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1599년,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는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이라는 압도적인 명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어두침침한 세관입니다. 탁자 위에서 은화를 세는 데 여념이 없는 마태오의 세속적인 일상 위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리스도의 손끝을 따라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집니다. 그 빛은 어둠을 찢고 들어와 묻습니다. “언제까지 그 낡은 동전을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마태오는 세속의 장부를 덮고 영원을 향해 일어섭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Chiaroscuro)를 통해 인간 내면의 회심을 그려낸 이 명작은, 오늘날 우리의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손에 쥐고 서성이고 있습니까?
흩어진 영혼의 관절을 맞추는 진리의 빛
이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파편화된 지식과 세속의 논리 속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라는 정밀한 텍스트를 통해 이처럼 어긋난 현대인들의 신앙 관절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영적 정형외과 의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정통’, 즉 올바름과 정확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공부와 취업,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청년 세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일시적인 진통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잇닿아 있는 정밀한 영적 설계도야말로 존재의 방향을 바로잡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반복해서 읽고 새기는 과정은, 비틀린 뼈대를 맞추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숭고한 영적 재활의 시간이 됩니다.
거짓된 철학과 규율이 빚어낸 거울 방을 지나
골로새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는 오늘날에도 낡은 옷만 갈아입은 채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얄팍한 지적 우월감으로 포장된 세상의 철학이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을 경직된 도덕 규율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가 우리를 억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위태로운 좌우의 압력 속에서, 어느 한쪽에도 갇히지 않는 사도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을 조명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종교적 허례허식이나 인간의 교만을 부추기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결코 영혼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외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가로채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임 바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복음이 지닌 폭발적인 생명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움켜쥔 손을 펼칠 때 비로소 안게 되는 영원
마태오가 세관의 동전을 기꺼이 내려놓았듯, 참된 제자도의 첫걸음은 소유를 향한 악력을 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원숭이가 좁은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쥐고 놓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얄팍한 성취와 소유를 움켜쥐느라 진짜 자유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부자 청년이 율법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던 이유는, 존재가 소유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지닌 강렬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의 진리를 피워낸다는 것입니다. 억지의 윤리가 아니라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자의 환희가 결단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앞세우는 대신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자처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거듭납니다. 깊은 성경 묵상을 통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의 영적 문법이 전환될 때, 굳게 닫혔던 손은 자연스레 펼쳐지고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땅을 딛고 하늘을 호흡하는 자의 부요함
결국 우리의 시선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향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성경의 권면은 결코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라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권세를 이긴 생명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일상을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끈질기게 파고드는 부활신앙은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얄팍한 이분법을 뛰어넘어 우리를 무한한 은혜의 바다로 인도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어찌 땅의 썩어질 것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내면의 질서가 하늘의 정조로 재편될 때, 우리의 학업과 노동,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삶은 더 이상 비교와 열등감의 무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의 소명을 다하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해 몸을 돌리던 마태오의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장재형목사 신학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 위에 세워진 새로운 자아’는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낡은 지식의 자만과 자기혐오의 늪을 모두 끊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당신의 펼친 손위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부요함이 소리 없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중에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라는 걸작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골짜기, 해골을 든 ‘죽음’이 모래시계를 들이밀며 시간을 재촉하고, 기괴한 형상의 ‘악마’가 뒤에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기사는 앞만 응시하며 묵묵히 말을 달립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좌우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의 몸을 감싼 견고한 갑옷과 허리에 찬 검,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합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과 보이지 않는 유혹이 뒤엉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붙들며 걸어가야 할까요? 에베소서 6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대답이자,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략서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에베소서 6장 강해를 통해, 이 장이 단순한 윤리적 지침을 넘어 성도가 땅과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매뉴얼’임을 역설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질서
거창한 영적 전쟁을 논하기 전, 바울의 시선은 가장 내밀하고 일상적인 공간인 ‘가정’과 ‘일터’로 향합니다. 전쟁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치열한 영적 현장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한 바울의 선언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단순한 사회적 통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어두신 질서이며, 그 질서에 순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얻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은 기복적인 약속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바로 설 때 임하는 샬롬(Shalom)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 상전과 종이 서로를 ‘하늘에 상전이 계신 존재’로 인식하며 공갈을 그치고 성실히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곧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빛의 갑옷, 그 견고한 위로
일상의 질서를 세운 후, 바울은 시선을 영적 세계로 확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뒤러의 그림 속 기사가 갑옷을 입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듯, 우리 또한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이 여섯 가지 무구는 각각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는 하나의 방어막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전신갑주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은혜의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사탄이 정죄의 화살을 쏠 때 ‘의의 흉배’가 가슴을 지키고, 의심이 몰려올 때 ‘믿음의 방패’가 그 불화살을 소멸합니다. 세상이 요동칠 때 ‘평안의 복음’이 우리의 발을 견고히 하며, 절망 속에서도 ‘구원의 투구’가 우리의 생각을 소망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러하셨듯 사탄의 궤계를 단숨에 베어버리는 권능이 됩니다. 이처럼 전신갑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선물이며 보호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기도의 호흡, 승리를 향한 행진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움직일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신갑주를 설명한 직후 ‘기도’를 언급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기도는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호흡과도 같으며, 전장에 쏟아지는 보급로와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영적 전쟁은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아 싸우는 대리전(代理戰)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쇠사슬에 매인 바울이 구한 기도 제목입니다. 그는 자신의 석방이나 안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감옥이라는 절망적 상황조차 그에게는 복음을 위한 ‘대사’의 직임이 수행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야성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안위를 넘어,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자를 위해 서로 중보 할 때, 우리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영적 군대로서 함께 승리하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위로를 전하며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축복합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동력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뒤러의 판화 속 기사가 어둠 속에서도 앞만 보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도달해야 할 성(城)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관계의 어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점검해 봅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단단히 입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은혜는 준비된 자에게,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합니다.
로마서 9장에 들어서는 바울의 음성은 교리적 논증을 앞세운 강연자의 것이라기보다, 끊어질 듯한 아픔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자의 탄식에 가깝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8장의 영광스러운 환희가 9장의 깊은 고뇌로 이어지는 지점, 즉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밀어 올릴 때 발생하는 ‘역설의 문법’에 주목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랑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직후, 곧바로 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인 연민의 자리로 데려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진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흔히 로마서를 교리(1~8장)와 윤리(12~16장)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학습 습관이 9장에 담긴 바울의 눈물을 가릴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사실 8장의 확신이야말로 9장의 애통을 낳는 모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사랑의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참된 비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언어는 십자가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동시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버림받는 고통을 수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과 유기라는 거대한 주제는 차가운 신학적 계산이 아니라 뜨거운 중보의 심장 위에서 읽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야곱과 에서, 혹은 가인과 아벨의 서사를 통해 선택의 신비가 결코 특권이나 정당화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의 통곡을 잊지 않아야 할 책임이며, 선택받은 자의 부르심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을 때, 곁에 서 있는 형의 차가운 시선은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의 은혜가 우리를 ‘집 안에 있는 자’의 안일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으로 이끈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이 나열한 이스라엘의 여덟 가지 특권—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들, 그리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는 호흡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기독교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이라는 거대한 약속의 토양 위에서 완성된 성취임을 잊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뿌리에 대한 존경이 없는 신앙은 교만해지기 쉽지만, 우리 예배의 “아멘”과 “할렐루야” 속에 히브리적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바울이 동족을 향해 품었던 고통은 바로 이 뿌리를 향한 연민이자, 하나님이 시작하신 역사를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로마서 9장의 정점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바울의 눈물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침묵 속에 웅변하듯, 바울의 “끊어질지라도”라는 고백은 비명 없는 비명을 품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택받은 자의 자리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것이 신자를 자만이 아닌 소명의 자리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의 아픔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며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자신이 미워했던 이들을 복음으로 다시 찾아가는 사랑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로마서 9장을 단순한 예정론 논쟁의 장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보의 장으로 전환시킵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확인하는 방패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사랑의 사건이며, 그 사랑은 민족과 역사, 전통과 상처의 모든 층위를 관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전하는 자는 거짓 없는 눈물로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은 우리를 더 정교한 지식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심장 박동을 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역사서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그 구원이 공동체의 형태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서사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 한 분의 생애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그 생애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교회라는 몸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종교 기록을 훑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이 어떤 뿌리에서 출발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며, 동시에 오늘의 교회가 어떤 리듬으로 호흡해야 하는지를 묻는 신학적 성찰의 자리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지점 역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야 할 길이며, 성령의 인도는 장식적인 언어가 아니라 삶의 결정을 좌우하는 실제적 사건이고, 선교는 교회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이라는 고백이다.