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 십자가 복음과 은혜로 빚어내는 참된 교회의 삶 (Olivet University)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그의 저서에서 배를 만들고자 한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게 하거나 일을 지시하기보다, 저 넓고 끝없는 바다를 향한 갈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거대한 돛을 올리고 파도를 가르는 기술의 바탕에는 결국 목적지를 향한 본질적인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건축과 교회의 본질을 세우는 일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테네로 이어지는 바울의 긴박한 발걸음을 추적하며,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 되게 하고 생명을 낳는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본질을 우리 앞에 꺼내어 놓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추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는 성도들의 내면을 찌르는 거룩한 질문입니다. 화려한 목회 기술이나 복잡한 현대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교회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출발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진하고 핍박이 동시에 솟구치던 그 뜨거운 현장 속에서, 바울의 심장은 오직 사랑으로 뛰었고 그의 발걸음은 은혜의 질서 위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갔습니다.

전략을 넘어서는 가장 깊은 동력, 사랑의 관계성

바울이 빌립보에서 모진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는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대지 않고 즉시 데살로니가를 향해 걸음을 옮긴 것은 단순한 종교적 사명감을 넘어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 설교는 그 멈추지 않는 움직임의 배후에 차가운 관례가 아닌 뜨겁고 간절한 관계의 열망이 있었음을 깊이 조명합니다. 자신을 거절하고 고발하며 공격하던 동족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당으로 찾아가 그들을 품으려는 마음은 인간의 의지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역설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첫 번째 기초는 다른 어떤 위대한 사역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관계성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원수까지 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는 깊은 도전은, 선교가 일종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효율성과 정확성, 혹은 눈에 보이는 성과라는 이름 아래 영혼을 향한 기다림과 인내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는 진리는 자칫 상대방의 영혼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결여된 신학적 정확성만을 자랑하거나, 인격적인 관계가 빠진 종교적 열심을 휘두를 때 그 모든 선교적 외침은 공허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무리한 사역은 도리어 영적인 피로감만을 남기게 될 뿐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첫 단추가 되어 올바로 채워질 때, 교회의 모든 영적 질서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부드러운 용납과 끝없는 인내, 심지어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픈 권면과 책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행위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참된 생명력을 얻습니다.

진리를 관통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단순함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담겨 청중에게 전해지는 메시지의 내용 또한 인간의 철학처럼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이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성경을 치밀하게 풀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오직 하나의 진실만을 증명했음을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흩어져 있던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조각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되는 영적 퍼즐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순하지만 우주적인 진실이 정확히 맞춰질 때, 청중의 닫힌 심령에는 성령이 부어주시는 폭발적인 깨달음과 은혜가 빛처럼 쏟아지게 됩니다. 경건한 헬라의 지성인들과 귀부인들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복음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인간의 화려한 수사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진리의 핵이 가진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질서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강단과 사역 현장에도 동일하고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지성을 만족시키는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의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기반합니다. 다채로운 문화적 콘텐츠와 수많은 행사들이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정작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뚜렷하게 서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은 부수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질수록 복음의 광채가 오히려 흐려질 수 있는 역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아무리 화려한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결국 방향을 잃고 거센 파도에 표류하는 배가 됩니다. 반대로 어떤 시대적 환난 속에서도 이 단순하고 명징한 복음의 진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면, 성도들은 세상의 척박한 광야 한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생명의 길을 내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을 뚫고 피어나는 말씀과 공동체의 호흡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탄의 교묘한 시기와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마련입니다. 시장의 불량배들이 선동되어 야손의 집을 거칠게 습격하고, 세상을 뒤집어놓는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두려움 섞인 고발이 울려 퍼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 역사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영적 무기인 시기심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는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내는 전진의 관문이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증명합니다. 환난은 결코 성도들을 위축시키거나 나약하게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의 반경을 베뢰아를 넘어 세상 끝을 향해 확장시키는 강력한 영적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외부의 오해와 내부의 핍박 앞에서 우리는 낙심하여 방어와 도피를 택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정화와 담대한 전진을 기꺼이 선택해야만 합니다.

