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 율법의 멍에를 벗고 은혜의 자유를 입다 (Olivet University)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남긴 거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거대한 대자연의 심연을 홀로 마주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인간의 뒷모습을 강렬하게 포착해 냅니다. 바위산 정상에 홀로 올라 발아래 펼쳐진 구름과 안개를 고독하게 굽어보는 그 단독자의 실존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절대적인 자율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근대 인간의 거대한 열망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주체적 독립의 정점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실재는 눈부신 해방이 아니라, 사방으로 정처 없이 일렁이는 자욱한 안개처럼 허무하고 아득한 존재론적 방랑과 깊은 영적 불안뿐입니다.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율의 충동이 어떻게 도리어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 무거운 속박이 되는지 이 예술적 풍경은 고요히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거룩한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는 장엄한 신학의 정점 또한,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오만한 자율의 시도가 어떻게 처절한 영적 속박과 종살이로 귀결되는지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서사에서 출발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등장하는 “두 여자의 비유”는 단순히 고대 교회의 특수한 교리적 분쟁을 수습하기 위한 과거의 낡은 기록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내밀한 영적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오래된 성경의 본문을 오늘의 척박한 강단 위로 생생하게 끌어올려 복음과 은혜, 행위와 율법의 거대한 소용돌이 사이에서 우리 영혼의 닻이 참으로 어디에 내려앉아 있는지를 엄중하게 되묻습니다.

존재의 근원적 비대칭성과 자녀의 신분으로 일어나는 영적 혁명

인간 실존이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자 조건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성에 놓여 있습니다. 말씀의 흐름이 영적으로 비추듯, 이 창조적 관계는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처럼 본질적으로 완벽한 비대칭성을 이룹니다. 태양은 해바라기의 실재 여부나 헌신과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하며 무한한 빛을 발산하지만, 해바라기는 태양이 위로부터 쏟아내는 따스한 빛과 은혜가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본질은 이 엄연하고도 엄숙한 진실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창조주를 향한 절대적 의존의 관계 속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는 이러한 창조적 의존을 강하게 거부하고, 스스로 자율과 독립을 선언하며 창조주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오만한 충동이 끊임없이 요동쳐 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역사적 문장을 인간 자율성 충동의 극단적인 표지로 읽어내며, 신의 부재를 선포한 그 비장한 자리에서 도리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공허와 처절한 파열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로 지적합니다. 영원의 실재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유한함은 결국 씻을 수 없는 불안과 정죄의 노예가 될 뿐이며, 이 무거운 속박은 오직 전적인 은혜의 빛 아래서만 진정한 자녀의 자유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인간 영혼이 겪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가장 깊은 뿌리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입니다. 이 비극적인 소외와 단절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거절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주인이 되려 했던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 보여준 역사적 사례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가 먼저 여호와의 살아있는 말씀을 가볍게 버렸을 때, 그 처절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이 완전히 끊어지며 비참한 영적 파멸과 공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이 깊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인류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들려줍니다.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내면에 거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심판자의 두려운 위엄 앞에서 공포에 떨며 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가장 친밀하고 다정한 언어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녀의 신분으로 담대히 일어서게 됩니다. 이 경이로운 호칭의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위로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신분 변화이며, 두려움의 종에서 사랑받는 아들로 옮겨지는 영적 혁명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고대의 조잡한 우상숭배나 현대의 세련된 기복주의, 공로주의, 성과주의가 겉모습만 바꾸었을 뿐 모두 인간을 조건과 점수의 세계에 묶어두는 율법주의의 다른 얼굴임을 폭로합니다. 그 잔인한 체제의 핵심은 인간을 끊임없는 자격 심사 아래 영원히 노예로 묶어두는 데 있기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갈라디아서 5장의 선언은 속박의 회로를 의지적으로 끊어내라는 강력한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조급함의 장막을 걷어내고 기다림의 미학으로 걷는 언약의 길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펼쳐지는 갈라디아서 4장의 비유는 우리 신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깊은 설득력을 획득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가정의 내부 이야기, 곧 여종 하갈과 자유하는 여자 사라,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이삭의 서사를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두 개의 언약을 상징하는 거대한 구속사의 드라마로 재해석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17장까지의 서사를 배경으로 살피면,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지만, 그 장엄한 선언 뒤에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길고 캄캄한 침묵의 시간이 뒤따랐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늙어가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깊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육체를 따라” 인간적인 해결책을 서둘러 도모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겨주는 인간적인 계산을 감행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수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 어떻게 흔히 무너지고 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거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카이로스의 때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유한한 능력과 눈앞의 계산으로 은혜의 결과를 강제로 앞당기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조급함의 순간, 거룩한 은혜의 질서는 차가운 인간 행위의 질서로 순식간에 변질되고 공동체는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약속을 바라보며 견디는 기다림의 미학을 포함하기에, 그 기다림이 무너지면 은혜의 순수한 표지였던 할례 같은 거룩한 상징이 어느새 구원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이 설교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순서의 전도야말로 우리 영혼 속에 독한 율법주의가 싹트는 치명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옛 이름을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시며 언약을 새롭게 하셨을 때 행해진 할례는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순종과 감사의 표지였을 뿐입니다. 은혜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 행위를 원인으로 삼으려는 모든 종교적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육체의 열매를 낳고 영혼을 깊은 불안의 수렁으로 밀어 넣을 뿐입니다.