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으로”라는 운동성이다. 예수의 승천 이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있던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아가 증언하기 시작한다. 언어가 갈라지고 사람들이 모이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곧 박해를 맞닥뜨리고 흩어짐을 경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흩어짐은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 된다. 이 역설이 사도행전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는 흔히 문이 닫히면 실패로 규정하지만, 사도행전의 하나님은 닫힌 문을 통해 더 넓은 지도를 펼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을 붙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교의 방향이 인간의 열정이나 계산으로만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표 안에서 재배치된다는 사실이 그 장면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계획, 좌절, 그리고 새로운 부르심이 교차하는 여정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향하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길을 막으셨다. 이 서술에는 분명한 단호함이 담겨 있다. 성령은 때로는 문을 여시는 분으로,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분으로 역사하신다. 신앙은 흔히 열린 길을 찾아가는 능력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막힌 길을 받아들이는 겸손 속에서 더 깊은 순종이 형성된다. 더 이상 동쪽으로도 북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던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본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이렇게 외친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부르심은 단순한 이동 요청이 아니라, 복음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신학적 전환점이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이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사역 성취를 자극하는 구호가 아니라 타자의 절박함이 담긴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전략을 입증하기 위해 건너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신 탄식에 응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그 건넘은 유럽 선교의 첫 문을 여는 사건이 되었다. 드로아에서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이른 바울 일행은, 로마의 법과 질서가 깊이 뿌리내린 식민도시 한복판에 복음을 들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한 여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고, 작은 강가의 기도 모임을 교회의 씨앗으로 삼으신다. 매질과 감금, 오해와 혼란 속에서도 찬송은 멈추지 않고, 간수의 집이 예배의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선교가 제도나 규모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과 한 가정의 문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작은 순종이 역사의 문법을 바꾼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빌립보에서 시작된 이 작은 공동체가 훗날 바울의 서신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의미심장하다. 옥중에서 기록된 빌립보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노래하는 신앙의 문법을 담고 있다. 이는 선교가 언제나 순탄한 성공담으로 기록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이 반복해서 증언하듯, 복음은 갈등과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흔들리면 고소가 뒤따르고, 권력이 불편해지면 감옥이 열리며, 종교적 자존심이 상처 입으면 돌이 날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 추진력이 인간의 열정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약속은, 선교의 동력이 교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선교를 경쟁적 열심이 아니라, 은혜에 동참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포스트모던 문화의 도전은 단순한 진리 상대화를 넘어, 인간 정체성 자체를 유동화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억압적 구조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기반을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방향 감각은 희미해졌다. 이런 시대에 “길”이라는 성경의 언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길은 정보가 아니라 실제로 걸어야만 드러나는 현실이며, 동행이 없으면 쉽게 지치는 여정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길 위의 동행자로 부르셨고, 사도행전에서 그 길은 사람들이 “이단이라 부를 만큼”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장재형목사가 “오직 예수”를 반복해서 외치는 이유도, 신앙을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시대정신에 맞서 제자도의 실재를 회복하자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회복은 교리적 엄격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리가 생명의 뼈대라면, 생명의 온기는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예수가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사랑의 식음은 단순한 윤리적 타락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영적 무감각을 포함한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외적 과제가 아니라, 영적 감각을 회복하는 훈련이 된다. 교회가 낯선 이웃을 섬기기 시작할 때, 성경의 문장은 다시 피부에 닿고, 기도는 다시 절박해지며, 예배는 현실과 연결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민자 사역, 다민족 사역, 대학과 온라인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복음이 특정 문화의 언어에 갇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은 언제나 번역되어야 하지만, 그 번역 과정에서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성령의 분별이 요구된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주제는 ‘막힘의 신학’이다. 많은 성도들은 길이 막히면 자신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은 막힘이 버려짐이 아니라, 더 큰 사명을 향한 전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이 바울의 길을 막으신 것은 그의 열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넓은 지도를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의 진로와 사역 분별에도 깊은 통찰을 준다.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실패의 언어 대신 성령의 조율을 배워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멈춤의 은혜”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멈춤은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열릴 길을 더 정확히 걷기 위한 호흡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의 이미지는 이 흐름을 잘 설명한다. 겉보기에 황폐해 보이는 자리에도 거룩한 씨는 남아 있다. 교회의 역사는 늘 그루터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중심이 쇠퇴할 때 주변이 불타오르고, 그 불씨가 다시 중심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회복의 선교가 성경적 패턴 위에 서 있다는 증거다. 선교는 불씨의 이동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방식이다.
이 확장은 어느 문화가 다른 문화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선교는 번역과 상호성, 그리고 자기 비움을 동반한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진리를 양보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더 잘 들리도록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다는 의미다. 장재형목사가 세계 선교를 이야기할 때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교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변화되는 은혜의 여정이다.
결국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울린다. 그것은 지리적 이동일 수도 있고, 문화와 세대의 경계를 넘는 결단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는 공격적 논쟁이 아니라, 더 깊은 증언으로 응답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지만, 그 진리는 사랑의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Only Jesus”를 강조하는 이유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좌표를 세우기 위함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 직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분별 속에서 구체화된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고백은, 공동체가 말씀과 경험을 통해 성령의 뜻을 식별하려 했던 치열한 흔적이다. 오늘의 교회 역시 더 깊은 성경 읽기와 더 투명한 공동체적 점검을 요구받는다.
마침내 사도행전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바울은 로마에서 갇힌 몸으로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길이 막힌 듯 보이는 자리에서도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 역시 이 열린 결말 속에 서 있다. 성령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교회를 움직이시며, 새로운 마게도냐의 부르심을 들려주신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설교의 중심은 결국 하나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복음 전파, 오직 예수로의 귀환, 그리고 지체하지 않는 순종.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일 때, 교회는 다시 길이 되고, 세상은 다시 도움을 얻게 된다.
고린도전서 7장은 얼핏 보면 결혼과 독신, 부부 간의 성적 윤리라는 실천적 주제를 다루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시선으로 따라가면 그 밑바닥에는 세상의 위계를 거꾸로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또렷하게 흐른다. 그는 7장 21–24절이 왜 신학사에서 난해한 본문으로 남아 있는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 단락이 즉흥적 삽입이 아니라 본문의 중심맥을 드러내는 의도적 전개임을 차분히 밝혀 간다. “결혼을 말하다가 왜 종과 자유를 꺼내는가?”라는 물음은 바울의 글쓰기 전체를 보아야 풀린다. 장재형목사는 6장에서 음행을 다루다가 갑자기 세상 법정의 송사를 책망하는 전환을 떠올리게 한다. 문맥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음란과 가정 파괴의 문제가 신자들의 송사로 번졌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수치를 불신자들 앞에 내보이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더 깊은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사회법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을 지키는 공동체 치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동시에 장재형목사는 균형을 분명히 한다. 교회 밖에서 부당한 피해를 당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시민으로서 정당한 보호를 구해야 한다. 바울의 경계는 어디까지나 “교회 내부의 부끄러운 일”을 세상 법정으로 퍼뜨리는 무책임을 겨냥한 것이지, 법 질서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 관점을 7장으로 가져오면, 결혼 담론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듯한 종과 자유의 언급이 놀랍도록 설득력을 얻는다. 로마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였고, 여성은 법적·사회적 권리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기 쉬웠다. 남편은 아내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강한 권한을 행사했고, 아내가 남편의 의사에 반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버림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7장 21절의 “종”이 단지 경제·법적 신분으로서의 노예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사실상 종처럼 취급된 아내들까지 아우르는 다층적 지시어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뿐 아니라 불의한 질서 속에서 존엄을 잃은 여성 신자들에게 건네는 근원적 위로다. 이어지는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구절은 더욱 급진적이다. 억압적 관계에서 벗어날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면, 신앙은 체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의 선택을 독려한다. 구원의 영성은 현실을 떠난 관념이 아니라, 몸과 관계와 제도 속에서 존엄을 회복시키는 능동적 힘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빛난다.
7장 22절은 이 위로를 신학적으로 마무리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사회가 매긴 위계는 복음 안에서 전복된다. 종이라 불리던 자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정체성이 선포되고, 사회적 자유인·가정의 가장으로 군림하던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새로운 훈련이 시작된다. 힘 있는 자의 자유는 더 이상 사적 이익을 지키는 면허가 아니라 섬김의 소명으로 바뀐다. 그래서 7장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선언이 절정을 이룬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20장 28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피 값으로 산 존재는 어떤 인간 권력의 소유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사병도, 누구의 전리품도 아니다. 이 품격의 신학은 7장 24절의 권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서 구체가 된다. 신분, 가족 역할, 직업과 형편이 우리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부르심이 우리의 정체성과 실천을 이끈다는 뜻이다.
이 전복의 원리는 바울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라 예수께서 삶과 가르침으로 열어 보이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영광을 청탁하자, 주님은 세상의 권력 구조와 제자의 길을 대비시키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주관하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바울의 가정 윤리에 연결한다. 가정의 주도권을 권력으로 행사하던 남편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랑과 희생의 섬김을 명하고, 종처럼 취급받던 아내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존엄을 회복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낮아짐과 순종, 섬김과 자기 비움으로 드러난다. 그 공기가 교회와 가정에 흐르기 시작할 때, 세상의 위계는 사랑의 질서로 바뀐다.