가혹한 핍박을 넘어선 베뢰아 사람들은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진리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가 비추는 자리는 이러한 베뢰아 성도들의 영적 태도를 말씀과 성령과 공동체라는 세 가지의 강력하고 유기적인 고리로 풀어냅니다. 개인의 골방에서 묵상한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삶의 지표가 되고, 그것이 소그룹이라는 공동체의 용광로 속에서 나누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의 삶이 시작됩니다. 거창한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네이버 카페에 남겨지는 신앙에세이 같은 짧고 진실한 묵상 한 줄이나 성경공부 모임이 지닌 위대한 힘도 결국 이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말씀 앞에 철저히 겸손해질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성도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어떠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영적 면역력으로 자라납니다.

주일의 고백이 월요일의 성실로 이어지는 신앙

복음의 역동성은 결코 한 번의 뜨거운 눈물이나 일회적인 종교 집회의 감격으로 증발하지 않는 영원한 특성을 지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는 다가올 재림에 대한 막연한 소망만을 핑계로 삼아 현재의 일상적인 삶과 책임을 소홀히 하려는 태도를 향한 단호하고 준엄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밤낮으로 땀 흘려 수고하며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지치지 않고 텐트를 만들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숭고한 삶은, 참된 믿음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도피나 금욕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치열하게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책임윤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일 예배당의 무거운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에서 다시 치열하고 아름답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서의 거룩한 신앙 고백이 월요일 아침 일터에서의 땀방울과 정직, 그리고 성실함으로 번져가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믿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삼십 주년을 맞이하며 전 세계 백육십일 개국으로 놀랍게 넓어진 공동체의 사역 지형도 역시 뛰어난 개인기나 우연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낯선 땅으로 짐을 싸서 떠나고, 누군가는 그가 온전히 사역할 수 있도록 물질과 기도로 파송하며, 또 누군가는 현지의 문화를 배우고 언어의 다리를 놓는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교가 차가운 조직의 성과가 아니라, 누군가는 앞장서서 가고 누군가는 뒤에서 보내주며 서로를 생명처럼 굳게 받쳐주는 유기체적 생명 작용임을 깊이 웅변합니다. 결국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은 세련되고 논리적인 기법이 아니라, 입술의 말과 삶의 궤적이 일치하는 정직한 일상의 성실함에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위대한 역사는 화려한 건물이나 통계표의 숫자가 아니라, 늘 흔들리고 아파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야손의 불안한 눈빛과 새 신자의 떨리는 심장, 핍박 속에서도 서로를 염려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체온은 오늘 우리의 곁에 있는 이웃들의 얼굴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의 굉음과 알고리즘의 차가운 속도, 분열의 프레임이 난무하는 삭막한 현대 도시 한복판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쉬지 않고 상한 영혼들을 다정하게 부르며 거룩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갑니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박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할 때, 삼십 년의 묵직한 은혜는 다음 세대의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찬란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깊고 고요한 십자가의 진리가 나의 굳은 내면을 관통할 때, 당신의 오늘 하루는 과연 누구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으로 뻗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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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영혼의 거울: 로마서 2장을 통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복음 성찰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인류 역사의 지혜로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과 같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현미경 같은 예리함을 발휘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어둠을 직시할 때는 시력을 잃은 듯 무력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근시는 신앙의 영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유창한 종교적 수사, 수십 년의 신앙 경력과 교회 내의 중직이라는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이미 구원의 안전지대에 안착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2장 12절에서 29절에 이르는 바울의 준엄한 선언은 이러한 안일한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그것을 모르는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라는 심판대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관통하는 핵심 관점 또한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은 피부에 새긴 표식이나 손에 든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의 만지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외형적 경건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물음은 비단 고대의 유대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은밀한 불의를 용인한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늘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화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도 똑바로 날아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증서, 매주 거르지 않는 주일 성수,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 자체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순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투영하며 ‘표면적 신앙’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유대인인 자가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없듯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자는 결코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은 소유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통회하는 회개가 없으며, 입술에는 복음의 언어가 가득하나 삶의 궤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내면의 양심, 그 피할 수 없는 법정

