 21년간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많은 도전과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공동체를 보호하고 지탱해 오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들이 이어졌습니다. OU는 아주 작은 규모의 소박한 출발을 시작으로, 교회와 신학교, 종합대학교로 거듭났으며, 현재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교육 사역 네트워크로 확장되었습니다. 대학 공동체는 이번 22주년을 단순한 연례 행사가 아닌,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고 새로운 선교적 시즌(New Season)을 여는 강력한 출발점으로 선포했습니다.

특히 신학 교육과 영적 지도자 양성에 대한 OU의 본질적 사명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학교를 가리켜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모판”**이라고 정의하며, 세계 교회를 겸손히 섬길 목회자와 기독교 리더들을 철저히 준비시키는 사명을 환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올리벳 신학대학 및 신대원(OTCS)과 올리벳 신학교(OTS)가 그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다시금 조명되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학의 시작이자 마침표”

22주년의 주제인 “예수를 바라보자”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기원이자 완성이심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대학을 시작하신 분도 주님이시며, 이 대학을 완성하실 분도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는 학교의 모든 학문적 연구와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에서 구성원들의 시선이 오직 그리스도께 고정되어야 함을 권면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계획이나 지략이 아닌, 주님의 주권적인 인도를 따를 때 대학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 “범사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 미래를 향한 비전

올리벳 대학교는 향후 학업 프로그램의 질적 향상과 국제적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확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박힌 교육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학, 비즈니스, IT 기술, 예술 등 대학 내 모든 분과 학문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에 기여해야 한다는 전포괄적인 신앙관을 제시했습니다.


🙏 사도 바울의 눈물을 본받는 헌신과 기도의 마무리

예배의 결론은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별 설교를 성찰하는 것으로 맺어졌습니다. 겸손과 인내, 그리고 영혼을 향한 눈물과 신실한 가르침으로 요약되는 바울의 사역 태도가 OU의 모든 교육자와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함이 강조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격하며, 앞으로의 22주년을 맞이해 공동체의 뜨거운 연합과 사랑, 그리고 새로운 헌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구성원들은 “예수를 바라보자”는 주제를 삶의 모토로 삼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대학이라는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 올리벳 대학교(Olivet University) 소개

올리벳 대학교(OU)는 성경적 가치관과 정통 신학에 기초한 교육 정체성을 바탕으로, 학문과 사역 전반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비전을 추구합니다. 세계 교회의 영적 부흥을 이끌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교육 사역의 지평을 전 세계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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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당신은 무엇으로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


장재형 목사의 에베소서 6장 묵상: 관계의 회복에서 영적 승리까지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중에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라는 걸작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골짜기, 해골을 든 ‘죽음’이 모래시계를 들이밀며 시간을 재촉하고, 기괴한 형상의 ‘악마’가 뒤에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기사는 앞만 응시하며 묵묵히 말을 달립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좌우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의 몸을 감싼 견고한 갑옷과 허리에 찬 검,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합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과 보이지 않는 유혹이 뒤엉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붙들며 걸어가야 할까요? 에베소서 6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대답이자,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략서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에베소서 6장 강해를 통해, 이 장이 단순한 윤리적 지침을 넘어 성도가 땅과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매뉴얼’임을 역설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질서

거창한 영적 전쟁을 논하기 전, 바울의 시선은 가장 내밀하고 일상적인 공간인 ‘가정’과 ‘일터’로 향합니다. 전쟁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치열한 영적 현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한 바울의 선언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단순한 사회적 통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어두신 질서이며, 그 질서에 순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얻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은 기복적인 약속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바로 설 때 임하는 샬롬(Shalom)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 상전과 종이 서로를 ‘하늘에 상전이 계신 존재’로 인식하며 공갈을 그치고 성실히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곧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빛의 갑옷, 그 견고한 위로