마태복음 19장에 드러나는 이혼 논쟁은 당시 여성의 취약한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 자체가 남성의 자의적 이혼 관행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준다. 신명기 24장의 이혼증서는 그나마 피해 여인에게 사회적 재진입의 최소한을 보장하려는 방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허용의 배경을 “마음의 완악함”으로 진단하시고 창조 원리를 회복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규정하심으로써, 주님은 남성 중심의 이혼 관행에 제동을 걸고 혼인 언약의 거룩을 재건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울타리가 억압의 족쇄가 아니라 약자를 위한 정의의 방패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가 이 사랑의 법을 붙잡을 때, 약한 지체의 눈물을 비용으로 삼는 손쉬운 해체의 문화를 거부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이 미혼자와 과부에게 말하는 대목으로 시선을 옮기면,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권면이 등장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열쇠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시간의식, 곧 카이로스에서 찾는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라는 표현은 허무의 구호가 아니라, 다가오는 주님의 날 앞에서 집중과 절제를 요청하는 부름이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권면은 관계와 감정과 소유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에 예속되지 말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선권을 두라는 지침이다. 장가간 자가 아내를 기쁘게 하느라 마음이 나뉠 수 있고, 장가가지 않은 자가 주의 일에 더 전념할 여지가 있다는 바울의 설명은 소명 배분과 삶의 질서에 관한 성숙한 분별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경우를 상기시키며, 초대교회가 혈연 가족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영적 가족 공동체를 더 큰 질서로 삼았음을 짚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의 이름이 복음서에 분명히 기록된 사실은, 여성의 이름과 증언을 공동체 기억 속에 새겨 넣은 교회의 역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헌신의 전통은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제도화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수도 전통은 마태복음 19장 12절,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에 기대어 온전한 전념을 선택한 이들의 길이다. 개혁 전통이 같은 제도적 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때가 단축된” 시대 감각 앞에서 주를 위하여 독신의 재화를 귀히 여긴 마음은 배울 가치가 있다. 바울의 의도는 결혼을 금령으로 묶으려는 것이 아니라, 혼인의 선함과 독신의 유익을 함께 인정하며 각 사람의 은사와 형편에 따라 “분요함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7장 36–38절에서 딸을 시집보내도 잘하는 일이나 보내지 아니함은 더 잘하는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임박한 때의 영적 집중이라는 특별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부에 대한 권면 또한 재혼은 “주 안에서만” 자유이며, 바울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되다 하되, 누구에게도 일률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소명과 양심, 공동체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메시지를 오늘에 심으려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가정 폭력과 강압, 불의한 구조 앞에서 침묵하거나 영적 언어로 덮어서는 안 된다.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말씀은 피해자에게 탈출과 보호, 법적 구제를 권하는 적극적 사랑의 명령이다. 교회 치리는 죄를 숨기는 내부 논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 회개를 요구하고 약자를 지키는 정의의 실천이어야 한다. 둘째, 힘 있는 자의 회심은 특권의 보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재사회화되는 변혁이어야 한다. 남편의 권위는 군림의 인가가 아니라 책임의 십자가다. 직장과 사회에서의 자유도 자기실현의 전리품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자원이다. 복음은 억압받는 이를 자유인으로 일으키고, 자유인을 섬기는 종으로 낮춘다. 이 역설이 교회와 가정의 체질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다.
결국 관건은 7장 24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 모인다. 소명은 자리 이동의 명령이기 전에 자리 성화의 사건이다.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회적 약자이든 강자이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질서를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 우리를 이끈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복음은 먼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망과 제도, 일터와 가정, 교회와 도시 속에서 몸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의 난해함을 이유로 본문을 비껴 가는 대신, 그 난해함이 열어 주는 더 깊은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권위는 섬김으로 성화되며, 결혼은 예배로 승화된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더 분주해질 이유가 아니라 더 단호해질 이유를 얻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생활의 언어로 바꾸어 가는 일, 그것이 종과 자유, 결혼과 독신의 구분을 넘어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완성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이 왜 ‘사랑’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왜 복음은 곧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장’이라 부르는 성경학자들의 말대로, 그 안에는 구원과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본질은 삶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 곧 우리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흥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그 실천적 내용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어떤 교리나 신앙 체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삶으로 보이신 복음은, 말 그대로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장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도바울이 도시인의 언어로 표현한 이 ‘사랑장(章)’은, 사랑의 속성을 매우 논리적이고 해설적으로 풀어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는 말씀(고전 13:4 이하)은, 세상 도처에서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도덕적 가르침이나 예의범절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구절을 통해, 사랑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적 측면을 담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말씀은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 또한 주를 완전한 사랑으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가르치듯이, 복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시작되며, 그 대상은 모든 이, 심지어 세리와 창기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그 낮추심과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먼저 열리고,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때로는 먼저 지적으로 깨달음이 와서 마음이 열릴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이 먼저 열려서 지적인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과 이성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숙고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틀이나 습관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역사 속 사례 중 유명한 예로, 폼페이(Pompeii)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묻혔을 때, 어미가 아이를 품고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의 본능적 희생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성은 자기 보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올 때, 서로 양보하기보다는 자신이 빛과 양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생존 경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자연적 본성과 달리, ‘자기 희생’을 통해 다른 생명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는 행동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최정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 없이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종종 설교나 강연에서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몸소 보여주신 행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지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은 가장 궁극적 형태이며,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특히 한자로 ‘희생(犧牲)’이라 쓸 때 ‘소’(牛)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도 해석하는데, 소가 평생 밭을 갈고, 자기 힘을 다해 주인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고기, 가죽, 뼈, 심지어 꼬리까지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가 생애를 다해 주인을 섬기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행사가 아닌, 정말 우리가 곁에서 직접 보는 낮은 자리에서의 헌신,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3:1).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배신이나 거부,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감싸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교훈이나 위안이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때,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저변에는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대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곧 ‘복음’인가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의 선언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 삶에서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듯 ‘발 벗고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과 세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가르쳐온 바,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근거로,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복음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99라는 다수를 중시합니다. ‘하나보다 아흔아홉이 더 중요하다’는 이 세상의 평범한 계산식에 길들여져 있으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자원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는 그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
누가복음 15장은 바로 이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란 단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류를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식사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익숙했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구별됨’을 강조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들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심지어 죄인들과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낯선 접촉’을 통해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멀리서 “너희는 죄인이니 당장 회개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죄로 물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원 의지와, 회복된 후에 함께 기뻐하는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데서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5:7). 이는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창기는 당시 율법 체제에서 가장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폄하되었고, 창기는 성적인 죄로 가장 경멸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았던 만큼 용서를 받았을 때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그 감사가 결국 삶의 완전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처럼(롬 5:20), 회개한 큰 죄인이 느끼는 은혜와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풍조는 때때로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이런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여, 더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 더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방치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낮은 곳을 향한 관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올리벳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사랑’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선교적 접근에서, 복음은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deed(행동)가 따라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복음 사역을 확장해나갈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고, 그들과 밥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애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바쁜 일상, 혹은 우리의 이기심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장벽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재정적인 자원이 풍성해질수록, 자칫하면 ‘잃어버린 자 한 명’보다 ‘이미 모인 많은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역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5장 5절, 6절을 보면,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그 양을 되찾았을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이는 그저 물건 한 점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생명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단지 도덕적 반성이나 형식적 죄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며, 그 속에는 자신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는 그 죄된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의 심각성, 그리고 자신이 그 죄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을수록, 감사와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 사람은 복음의 힘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범할 것이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사랑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죄로 쓰러져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 사용하여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다른, 복음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가 당연한 질서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서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신뢰가 우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닫힌 집이 아니라, 늘 열려 있고, 새로운 기회를 제시해주며,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의 그늘진 곳, 가난하고 병든 자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이주민 등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리와 죄인의 복음’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많은 재정과 자원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성공’을 인정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이웃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때로는, 조직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의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지에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역을 펼치며,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내년 교회 30주년을 맞아 가난한 나라에 300개의 학교를 지어주자”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목적이 단지 ‘건물 건립’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의 실제적 혜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교육받고, 질병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는 단순한 선교 프로젝트를 넘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복음’의 실천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세계입니다. 한 명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뒤로 남겨두는 세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세계, 죄인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말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은 단지 범죄자들이나 특정한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나는 의인이니,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된 ‘잃어버린 양’이었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던진 질문 중, “우리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찰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늘리는 일, 교인 수나 헌금을 늘리는 일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일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사랑의 수고를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자기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즉,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 용서의 기쁨을 서로에게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세리와 죄인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 큰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받아 더 큰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혁명적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것처럼,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요청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을 깨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사명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복음 공동체라면, 그들을 찾아다니며 보살펴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세리도, 사랑에 실패한 창기도, 삶에서 방황하는 청년도, 병실에서 고통받는 환자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영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힘 있게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 감동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하늘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세리와 죄인의 복음’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시금 깊이 깨닫길 간절히 소망하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사회와 선교지 곳곳에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길 호소합니다. 도시와 농촌,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를 막론하고,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소명을 감당할 때, 결국 복음은 삶으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죄인들이 회개와 용서,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격하고, 함께 구원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듣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까지 품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이, 실은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할 사명의 핵심이며,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헌신자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 5장 12-2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여 아담과 그리스도를 극명히 대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가 우리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문이라고 강조한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고, 그 결과 사망이 만인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와 생명이 임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로마서 5장 12-21절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신학적 개념은 ‘원죄(original sin)’이다. 장재형목사는 원죄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반발, 즉 “왜 내가 죄 지은 적이 없는데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느냐”라는 항변을 자주 언급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범죄가 어떻게 자기 책임으로 전가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라는 폭군 같은 권세가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오늘날 인류가 사망의 그늘 아래 살고 있음을 구체적인 예로 든다. 만약 우리 본성이 갈망하는 에덴동산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었다면, 지금의 세계가 고통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원치 않는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고, 그것이 우리를 폭군처럼 억압한다. 설사 “인간은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니 죄인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나와 상관있다고 성경이 말하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해도, 성경은 그 시작점이 아담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즉, 아담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리를 바울이 설명할 때, 율법과 죄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덧붙여 말한다. 로마서 5장 13절에 따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율법은 모세 이후에 주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죄 자체는 이미 존재했다. 단지 법적 기준으로 ‘죄’가 확정되지 않았을 뿐이며, 모세 율법이 제시된 이후라야 죄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나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이미 그것은 ‘죄’이지만, 명문 율법이 없었기에 ‘법을 어겼다’는 식의 개념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다 해도 죄는 계속 존재했고, 율법은 죄를 죄로 더 분명히 인식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율법 자체가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율법으로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 주목하면서, 비록 아담처럼 직접 금지된 열매를 먹은 행위는 하지 않았어도 그 죄의 결과로서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죄론’이 갖는 무게이다. 한 사람 아담이 머리가 되어 범죄에 들어갔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그 죄의 영향력 아래 태어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이 대목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일컫는 부분을 특히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온 것처럼,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생명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아담이 상징하는 ‘옛 사람’에 속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새 사람’에 속할 것이냐를 묵상해야 한다.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강조한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구원이 전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전가(imputation)’라는 신학적 개념을 장재형목사는 다시 한번 자세히 풀이한다. 우리가 직접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넘어왔고, 반대로 우리의 의로움이 전혀 없음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처럼 죄의 전가(original sin)와 의의 전가(Christ’s righteousness)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철저히 신적인 주권과 은혜에 의한 사건이다.