바울은 율법이라는 명문화된 기록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어둠이 단지 지식의 부재라는 변명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증거와 도덕적 지침을 이미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거창한 행위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은밀한 미움, 탐욕의 찌꺼기, 자기 의로 가득 찬 교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행해진 불순종의 순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고발은 시리도록 아프고 무겁지만, 결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왜 유일한 희망인지를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의 날카로운 영적 진단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줄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룩하고도 간절한 초대장입니다.


3. 성령의 칼로 새기는 ‘마음의 할례’

로마서 2장의 위대한 절정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새기는 관습적인 할례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죽어있는 문자와 율법 조문에 갇힌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면의 본질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신앙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돌처럼 단단해진 완고한 마음이 살점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가는 변화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에 목매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는 삶으로 그 목적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이며, 복음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체화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의식과 전통은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자기 의를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로 전락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고안해낸 형식을 완수함으로써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겸손한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자신의 죄를 먼저 세밀하게 살피며,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됩니다.


4. 사람의 갈채를 넘어 하나님의 인정을 향하여

바울은 장의 말미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보상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찰나의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의식하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사람들에게 신실해 보이기 위해 종교적 외양을 다듬는 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 가슴에 남기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나는 그저 종교적 무대 위의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 영적인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아는 자만이 쏟아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 복음의 찬란한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가두려는 어두운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뱉는 말,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머무는 사람에게, 비로소 참된 성경 묵상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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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반석 위에 종말의 일상을 세우다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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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머무는 자리, 우리는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1599년,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는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이라는 압도적인 명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어두침침한 세관입니다. 탁자 위에서 은화를 세는 데 여념이 없는 마태오의 세속적인 일상 위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리스도의 손끝을 따라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집니다. 그 빛은 어둠을 찢고 들어와 묻습니다. “언제까지 그 낡은 동전을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마태오는 세속의 장부를 덮고 영원을 향해 일어섭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Chiaroscuro)를 통해 인간 내면의 회심을 그려낸 이 명작은, 오늘날 우리의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손에 쥐고 서성이고 있습니까?

흩어진 영혼의 관절을 맞추는 진리의 빛

이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파편화된 지식과 세속의 논리 속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라는 정밀한 텍스트를 통해 이처럼 어긋난 현대인들의 신앙 관절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영적 정형외과 의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정통’, 즉 올바름과 정확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공부와 취업,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청년 세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일시적인 진통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잇닿아 있는 정밀한 영적 설계도야말로 존재의 방향을 바로잡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반복해서 읽고 새기는 과정은, 비틀린 뼈대를 맞추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숭고한 영적 재활의 시간이 됩니다.

거짓된 철학과 규율이 빚어낸 거울 방을 지나

골로새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는 오늘날에도 낡은 옷만 갈아입은 채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얄팍한 지적 우월감으로 포장된 세상의 철학이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을 경직된 도덕 규율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가 우리를 억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위태로운 좌우의 압력 속에서, 어느 한쪽에도 갇히지 않는 사도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을 조명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종교적 허례허식이나 인간의 교만을 부추기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결코 영혼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외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가로채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임 바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복음이 지닌 폭발적인 생명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움켜쥔 손을 펼칠 때 비로소 안게 되는 영원

마태오가 세관의 동전을 기꺼이 내려놓았듯, 참된 제자도의 첫걸음은 소유를 향한 악력을 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원숭이가 좁은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쥐고 놓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얄팍한 성취와 소유를 움켜쥐느라 진짜 자유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부자 청년이 율법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던 이유는, 존재가 소유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지닌 강렬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의 진리를 피워낸다는 것입니다. 억지의 윤리가 아니라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자의 환희가 결단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앞세우는 대신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자처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거듭납니다. 깊은 성경 묵상을 통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의 영적 문법이 전환될 때, 굳게 닫혔던 손은 자연스레 펼쳐지고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땅을 딛고 하늘을 호흡하는 자의 부요함