일상의 질서를 세운 후, 바울은 시선을 영적 세계로 확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뒤러의 그림 속 기사가 갑옷을 입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듯, 우리 또한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이 여섯 가지 무구는 각각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는 하나의 방어막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전신갑주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은혜의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사탄이 정죄의 화살을 쏠 때 ‘의의 흉배’가 가슴을 지키고, 의심이 몰려올 때 ‘믿음의 방패’가 그 불화살을 소멸합니다. 세상이 요동칠 때 ‘평안의 복음’이 우리의 발을 견고히 하며, 절망 속에서도 ‘구원의 투구’가 우리의 생각을 소망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러하셨듯 사탄의 궤계를 단숨에 베어버리는 권능이 됩니다. 이처럼 전신갑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선물이며 보호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기도의 호흡, 승리를 향한 행진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움직일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신갑주를 설명한 직후 ‘기도’를 언급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기도는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호흡과도 같으며, 전장에 쏟아지는 보급로와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영적 전쟁은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아 싸우는 대리전(代理戰)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쇠사슬에 매인 바울이 구한 기도 제목입니다. 그는 자신의 석방이나 안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감옥이라는 절망적 상황조차 그에게는 복음을 위한 ‘대사’의 직임이 수행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야성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안위를 넘어,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자를 위해 서로 중보 할 때, 우리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영적 군대로서 함께 승리하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위로를 전하며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축복합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동력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뒤러의 판화 속 기사가 어둠 속에서도 앞만 보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도달해야 할 성(城)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관계의 어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점검해 봅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단단히 입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은혜는 준비된 자에게,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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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선택과 유기

로마서 9장에 들어서는 바울의 음성은 교리적 논증을 앞세운 강연자의 것이라기보다, 끊어질 듯한 아픔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자의 탄식에 가깝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8장의 영광스러운 환희가 9장의 깊은 고뇌로 이어지는 지점, 즉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밀어 올릴 때 발생하는 ‘역설의 문법’에 주목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랑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직후, 곧바로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인 연민의 자리로 데려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진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흔히 로마서를 교리(1~8장)와 윤리(12~16장)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학습 습관이 9장에 담긴 바울의 눈물을 가릴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사실 8장의 확신이야말로 9장의 애통을 낳는 모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사랑의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참된 비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언어는 십자가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동시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버림받는 고통을 수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거대한 주제는 차가운 신학적 계산이 아니라 뜨거운 중보의 심장 위에서 읽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야곱과 에서, 혹은 가인과 아벨의 서사를 통해 선택의 신비가 결코 특권이나 정당화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의 통곡을 잊지 않아야 할 책임이며, 선택받은 자의 부르심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을 때, 곁에 서 있는 형의 차가운 시선은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의 은혜가 우리를 ‘집 안에 있는 자’의 안일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으로 이끈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이 나열한 이스라엘의 여덟 가지 특권—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들, 그리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는 호흡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기독교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이라는 거대한 약속의 토양 위에서 완성된 성취임을 잊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뿌리에 대한 존경이 없는 신앙은 교만해지기 쉽지만, 우리 예배의 “아멘”과 “할렐루야” 속에 히브리적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바울이 동족을 향해 품었던 고통은 바로 이 뿌리를 향한 연민이자, 하나님이 시작하신 역사를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로마서 9장의 정점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바울의 눈물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침묵 속에 웅변하듯, 바울의 “끊어질지라도”라는 고백은 비명 없는 비명을 품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받은 자의 자리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것이 신자를 자만이 아닌 소명의 자리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의 아픔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며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자신이 미워했던 이들을 복음으로 다시 찾아가는 사랑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로마서 9장을 단순한 예정론 논쟁의 장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보의 장으로 전환시킵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확인하는 방패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사랑의 사건이며, 그 사랑은 민족과 역사, 전통과 상처의 모든 층위를 관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전하는 자는 거짓 없는 눈물로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은 우리를 더 정교한 지식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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