이와 연동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5-47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난 육의 존재이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신령한 분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산 영(a living being)이라면, 둘째 사람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놓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므로, 두 대표자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대표성에 대해 “대표이론(Doctrine of Representation)” 혹은 “연합이론(Principle of Representation and Corporate Solidarity)”으로 설명한다.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범죄가 전가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그분의 의가 전가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구조적으로 서로 얽혀 있듯이,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순종은 그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띤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상의 예시로도 풀어낸다. 가령,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을 때, 어떤 부족 문화권에 사는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름이 아니라 부족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그 공동체와 ‘연대’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영적 차원에서 아담의 ‘머리됨’ 아래 한 몸체로 연대되었기에,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를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머리(new head)가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그분이 이루신 의의 공로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종자 개량론”이라고 비유적으로도 설명한다. 이사야서 53장 10절에서는 고난의 종이 죽지만 씨를 본다고 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종자’가 나타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아담’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핵심적이고 으뜸 되는 죄는 불신앙(unfaith)과 불순종(disobedience)이다. 아담에게서 드러났던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믿지 않고 어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만약에 아담이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다면, 사망과 죄의 지배가 인류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불신앙의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지만,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대표이론, 그리고 연합의 원리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려면 먼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못 박혀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얻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본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적이고 죄된 생명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갈라디아서2장 20절). 그럴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된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역시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설명한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온 인류가 복을 받는 언약이 주어졌고, 동일한 원리로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전가했고, 예수 한 사람이 의를 전가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장면에서도,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라는 언급이 나오듯이, 죄와 복은 결코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온 공동체와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연대적 결과를 낳는다.
민수기 16장 고라의 반역 사건에서, 고라의 죄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소유까지 전부 징벌받는 장면은 대표이론과 연대성의 무시무시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수아서 7장의 아간의 범죄에서도 아간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이 돌로 쳐서 불태워진다. 그들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이유는 죄의 연대적 파급 효과를 두려워했고, 죄가 공동체 전체에 미칠 영향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암소와 염소와 양을 쪼개어 놓고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고난을 받는다”라고 예언하셨는데, 이는 언약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의 작은 순종 혹은 불순종, 완전함 혹은 미흡함까지도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 부분이 후대에 결과적으로 연결되어 나간다. 이처럼 한 개인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개인 이상으로 공동체와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불러오는 여파가 후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대표이론이 갖는 무시무시함이자 동시에 복된 약속이기도 하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는 장면도 바울이 말하는 대표성과 공명한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온 백성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의 기도로 인해 하늘이 열리고 닫힌다는 사실은 한 개인의 위치와 권세가 결코 개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로마서 5장 20-21절에 이르러, 바울은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려 온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 “생명과 영생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죄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던 세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로 바뀐다. 이로써 인류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서 고통받던 낡은 역사는 지나가고,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새 역사가 열린다(고린도후서 5장17절).
장재형목사는 결국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아담 안에 속한 옛 본성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새 본성이냐를 묻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 안에 살 때 우리는 의와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바울이 말하는 대표이론과 연대성은 그저 난해한 교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 아니면 은혜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를 결정짓는 실제적인 문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넘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며, 아담의 죄와 정죄가 걷어낼 수 없었던 깊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2.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와 구원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강조되는 주제는 아담과 결정적으로 대조되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새 아담’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앞서 아담이 죄의 문을 열어 죽음과 파멸이 임하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의와 생명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여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한 사람(아담)의 범죄’와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을 명확히 대비시킨다. 죄와 불순종이 지배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의와 순종이 확립되었고, 그로 인해 죄인이었던 자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반복적으로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전가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이루신 결과를 우리가 ‘공로 없이’ 전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 은혜의 정수다.
이러한 사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으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을 초래했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도야말로 복음서와 사도서신 전반에 깔린 핵심 줄거리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한 개인의 죽음과 부활 이상이며, 모든 인류의 머리(대표)로서 죄가운데 있는 자들을 대신해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나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을 받나? 내가 못한 것을 예수님이 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적용되느냐?” 하고 묻는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대표이론”과“연합의 원리”가 해답을 제시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인간은 본래 아담과 죄의 연대 속에 태어나 죄의 종속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새 대표자가 되셔서 그 죄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움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시인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장재형목사는 ‘종자의 근본적 변화’로도 설명한다. 마치 씨앗 자체가 새롭게 바뀐 것이기에, 이제는 다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7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해 왕 노릇했다면,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두고 사망과 죄가 왕 노릇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은혜와 의가 왕 노릇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다고 해석한다. 바울은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사람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새 생명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스리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죄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우리를 의와 생명의 왕권 아래로 이끌어,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누리게 하는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다시 끌어온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는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지만, 떨어진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삶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친히 요한복음 15장 9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초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 영적 성장과 풍성함의 필수 열쇠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대표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라고 부른다. 연합은 그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문제이기에, 교회가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의와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넘어서는 실재적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기록된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사용하는 세 가지 비유―노예시장(속량), 법정(칭의), 제단(화목제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대속적이며, 실재적인 의미를 갖는지 설명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고, 우리가 죄인이지만 법정에서 ‘의롭다’ 선고받게 하셨으며,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의 담을 허무셨다. 이런 모든 구원 은혜가 ‘대표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말한다.
이와 같은 대표이론은 세상적인 예시로도 설명될 수 있다. 국가의 대표자가 체결한 조약 하나가 국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듯이, 가정의 대표가 집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기면 그 구성원 전체가 거기에 연대적으로 영향을 받듯이, 한 사람의 결정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전반에 미치는 것이다. 영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담이 죄의 문서를 ‘도장’ 찍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 묶어놓았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와 생명의 문서를 ‘도장’ 찍어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죄의 심각성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크고 전인적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5장 20-21절의 결론부에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선포한다. 사망이 왕 노릇하던 곳에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죄가 극심한 상황을 본다 해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사는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폭발적으로 드러났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은혜가 죄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며, 생명이 사망보다 무한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인용한다.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 노릇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날마다 인식해야 하며, 나아가 삶 속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전체적으로, 로마서 5장 12-21절에 드러난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이 구원의 대서사를 붙들 때, 인간의 죄에 대한 자기연민이나 절망, 또는 “과연 내가 바뀔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자리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아담의 타락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새 아담’과 연합되어 의와 생명,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었음을 날마다 확인해야 한다. 그저 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근본이 뒤바뀌었다는 선언이기에, 사망이 왕 노릇하던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벗어나, 이제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를 성도 개인의 경건 생활, 교회 공동체의 비전,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확대해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한 개인의 믿음과 순종이 결코 개인 한 사람의 테두리 안에 그치지 않고,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대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이 흐르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잠재력과 사명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된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표권을 위임받아, 죄가 만연한 곳에 은혜와 생명을 실어 나르고, 불의가 가득한 곳에 정의와 사랑을 전파하며, 절망이 짙은 곳에 희망을 심는 삶을 살게 된다.