결국 우리의 시선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향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성경의 권면은 결코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라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권세를 이긴 생명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일상을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끈질기게 파고드는 부활신앙은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얄팍한 이분법을 뛰어넘어 우리를 무한한 은혜의 바다로 인도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어찌 땅의 썩어질 것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내면의 질서가 하늘의 정조로 재편될 때, 우리의 학업과 노동,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삶은 더 이상 비교와 열등감의 무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의 소명을 다하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해 몸을 돌리던 마태오의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장재형목사 신학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 위에 세워진 새로운 자아’는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낡은 지식의 자만과 자기혐오의 늪을 모두 끊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당신의 펼친 손위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부요함이 소리 없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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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계산기를 부순 어느 여인의 거룩한 낭비, 그리고 십자가-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어스름이 짙게 깔린 예루살렘의 한 화려한 연회장. 사람들의 나지막한 담소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를 날카롭게 가르며,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습니다.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전 재산이자 가장 귀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진동하는 향기 속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화의 낭비를 지적했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광신이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파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단순한 값비싼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골고타 언덕에서 처참하게 부서질 예수의 몸통에 대한 예표였으며, 그보다 앞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한 영혼의 순전하고도 맹렬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리며, 진짜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파편, 효율의 시대를 역행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조차 손익계산서의 항목처럼 취급받는 오늘날,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거액을 일순간에 바닥에 쏟아버린 여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이 강렬한 복음서의 장면을 두고 장재형 목사는 세상의 눈에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이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는 역설적인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의 깊이 있는 설교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효율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민 구제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이 당신의 장례를 온전히 준비했다며 극찬하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허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십자가 은혜의 법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부를 내어준 자만이 아는 사랑의 무게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과 헌신의 메시지는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저작들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C.S. Lewis)의 고전 명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는 이 ‘거룩한 낭비’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시간이나 잉여의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전체’라고 역설합니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의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원한다”는 그의 선언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향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 즉 인생 전부를 부어드렸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진짜 사랑은 쪼개어 계산할 수 없으며 미래의 안정을 기약하며 유보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여인은 ‘지금 당장’ 전부를 내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영혼의 직감으로 알았고, 그 즉각적인 순종이 그녀를 영원한 복음의 역사 속에 살게 했습니다.

화폭에 담긴 눈물, 영원한 복음의 흔적이 되다

이 숨 막히는 헌신의 순간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며, 시대를 초월한 성경 묵상의 장이 되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파올로 베로네세가 남긴 대작 ‘시몬의 집에서의 잔치’를 보면,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호화로운 연회석 한가운데서 오직 한 여인만이 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주변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각자의 세속적 관심사에 빠져 있는 동안, 오직 그녀만이 하늘의 왕에게 온전한 경배를 올립니다. 훗날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역시 이 장면을 극적인 명암 대비로 화폭에 담아내며, 차가운 세상의 시선과 여인의 뜨거운 회개를 강렬하게 대조시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비효율적이었을 이 예술적 ‘낭비’의 산물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미술사적 증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쏟아부은 눈물과 헌신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원한 복음의 향기가 됨을 역설합니다.

오늘, 나의 깨어지지 않은 옥합을 마주하며

그렇다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옥합은 과연 무엇일까요? 장재형 목사는 그 옥합의 범위가 단순히 금전적 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움켜쥔 나의 진로, 황금 같은 시간,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 그 모든 것이 주님 발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각자의 옥합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죄인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만큼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의 죽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계산을 뛰어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권면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적당한 타협을 멈추고 오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효율이라는 이름의 계산기를 부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낭비를 선택할 때, 우리의 투박한 삶은 비로소 거룩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걸작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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