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반석 위에 종말의 일상을 세우다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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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역사서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그 구원이 공동체의 형태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서사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 한 분의 생애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그 생애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교회라는 몸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종교 기록을 훑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이 어떤 뿌리에서 출발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며, 동시에 오늘의 교회가 어떤 리듬으로 호흡해야 하는지를 묻는 신학적 성찰의 자리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지점 역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야 할 길이며, 성령의 인도는 장식적인 언어가 아니라 삶의 결정을 좌우하는 실제적 사건이고, 선교는 교회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이라는 고백이다.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으로”라는 운동성이다. 예수의 승천 이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있던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아가 증언하기 시작한다. 언어가 갈라지고 사람들이 모이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곧 박해를 맞닥뜨리고 흩어짐을 경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흩어짐은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 된다. 이 역설이 사도행전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는 흔히 문이 닫히면 실패로 규정하지만, 사도행전의 하나님은 닫힌 문을 통해 더 넓은 지도를 펼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을 붙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교의 방향이 인간의 열정이나 계산으로만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표 안에서 재배치된다는 사실이 그 장면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계획, 좌절, 그리고 새로운 부르심이 교차하는 여정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향하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길을 막으셨다. 이 서술에는 분명한 단호함이 담겨 있다. 성령은 때로는 문을 여시는 분으로,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분으로 역사하신다. 신앙은 흔히 열린 길을 찾아가는 능력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막힌 길을 받아들이는 겸손 속에서 더 깊은 순종이 형성된다. 더 이상 동쪽으로도 북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던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본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이렇게 외친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부르심은 단순한 이동 요청이 아니라, 복음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신학적 전환점이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이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사역 성취를 자극하는 구호가 아니라 타자의 절박함이 담긴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전략을 입증하기 위해 건너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신 탄식에 응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그 건넘은 유럽 선교의 첫 문을 여는 사건이 되었다. 드로아에서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이른 바울 일행은, 로마의 법과 질서가 깊이 뿌리내린 식민도시 한복판에 복음을 들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한 여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고, 작은 강가의 기도 모임을 교회의 씨앗으로 삼으신다. 매질과 감금, 오해와 혼란 속에서도 찬송은 멈추지 않고, 간수의 집이 예배의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선교가 제도나 규모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과 한 가정의 문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작은 순종이 역사의 문법을 바꾼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빌립보에서 시작된 이 작은 공동체가 훗날 바울의 서신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의미심장하다. 옥중에서 기록된 빌립보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노래하는 신앙의 문법을 담고 있다. 이는 선교가 언제나 순탄한 성공담으로 기록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이 반복해서 증언하듯, 복음은 갈등과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흔들리면 고소가 뒤따르고, 권력이 불편해지면 감옥이 열리며, 종교적 자존심이 상처 입으면 돌이 날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 추진력이 인간의 열정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약속은, 선교의 동력이 교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선교를 경쟁적 열심이 아니라, 은혜에 동참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포스트모던 문화의 도전은 단순한 진리 상대화를 넘어, 인간 정체성 자체를 유동화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억압적 구조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기반을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방향 감각은 희미해졌다. 이런 시대에 “길”이라는 성경의 언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길은 정보가 아니라 실제로 걸어야만 드러나는 현실이며, 동행이 없으면 쉽게 지치는 여정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길 위의 동행자로 부르셨고, 사도행전에서 그 길은 사람들이 “이단이라 부를 만큼”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장재형목사가 “오직 예수”를 반복해서 외치는 이유도, 신앙을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시대정신에 맞서 제자도의 실재를 회복하자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회복은 교리적 엄격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리가 생명의 뼈대라면, 생명의 온기는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예수가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사랑의 식음은 단순한 윤리적 타락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영적 무감각을 포함한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외적 과제가 아니라, 영적 감각을 회복하는 훈련이 된다. 교회가 낯선 이웃을 섬기기 시작할 때, 성경의 문장은 다시 피부에 닿고, 기도는 다시 절박해지며, 예배는 현실과 연결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민자 사역, 다민족 사역, 대학과 온라인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복음이 특정 문화의 언어에 갇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은 언제나 번역되어야 하지만, 그 번역 과정에서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성령의 분별이 요구된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주제는 ‘막힘의 신학’이다. 많은 성도들은 길이 막히면 자신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은 막힘이 버려짐이 아니라, 더 큰 사명을 향한 전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이 바울의 길을 막으신 것은 그의 열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넓은 지도를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의 진로와 사역 분별에도 깊은 통찰을 준다.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실패의 언어 대신 성령의 조율을 배워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멈춤의 은혜”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멈춤은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열릴 길을 더 정확히 걷기 위한 호흡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의 이미지는 이 흐름을 잘 설명한다. 겉보기에 황폐해 보이는 자리에도 거룩한 씨는 남아 있다. 교회의 역사는 늘 그루터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중심이 쇠퇴할 때 주변이 불타오르고, 그 불씨가 다시 중심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회복의 선교가 성경적 패턴 위에 서 있다는 증거다. 선교는 불씨의 이동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방식이다.

이 확장은 어느 문화가 다른 문화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선교는 번역과 상호성, 그리고 자기 비움을 동반한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진리를 양보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더 잘 들리도록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다는 의미다. 장재형목사가 세계 선교를 이야기할 때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교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변화되는 은혜의 여정이다.

결국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울린다. 그것은 지리적 이동일 수도 있고, 문화와 세대의 경계를 넘는 결단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는 공격적 논쟁이 아니라, 더 깊은 증언으로 응답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지만, 그 진리는 사랑의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Only Jesus”를 강조하는 이유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좌표를 세우기 위함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 직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분별 속에서 구체화된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고백은, 공동체가 말씀과 경험을 통해 성령의 뜻을 식별하려 했던 치열한 흔적이다. 오늘의 교회 역시 더 깊은 성경 읽기와 더 투명한 공동체적 점검을 요구받는다.

마침내 사도행전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바울은 로마에서 갇힌 몸으로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길이 막힌 듯 보이는 자리에서도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 역시 이 열린 결말 속에 서 있다. 성령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교회를 움직이시며, 새로운 마게도냐의 부르심을 들려주신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설교의 중심은 결국 하나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복음 전파, 오직 예수로의 귀환, 그리고 지체하지 않는 순종.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일 때, 교회는 다시 길이 되고, 세상은 다시 도움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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