로마서 5장 12-21절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죄와 사망, 그리고 의와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인류와 개개인에게 전개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아담의 불순종이 몰고 온 재앙적인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구원과 생명의 복된 소식을 장중하게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설교하며, 각 성도가 “도대체 나는 어떤 대표 아래 있는가?”를 성찰해 보길 권면한다. 아담 아래 남아 있다면 죄의 무게에 영원히 눌릴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로써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바울의 결론은 그저 개인적 깨달음이나 신앙적 위로를 넘어, 실제 존재의 혁신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복음이야말로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라고 역설하며, 이 복음의 능력이 신앙고백 차원을 넘어 삶의 변화를 이끌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본문의 핵심은 단지 죄가 있다, 은혜가 있다를 넘어서는 ‘생명의 실제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선언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너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신자는 아담의 죄와 연합된 옛 정체성을 끊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정체성을 살아내는 소명을 가진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성도들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붙들기를 촉구한다. 첫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와 생명의 운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담의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더욱 크고 더 강력하다. 죄가 깊을수록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고백을 현실 속에서 체득할 때, 신자들은 참된 자유와 소망을 얻는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류가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망의 권세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믿는 이들이 그 사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날마다 은혜와 의, 그리고 생명의 실체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로마서 5장이 전하는 가장 기쁜 소식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과 정죄가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의롭다 함과 생명이 임했다. 이 단순한 진술 안에는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구속사(救贖史)가 집약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이 진리를 붙들 때, 과거 아담이 열어버린 죄의 세계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펼쳐 보인 새로운 에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이 땅 위에서부터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 설파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변함없이 강력하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성과 연합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죄와 사망이 얼마나 강한 폭군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는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이 선언은, 우리가 매일 죄와 싸우고 넘어질 때조차도 여전히 우리를 붙드는 복음의 능력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구원의 근본 원리인 대표성과 연대성,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한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옛 대표인 아담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따른 결과는 죄와 사망의 지속이거나, 아니면 의와 생명의 새 역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 현실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가 전해야 할 참된 희망의 메시지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에 나타난 아볼로와 에베소 교회의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불완전함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요한의 세례’라는 형태로 상징되는 불완전한 신앙이 ‘성령의 세례’라는 온전한 신앙으로 옮겨지는 사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복음의 온전함을 체득해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장재형목사의 사역과 가르침, 더 나아가 그의 목회적 실천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볼 것이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아볼로가 가진 불완전한 신앙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더 정확한 길을 배우게 된 과정,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에서 머물러 있었던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성령의 세례’라는 새로운 국면이 어떻게 열렸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장재형목사의 목회 방향과 연결해 심도 깊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문에 나타난 인물들의 배경, 지역적·역사적 상황, 그리고 그들의 신앙적 성숙 과정을 따라가면서, 우리 또한 현재 우리의 신앙이 불완전함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다.
사도행전 18장 24절 이하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율법과 예언, 곧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뛰어난 인물로 소개된다(행 18:24).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지적·학문적 분위기가 풍성한 곳으로 유명했으며, 이곳 출신인 아볼로가 매우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서 “성경에 능통한 자” 혹은 “학문이 많은 자”라는 표현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언하면서 열정적으로 가르쳤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지식과 언변 면에서 남달랐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5)라고 기록함으로써, 그의 지식과 열정이 가지는 한계 지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요한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의미한다. 이 세례의 핵심은 ‘돌이킴(metanoia)’으로, 죄에서 떠나 회개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음서가 증언하듯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실 것이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예언했다(마 3:11, 막 1:7-8, 눅 3:16, 요 1:26-27 참조). 즉 요한의 세례는 종국적 목적이 아닌 예비적이고 준비적인 차원이었다. 그런데 아볼로는 예수에 관해 열심히 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회개 이후의 세계’, 곧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와 역동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이는 그가 예수에 관한 지식은 풍부하게 가르쳤으나, 그리스도의 삶에 실제로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 혹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음을 암시한다.
이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이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사역하며 깊은 신앙을 배웠고, 에베소에 체류하던 중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행 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수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아볼로가 이미 구약에 대한 지식,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 그리고 회개와 돌이킴의 중요성 등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 그가 새로 배워야 할 가르침은 두말할 것도 없이“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깊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흔히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라는 문장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목회철학과 사역적 가르침이 어떻게 이 본문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회개와 지식적인 깨달음에만 그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실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섬기며, 함께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된 복음의 열매라고 역설한다. 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돕고 세우는 방식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즉, 단순히 ‘알지 못하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정한 전모”를 전달하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동행이라는 삶의 현장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아볼로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또 다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과 만나 이들이“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답하는 장면이 펼쳐진다(행 19:2). 바울이 이들을 보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으므로 정작 성령의 존재와 역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 예수의 존재와 회개에 대해서는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복음이란 궁극적으로 ‘성령의 내주’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변화를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그래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고,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에 머물렀음을 알게 되자, 곧바로“요한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분명히 선포했지 않느냐?” 하고 강조한다(행 19:4).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뒤, 이들에게 안수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들에게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고 성경은 기록한다(행19:5-6).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에게 임했던 성령 세례(행 2장, 행 8장, 행 10장 등)와 더불어 교회가 확장되는 중요한 이정표로 볼 수 있는데, “에베소의 성령 강림 사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빠져나가 고린도로 가 있는 동안, 바울이 뒤늦게 에베소에 들어와 요한의 세례에서 머문 제자들을 만나 그들을 ‘성령의 세례’로 이끈 것이다. 즉, “아볼로는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그를 통해 에베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졌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바울이 그 미흡함을 채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하는 분파가 생길 정도로 그의 가르침은 탁월하고 역동적이었다(고전 1:12). 그러나 그 시작은 “요한의 세례만 알던 불완전한 상태”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이어 바울을 통해, 점차 더욱 온전한 복음의 의미로 나아갔음을 우리는 본문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 우리 시대에도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시사점을 준다. 신앙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 지식도 풍부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무를 수 있다. 즉, 지식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세례가 주는 깊은 능력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머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교회의 실제 상황에 대입해 보면, 많은 지체가 신앙적인 열심과 교리적인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에서 성령의 역동성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거나, 형제를 향한 섬김과 헌신, 나아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한다. 이는 “첫사랑을 버렸다”라고 책망받은 에베소 교회(계 2장)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에베소 교회가 바울이 3년 동안이나 직접 가르칠 정도로 신학적·교리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즉, “수준이 높아도 사랑이 식을 수 있다”는 단면을 보여 준다. 결국 교리적 지식에 만족하거나, 한때의 회개 체험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재확인하며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본질적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본질이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교회란 단지 예배당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교리를 배우는 데 그치는 곳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오히려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 주며,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지고 가는 실제적인 ‘동행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한의 세례적 차원, 즉 회개와 구원의 확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고 서로에게 나누는 삶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직접 “데려다가 가르쳤다”라는 행동도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아볼로가 자칫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의 열정을 칭찬하며 동시에 ‘더 온전한 복음’을 전해 주려는 사랑과 배려,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볼로는 이를 겸손히 받아들여, 이후 고린도 교회 등에서 바울·베드로와 함께 어깨를 견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아볼로는 과거 “요한의 세례만” 알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주의 도를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받았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세례가 임한 에베소의 제자들 역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면서, 그 지역 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7)라는 구절은 상징적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시작하셨던 새로운 공동체의 운동이, 이제는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두 사람을 중심으로 에베소 교회가 형성되고, 점차 아시아 전역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발판이 되었다. 오늘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성령 안에서의 성장’ 역시, 바로 이런 성경적 모형을 근거로 “회개”에서 멈추지 말고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삶”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진 이들이 결국 세상 가운데 적극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이 보여 주는 핵심은 “요한의 세례에서 머무르는 불완전한 상태를 뛰어넘어, 온전한 복음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역동성을 경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본문의 인물들은 실제 삶에 동참함으로써, 성령의 세례가 가져오는 능력과 사랑을 삶 전체에서 누리게 되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더 성숙한 이들이나 목회자들은 아직 완전치 않은 신앙인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그들에게 성령 안에서 성숙해지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이야기해 온 ‘동반자적 제자도’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함께 고난을 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성령 체험의 장으로 이끄는 제자 양육을 의미한다.
실천적으로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지식적으로는 성경을 잘 알고,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내지만, 그의 삶이 여전히 성령의 열매(갈 5:22-23)로 채워지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향한 사랑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어느 정도“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잔소리나 정죄가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는 실제적인 가르침과 돌봄, 그리고 기도로 함께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다.
에베소 교회가 사도행전 이후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울의 긴 사역 거점이 된 것, 그리고 나중에는 요한 사도까지 사역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성령 체험’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묘사된 “에베소의 성령 강림”은, 바울이 세웠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를 특별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계시록 2장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의 첫사랑 상실” 사건은, 아무리 한때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며 그 열정과 사랑을 식혀 버릴 수 있다는 경고의 사례가 된다. 한 번의 뜨거운 체험이나, 지적인 깨달음으로 영원히 완성되는 신앙은 없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교인들에게 “지속적인 성령 충만”과 “끊임없는 말씀 묵상 및 적용,” 그리고 “희생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성경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성령 체험”과 “지속적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이 초기에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기에 회개와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충만했을지 몰라도, 아직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새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채워 주었을 때, 이들은 강력한 복음의 사역자로, 또는 열두 명의 주축 멤버로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꾼으로 세워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회개와 교리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며, 성령 안에서의 실제적 경험과 사랑의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본문이 증언하고 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실제적 동행”과 “성령 체험을 통한 교회 공동체의 성장”이라는 메시지는, 이 사도행전 본문의 핵심을 현대 교회에 적용하는 매우 실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Ⅱ. 성령 세례와 온전한 복음의 현실화: 공동체적 사랑과 장재형목사의 현대적 적용
앞서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의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신앙은 단 한 번의 결단이나 지식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지속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세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때 성령 세례란 단순히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삶을 실제로 살아내게 하는 영적 능력”을 의미한다. 아볼로가“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움으로써, 이후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세우는 강력한 동역자가 되었듯이, 성령 세례를 경험한 신자는 ‘회개와 예수 지식’만 갖춘 단계에서 한층 더 나아가, 험난한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성령에 대해 말하되, 때로는 과도하게 은사적인 표징에만 치중하거나, 혹은 반대로 모든 성령의 역사를 신학적·지적 측면으로만 해석해 버려 실제 삶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양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사도행전 본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진정한 성령 체험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한 죄 사함”을 바탕으로, “성령의 능력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의 연합”으로 이어진다. 회개가 개인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예수의 구원에 참여시키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충만한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는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사역은 이 점에서 현대 교회가 참고할 만한 특징을 지닌다. 그는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이 성령 체험을 단지“은사적 현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진정한 회심과 지속적 제자도의 여정”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것을 개인적 자랑으로 삼거나 ‘나는 특별하다’는 우월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를 세우고 다른 이를 겸손히 섬기는 사랑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3장, 즉 사랑장이 말해 주는 핵심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고전 13:1)는 경고를 교회 공동체가 실질적으로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사실 신앙이 머리로만 습득된 지식이나 일시적인 은사 체험으로 그쳐 버리면, 결국 곧바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는 교회를 양산해 낼 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대 교회 현장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실제 교회 생활에서는, 신앙 지식이나 은사 체험이 많은 이들이 더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보다, 오히려 교만해지거나 다른 지체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이는 곧바로 본문이 말하는 “요한의 세례에 머문 불완전한 신앙”을 보여 주는 사례다. 겉으로는 큰 열심과 지식을 뽐내지만, 실제로는 성령이 가져오는 “십자가적 사랑, 자기 비움, 형제를 존중하고 교회를 세우는 겸손”이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들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또는 바울처럼 누군가가 다가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는” 돌봄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에서 이런 섬세한 돌봄, 인격적·영적 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분란이 생기거나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강조하는 ‘공동체성’은, 앞에서 언급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돌봄 방식과도 결을 같이한다. 즉,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라, “함께 고난 받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자라나는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몸의 비유’를 통해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고전 12:26)라고 말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하라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연결될 때, 성령의 은사는 서로를 분열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고 연합케 하며, 세상에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원으로 변모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분열하는 원인을, 상당 부분 “성령 충만이 지식 혹은 개인적 체험 수준에서 머물러, 실제적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도행전 18~19장이 보여 주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아볼로나 에베소의 제자들은 ‘열심’과 ‘회개’가 분명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복음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단계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이나 브리스길라·아굴라가 방문해 ‘더 정확한 복음’을 전달하고, 성령 세례를 통해 이들의 삶을 근본부터 뒤바꾸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 안에서도, ‘알긴 아는데 실천이 없는’ 지식 위주의 신앙이나, ‘체험하긴 했는데 사랑이 결핍된’ 은사 중심의 신앙이 성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을 “통합”하고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보살핌과 가르침이다.
이렇게 완전해진 복음은 결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에베소의 열두 제자처럼 지역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아볼로처럼 고린도 교회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분열보다는 연합과 성장을 가져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때 교회 성장이라 함은 단지 수적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한다”(엡4:13)는 차원의 ‘내면적·영적 성장’을 가리킨다. 교회의 양적 부흥은 그 결과로 따라올 수 있지만, 성령 충만을 통해 나타나는 사랑의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본문이 보여 주는 핵심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강조하면서도, 그 근본은 “성령의 역사와 성도 간 사랑의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사도행전의 정신을 그대로 현대 교회에 적용하는 시도라 할 수 있는데, 목회의 모든 현장에서 “성령에 의지하되, 그 결과물은 반드시 형제 사랑과 공동체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사람들은 종종 교회 내 봉사나 사역을‘의무’나 ‘책임’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하기도 하는데, 성령 충만 가운데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그 봉사를 기쁨으로 여기고,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봉사의 손길을 자발적으로 내민다. 이는 “요한의 세례”라는 준거점을 이미 넘어선 상태, 즉“성령의 세례”가 임하여 생기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과거에는 단지 ‘죄책감’에서 시작한 회개로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때, 그가 성령의 세례로 진정한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섬기는 자리까지 이르려면, 그 사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멘토의 돌봄과 바울과 같은 목회적 양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교회의 책임이자 사명이다. 교회가 이런 영적·인격적 돌봄에 실패하면, 그 성도는 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물며 회개를 반복하기만 하다 지치거나, 지식적·형식적 신앙에 불과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영혼을 살리고 키우는 목회”를 강조하는 배경에는 이런 뼈아픈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즉, 교회가 단지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 급급하거나, 건물을 크게 짓는 데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하고, 이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언급된 “에베소의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7)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적은 수라 할지라도 온전한 복음을 깨달은 이들이 모이면, 곧 그곳이 교회이고, 거기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열두 명이라는 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등을 연상시키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에베소가 이후 소아시아 복음화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는 점, 또 그곳이 바울 사역의 가장 중심축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열두 사람의 성령 체험은 단지 개인적 회심 사건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지역 교회가 시작될 때, 혹은 새로운 부흥이나 개척을 준비할 때, 큰 물리적 자원이나 많은 인원이 없어도, “성령으로 충만한 소수”가 있다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거기서 출발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어떤 사역을 개척할 때마다, 규모나 화려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성령 체험과 십자가적 사랑’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진정 하나님의 비전을 붙드는 소수”가 존재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고 한다. 이는 곧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회 개척과 성장의 원리와 부합한다.
정리하자면,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의 사건은 “요한의 세례”로 상징되는 불완전함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동력이 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볼로라는 걸출한 인물조차“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회개와 구약 예언 지식 수준에 머물렀으며, 에베소의 열두 제자도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기에” 회개만 반복하며 살아가던 상태였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도움 아래 이들은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과 예언 등 은사를 통해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꾼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에베소 교회의 역사,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성장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현대 교회로 시선을 옮겨 보면, 우리 역시 성경 지식이나 열심, 혹은 회개 경험만을 강조하면서 실제 성령의 능력과 십자가적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본질을 놓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성령 안에서의 자발적 헌신,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적 사랑”을 교회의 핵심 가치로 제시하며, 목회의 모든 측면에서 이를 구현하려 애써 왔다. 이는 단지 “성령 받아라” 혹은“회개하라”는 구호 차원을 넘어,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고난을 함께 지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삶”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교회는 비로소 에베소 교회가 받았던 성령 강림의 은혜를 재현할 수 있고, 아볼로처럼 불완전함을 넘어 온전함으로 전환된 성도들을 많이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분명 놀라운 성령 체험으로 부흥했고, 바울이 3년간 사역을 펼친 만큼 영적 수준이 높았지만, 요한 사도가 반모 섬에서 보낸 편지(계시록 2장)에 보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다. 이는 “한때 경험한 성령 세례나 강력한 은사 체험”이 영원히 신앙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낮추고, 공동체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새롭게 받아야 한다.
따라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에 영적 돌봄이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 어느 한두 사람만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겸손히 세워 주고, “요한의 세례”에 머무르지 않도록, “더 정확한 복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며 실천하는 모습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의 목회 사례는 이러한 영적 돌봄이 실제로 작동할 때, 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건강한 영적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을 통해 ‘불완전한 신앙이 온전해지는 과정’이 곧 ‘회개에서 시작되어 성령의 세례로 완성되는 길’임을 확인했다. 열정과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단계에서만 머무른다면, 그 신앙은 아직 완전한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때,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돌보게 될 때, 그 신앙은 새롭게 태어나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해 온 “성령 안에서의 공동체 형성, 그리고 십자가적 사랑의 실천”은 바로 이 사도행전적 원리를 오늘 우리의 교회 현장에 펼쳐 놓는 구체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아볼로가 처음엔 요한의 세례만 알았으나,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워 능력 있는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개인 신앙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나는 회개했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줄 안다. 하지만 혹시 그 선에서 멈춰 버린 것은 아닌가?’ ‘지금 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실제로 체험하며 형제·자매를 섬기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헌신하며, 다른 지체들의 필요를 채우려 노력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혹 불완전함에 머무르고 있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도움을 받은 아볼로처럼,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배우고, 바울처럼 목회적 돌봄을 줄 수 있는 지도자에게 인도함을 받으며, 무엇보다 성령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는 서로의 부족함을 함께 채워 주는 영적 가정(family)이 되어야 한다. 불완전함에 머물러 있는 이는 공동체의 돌봄을 통해 온전함으로 나아가고, 이미 성령의 능력을 누리고 있는 이는 더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더 정확한 복음”을 전해 주는 상생의 구도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있으며, 이것을 현실에서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성령 안의 동반자적 제자도”는 이런 교회 모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있었다. 교리에 대한 이해도도 상당히 높았고, 회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성령’이 빠지면, 회개와 열심, 그리고 지식마저도 그 깊은 사랑의 실천과 십자가적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처럼 회개에서 성령으로 나아가는 ‘전환’은 우리 신앙의 필수적인 도약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동력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묻지 않았는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도 유효하며, 우리 개개인의 신앙 상태를 날카롭게 점검한다. 만일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양육,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고 목회자나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성령의 임재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실천”과 “겸손히 섬기는 태도,” 그리고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라는 열매가 반드시 함께 나타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이끄는 목회 현장에서도, 처음부터 성령 체험이 강력하게 부어지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지적 이해와 회개만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뒤집어지는 성도들도 있다. 이처럼 시기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목적지는 한결같다. “온전한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 속에서 실제로 살아내는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교회를 세우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아볼로와 브리스길라·아굴라, 에베소 열두 제자와 바울의 관계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더 깊은 복음을 전수하는 역할을 하고, 누군가는 겸손히 배우고 체험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며, 세상을 섬기게 하는 복음의 확장”으로 귀결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불완전한 신앙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은 회개와 예수 지식을 가진 신앙인들이었지만,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사랑의 능력과 공동체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의 적극적인 돌봄과 가르침이 그 결핍을 채워 주어, 결국 강력한 교회로 서게 하고 복음 사역이 지경을 넓혀 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였으며,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지식이 아닌‘삶’으로 현실화하는 열쇠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적 목회 현장에 적용하여, 교회가 서로 섬기고 동역하며, 성령 체험을 통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힘써 왔다. 이는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한 도전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믿었음에도 불구하고‘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라면, 혹은 예수님을 믿고 봉사하고 헌금도 하지만, 내 안에 사랑이 식어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다면,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실제 삶에선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우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불완전함을 벗어나, 아볼로처럼 능력 있는 증인이 되고, 에베소 열두 제자처럼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장재형목사가 늘 역설하듯이, “생명력 넘치는 영적 가족”으로 세워져 간다.
이는 성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교회는 예배와 프로그램, 교리 교육, 봉사 등의 외형적 요소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사랑과 동역”으로 세워진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예배당도, 재정도, 제도적 기반도 없어 보였지만, 온 세상을 뒤흔드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 능력의 출발점은 성령이었고, 그 성령이 창조해 낸‘십자가적 사랑’이었다. 요한의 세례에서 성령의 세례로 넘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가 성도를 움직이는 살아 있는 동력이 되며, 그곳에서 참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볼로의 한계와 돌파, 에베소 제자들의 회개와 성령 체험이 보여 준 이 드라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다. “너희는 과연 성령으로 충만한가? 너희의 교회는 과연 성령으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부디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공동체가 늘어나길 소망하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불완전함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 가야 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성령과 동행하는 교회,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사도행전의 정신이 다시금 살아나고, 초대교회가 지녔던 뜨거운 성령 충만과 헌신이 현대 교회에서 재현될 때,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능력을 진정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이 남긴 귀중한 교훈은, 바로 이 역동적 신앙의 길 위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한의 세례에 머무르지 말라, 성령의 세례로 나아가라.” 이것이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이 우리가슴에 새기는 분명한 메시지이며, 동시에 장재형목사가 오늘 교회 앞에 제시하는 도전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그분의 기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마가복음 14장 32절부터 42절까지 전개되는 내용을 주목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극한 고난을 앞에 두셨을 때의 심정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땅에 엎드려 간구하셨고, 제자들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잠에 빠져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참된 기도의 모범”이 되심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도가 단순히 ‘담대한 확신’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로 표현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을 중요한 핵심으로 언급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여러 차례 기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환자들을 치유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권능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기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어떠한 고난도 피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능력을 통한 고난 회피’가 아니라, “전인격적 순종”을 통하여 이 길을 선택하셨음을 본문에서 드러내신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막 14:36)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절대적 신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도 위대한 지점이라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연약한 인간적인 면모가 배어 있으나, 바로 그 인간적 두려움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향한 신뢰가 함께 결합되어 “온전한 복종”을 이뤄낸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현실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예수님조차도 십자가를 앞두고 “이 잔을 옮겨달라”는 간구를 드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뜻이라면 감당하겠다”는 결단에 이르기까지,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고독한 기도의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배울 수 있는 본질적 교훈을 찾아낸다.
장재형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지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앞둔 상황에서 힘겨워하셨다’는 역사적 서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고난을 온전히 감내하는 상징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겟세마네라는 이름 자체가 “채유소”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올리브 열매가 압착되어 기름이 나오듯, 예수님 역시 ‘죄인을 구원할 대속물’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이 압착되는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왕을 세울 때, 예언자나 제사장이 머리에 기름을 붓곤 했다. 그 상징은 “왕권”을 의미하며, 동시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백성을 인도한다는 소명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즉시 오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에 수많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리면, 기드론 시내를 따라 핏물로 물든 붉은 물이 내려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이후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붉은 피로 흘러가는 시내를 건너시는 구세주의 고독한 뒷모습”으로 그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마치 이 양들의 피처럼 흘러가야 함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 잔인한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셨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을 동행해야 할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고, 의지를 다지기는커녕 잠에 빠져버렸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고독이 한층 부각된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독은 단순히 ‘인간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물론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넘겨줄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제자들조차 주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막 14:37)라며 슬픔 어린 책망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사명자로서의 고독이었다. 홀로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셨기에,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 위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이 고독이 예수님의 인생 전반에 흐르는 어떤 필연적 흐름과 맞물려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반부터 주변인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지나친 환대를 받다가, 때로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진심으로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론하실 때마다 겉으로는 “아멘”이라고 화답했어도, 실제로 그 말씀의 본질에는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난 예고에 대해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들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그런 무지와 둔감함은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좀 더 가까이 데리고 가셨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따르면, 이 세 제자는 변貌산 사건에서도 함께했던 핵심 인물들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들이 모두 특별히 용기 있고 신실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줄 만한 이들로 선택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던(눅 22:44) 예수님의 옆에서, 그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졸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주님의 ‘극한 고통’을 미처 받아들일 정신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시는 순간에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길이 바로 ‘고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하는데, 이러한 고독 속에서도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매달리는 기도를 드리심으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요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다짐으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결국 실패하고야 만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인간적인 ‘결단’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낸다고 설교한다. 베드로는 인간적 의지만으로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영적 깨어 있음은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실제로 주님이 체포되자 그는 겁에 질려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처참한 상황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의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간구하시는 연약한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고백하며 십자가를 스스로 감당하시는 강인한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상반된 두 모습의 결합이야말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즉, 진정한 신앙의 담대함이란 결코 ‘인간적 무감각’이나 ‘사고의 단순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직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복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셨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는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 길은 바로 “기도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를 “고독한 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예수님 개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도 종종 인생의 골짜기에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떠올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세상 모든 이가 잠들고, 내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 사라져버린 그 밤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라 부르며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대신 13장부터 16장까지 최후의 만찬과 고별설교가, 그리고 17장에 긴 고별기도가 기록된 뒤, 18장부터 예수님의 체포 장면이 진행된다. 장재형목사는 그 이유를 두고 “요한이 이미 예수님의 결단이 최후의 만찬(요 13:1~)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내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며 수난을 ‘영광’으로 규정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다만 마가복음 14장에서 읽히는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그 결단의 뒷면에 어떤 통곡과 눈물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을 서로 보완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종합해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만을 부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인간적 면모를 함께 드러냄으로써 예수님의 희생이 어떤 각오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전폭적 신뢰로 승화되어, 십자가를 향한 담대한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강조되듯,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도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주님 안에는 “이 쓴 잔을 옮겨달라”는 인간적 바람과 동시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앙적 결단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어려움과 고통을 직면했을 때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결국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전한다.
또한 그는 이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단지 옛날 예루살렘의 한 밤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혹은 뜻밖의 시험과 고난 앞에 놓인 순간, 우리에게도 “겟세마네의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힘 주세요”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아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복종의 기도다. 장재형목사는“인생에 찾아오는 고독한 밤, 아무도 곁에 없어 보이는 바로 그때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설 때”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거룩한 발자취를 따르는 길임을 힘주어 말한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고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굳이 그런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을 경험하실 필요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해도, 실제로 몸소 겪으신 “죽기까지의 복종”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성경이 그것을 자세히 증언하고,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통곡과 땀흘림을 여실히 드러내며, 장재형목사 같은 사역자가 계속해서 그 의미를 풀어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고독의 밤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동시에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서 이 고독한 순종의 길을 배우도록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이제 때가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1-42)라고 선포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전진”이며, 고독을 넘어서는 ‘구속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온갖 눈물과 통곡 가운데서도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사실 예수님 자신만의 결단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이 고난의 길에 동참하라”고 초대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동행’의 의미를 본다. 본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고, 주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이후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기 시작했고, 교회는 이 ‘고난과 영광’을 계승해 왔다. 장재형목사는“오늘날에도 교회는, 그리고 개인 성도들은, 겟세마네의 밤에 오롯이 깨어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우리 역시 주님이 감당하신 고독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는 길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베드로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제자의 길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장면에 이어, 같은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세밀히 살펴본다. 그중 특히 마가복음 14장 50절 이후,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이 도망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서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던 한 청년”이 무리에게 잡히자 그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전승적으로 이 청년이 곧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해석이 많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제자들과 마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점이야말로 복음서가 가진 생생한 정직성이라고 설파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결심했었다.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막 14:29).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결심은 무너졌고, 베드로의 맹세는 부질없는 말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오직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연약함’을 대변한다. 장재형목사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몸에 위험과 공포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피하려 드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신앙이 깊어 보이는 사람도,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압박 앞에서 철저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교훈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복음서는 베드로가 부인한 직후 쓴맛을 보았고, 결국 회개하여 다시 주님의 제자로서 새롭게 서는 과정을 전한다(요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장면).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쓰임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겟세마네에서 잠들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치고, 심지어 스승을 팔아넘기거나 부인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지극히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 즉, 제자들의 실패가 곧 영원한 버림이 아니었고, ‘비겁한 제자들’이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지닌 은혜를 여실히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마가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진 ‘마가’다. 장재형목사는 마가가 14장 51-52절의 부끄러운 사건을 굳이 자기 복음서에 기록해두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대개라면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복음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실패를 낱낱이 기록하면서, “인간은 이렇게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부족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마가는 베 홑이불을 걸친 채 몰래 예수님을 좇아갔을 정도로 한편으로는 ‘주님을 떠나고 싶지 않은’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리에게 잡힐 뻔하자 공포에 질려 옷을 내던지고 도망칠 정도로 연약했고, 결국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과오를 복음서 기록에 담아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장치가 된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이렇게 비겁하고 부끄럽게 물러갔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홀로 견뎌야 했던 십자가의 중량감을 한층 더 짙게 해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이런 점을 예리하게 부각한다.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실패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고독한 순종과 희생이 이렇게까지 우리 가슴에 와닿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도행전 이후 성령의 강권적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 복음 전파의 일선에서 영적 대각성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된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배신과 도주, 잠과 무지였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신앙은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격이나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음으로써 얻게 되는 은혜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토대로, “우리도 연약함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 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실패가 곧 끝이 아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신다”고 역설한다. 이 메시지는 2천 년 전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선교지에서, 혹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 앞에 무너질 수 있다. 한때 베드로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다가도, 막상 곤경에 처하면 기도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듯이, 우리 또한 회개하면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는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다시 일으키신다”는 그 복음의 핵심을 강조한다. 그는 베드로가 눈물로 통곡하고 나중에 예수님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을 세 번 받으면서(요21장), 같은 횟수로 회복되는 장면에서 큰 희망을 발견한다. “실패로 끝난 인생은 없다.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가와 베드로처럼, 가장 부끄러운 순간에도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주님이 부활로써 완성하신 승리에 동참할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의 연약함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철저하게 ‘홀로의 길’이었는가”를 다시금 부각시킨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희생이며,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지셨다. 물론 기드론 시내를 함께 건넌 제자들도 있었고, 겟세마네까지 함께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예수님 혼자 남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구원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예수님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죄의 문제 앞에서는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 또한 역설적인 길이 된다. 한편으로는 “같이 가자”라는 예수님의 부름으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홀로 져야 할 십자가”가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다른 이들의 기도나 위로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장재형목사는 “각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마16:24)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잠들어버린 모습은 그 ‘영적 실체’를 우리에게 직면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은 자기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십자가가 있으며, 그 길을 막는 온갖 시험이 눈꺼풀을 무겁게 하듯이 우리를 짓누른다. 그때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인간적 한계만을 의지하면 베드로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너짐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장재형목사는 줄곧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옮겨 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가장 가르침 받았어야 할 기도였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 깨어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 실패를 토대로 교회의 사도로 자라나고, 나중에 성령 충만함을 입은 뒤에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거는 순교자적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고난이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 속에서 회개하고 다시금 제자로 서는 사람이 훨씬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허물과 실패를 “감추지 않고 있는” 복음서의 정직함을 높이 사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고 말한다. 만약 성경이 “제자들은 언제나 대단히 훌륭했다. 어떠한 배신도 없었다”고 기술했다면,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현재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결코 투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되, 예수님이 그 연약함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시켜주셨음을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연약함이 드러난 자리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하고 무너져서 내 안의 한계를 철저히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리가 열린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결연히 다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를 다시 찾아“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는 단순히 베드로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신앙인에게 주시는 위로이자 사명이다.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바라보면서,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모색할 수 있다. “주님, 저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만으로 제자의 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세워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스토리이며, 믿음의 여정은 바로 이 패턴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도, 넘어지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반드시 오지만, 그때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을 기억하며, 다시금 제자의 길로 돌아설 수 있다.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째 일어나면 된다”는 세간의 문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복음의 진리가 여기에 스며 있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가 되면, 정죄하기보다는 ‘내가 바로 그 연약한 자 중 하나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 베드로 한 사람이 실패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돌아서서 그를 나무라고 정죄했다면, 그것은 복음적 태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로 묶으셨고, 베드로와 함께 다른 이들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셨다. 훗날 사도행전에 이르면,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고, 물건을 통용하며, 때로는 넘어진 형제를 다시 세워주는 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이다. 십자가 이후의 부활, 그 이후의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겟세마네의 잠든 제자들이 깨어나 “이제는 함께 깨어 기도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부각되는 제자들의 한계를 정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다음의 결론을 전한다. 첫째,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의 길’이었고, 우리 죄인을 위해 대속의 잔을 홀로 마신 길이었다. 둘째,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도망가거나, 스승을 배반하고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실패조차 용서하시고 다시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곧, 우리 역시 예외 없이 연약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가 이 ‘십자가와 회복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지금 당장 고난 중에 있을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완전한 복종, 그리고 그 복종에서 빚어지는 구원의 역사”로 귀결된다.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신앙 고백이, 그 길로 동행하지 못하고 이탈한 제자들을 다시금 “같이 가자”라고 부르시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러나 동시에 소망을 잃지 않는 “부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난의 현장 속에서도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이 넘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며,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통곡과 제자들의 실패는 그 신앙이 얼마나 인간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꽃피우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겟세마네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조망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밤이 결코 예수님 한 분의 희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난과 구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장재형목사의 표현대로, “예수님이 가장 심히 통곡하셨던 그 순간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은 다 잠들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졸음과 배신, 도주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부활로 이어지는 복음의 결론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애초에 자기 자신만 믿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조차, 실패를 딛고 교회 초대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주님 곁에서 도망친 과거가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비극과 고독의 절정으로 보이지만,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새벽”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그 십자가가 부활의 문을 여는 핵심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날 밤 깨지 못했으나, 부활과 성령의 임재 이후 비로소 “깨어 있는” 제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겟세마네 기도를 되새기며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의 길이 예수님의 길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할지라도, 혹은 오히려 예수님이 겪으신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미 걸어가신 그 고독의 길이 “우리를 위한 길”이었고, 동시에 “우리에게 동행하자고 권면하시는 길”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의미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땀방울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으나, 그 기도는 ‘우리를 대속하시려는 중보의 기도’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결국은 회복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았다. 이는 우리도 “주님, 제가 깨어 있고 싶었지만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영혼을 깨워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다시 일으키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매년 우리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반복해서 기념하지만,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이 고독한 순종의 역사 위에 세워진 구원이 ‘오늘의 나에게도’ 실제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결론맺는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설교에서 “만약 내가 그 밤에 예수님 곁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적으로는 “나도 아마 잠에 들었을 것이고, 도망쳤을 것”이라고 답하곤 한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인간의 나약함은 본질적으로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 한 분이 충성스럽고 완전하셨기에, 우리 모두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 메시지가 바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여전히 절실한 이유라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강조한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란, 고난과 시련이 없는 평탄한 동행이 아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그것을 목전에 두신 채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길이었고, 그 길이야말로 구원을 이룬 길이었다. 제자들은 그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했으나, 부활 이후에는 각자 십자가를 품고 새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고난과 은혜의 길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제자의 길은 실패할 때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길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고독은 철저했지만, 그 고독이 결국 전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고, 제자들처럼 연약한 자들을 다시 부르시어 세워주셨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장재형목사가 줄곧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은, “아바 아버지여”라는 예수님의 기도 한 마디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처절하게 순종하시고 복종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을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있기에, 실패한 제자도, 잠들어버린 우리도, 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마가도, 다시금 공동체로 돌아와 기도로 깨어날 수 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우르는 복음의 정수이며, 우리의 회복과 승리의 관건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우리는 늘 좌절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끝없는 은혜의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긴 밤은 그런 은혜의 길이 시작된 자리였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상황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나, 억울함이나, 두려움 앞에서 “이 잔을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때, 예수님이 보이셨던 그 길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낙심이 깊어도, 심지어 실패와 부끄러움이 커도,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제자들의 실패마저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출발하고, 그 신뢰를 끝까지 붙드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집약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길은, 바로 이 기도를 삶 가운데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 안에서, 제자들의 연약함이 강함이 되어가듯,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간다.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의 기도와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독, 그리고 그 앞에서 드러난 베드로와 제자들의 비참한 연약함이야말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얼마나 값비싼 은혜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의 길인지를 보여준다. 이 고난의 밤은 결코 비극적 마침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2)는 주님의 음성으로 이어졌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점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도 각자의 겟세마네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깨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결국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겟세마네의 기도와 베드로 및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 주는 장면 중 하나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독은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가 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우리가 실패해도, 끝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그렇기에 신앙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복된 길은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그리스도와의 동행’의 핵심이며, 겟세마네 동산의 밤이 오늘에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