땅의 예루살렘을 넘어 하늘의 도성이 선포하는 자녀의 자유

사도 바울은 이 극적인 비유의 상징적 대응을 서신 속에서 매우 명료하고 단호하게 제시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엄숙하게 주어진 율법 언약을 완벽하게 상징하며, 그 행위의 체제 아래서 태어난 자들은 결코 온전한 상속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종을 낳을” 뿐입니다. 사도는 하갈을 지리적으로 척박한 “아라비아의 시내산”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는 사도 당시의 막강한 종교적 권력이 지배하던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율법의 신성한 기원과 상관없이, 그것을 인간의 공로와 자격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강요하는 모든 종교적 기득권 체제가 결국 엄격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낼 뿐이라는 슬픈 진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유하는 여자 사라는 땅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찬란하게 상징합니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도성이자 어린 양의 거룩한 신부, 그리고 참된 자유인들의 공동체로 묘사되는 교회는 결코 땅의 방식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신실한 약속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녀를 낳아 자유케 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생물학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에게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기적처럼 태어난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방적이고도 완벽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정점입니다. 이사야 54장의 예언이 노래하듯이,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했던 척박한 여인의 자손이 도리어 땅의 유력한 자들의 후손보다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되는 이 은혜의 패턴은 오직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복음을 신뢰하는 모든 신자는 자신의 육체적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이삭과 같이 존귀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역사 속에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했듯이, 오늘날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도 행위와 성과를 앞세운 완고한 율법주의는 은혜 중심의 순수한 복음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정죄하려 든다. 이 치열한 영적 긴장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기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원리를 공동체의 중심에서 분명히 분별하고 치워야 합니다.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는 준엄한 명령은 특정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왜곡하는 거짓된 체제를 단호히 배제하라는 신학적 요청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이 맺어내는 사랑의 열매와 영원한 안식

이 장엄한 구속사적 비유는 자연스럽게 갈라디아서 5장이 선포하는 기독교 자유의 위대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는 바울의 선포 속에서 자유는 결코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책임을 해체해 버리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를 짓누던 모든 정죄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사랑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해 내는 창조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단호히 벗어던져야 할 “종의 멍에”는 단지 고대의 할례 규정만을 뜻하지 않으며, 인간의 공로주의, 도덕적 완벽주의, 성과 중심의 신앙, 그리고 경건의 외형적인 형식에만 집착하느라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모든 종교적 강박과 내면의 두려움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복음이 선물하는 진정한 자유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역동적인 안식으로 확인됩니다.

이 과정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모든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묵묵히 걸어가게 만듭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아 날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영광스러운 날 완성에 이르게 되는 소망의 서사입니다. 이 역동적인 과정에서 가시적으로 맺히는 결실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짜내어 만드는 고단한 업적의 목록이 결코 아니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넘치는 증거이자, 은혜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결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무서운 유혹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대개 “더 거룩해지자”는 경건한 구호로 시작되지만, 어느새 “더 많이 행하라”는 율법적 압박으로 기울어지며, 결국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점수의 종교로 회귀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진리를 교묘하게 교란하고 인간의 행위를 섞으려는 세력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문제는 성례나 규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격상시키는 치명적인 오용에 있습니다. 만일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완전하고도 충족적인 효력을 손상시키는 일이며, 결국 “은혜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길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서의 신학적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 바로 그 절대적인 결론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모든 종교적 짐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며, 신앙의 중심축을 언제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복음의 능동태 위에 굳건히 두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진정한 자유의 종착지는 놀랍도록 명쾌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이 그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는 이기적인 자기 해방을 넘어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한 명령 속에 온 율법이 요약된다는 사도의 통찰은, 은혜가 율법을 무가치하게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원리를 통해 그 본질적 정신을 완성함을 뜻합니다. 교회가 이 사랑의 원리를 잃어버릴 때 공동체는 순식간에 서로를 채점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지옥”으로 변질되지만, 교회가 서로의 짐을 져주는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때 “위 예루살렘”의 질서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신앙의 출발점을 “내가 해야 한다”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로 옮겨 놓는 일, 곧 은혜를 원인으로, 우리의 행위를 그 결과로 명확히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혈통이나 업적이 아닌 약속의 자녀에 둘 때 섬김이 강요가 아닌 기쁨으로 변화되며,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숨는 종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오는 자녀가 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의 모든 논의는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갈의 장막입니까, 사라의 품입니까. 행위와 자격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체제 속에서 불안과 우월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값없이 주어진 은혜 위에서 자유와 감사의 깊은 호흡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이 실존적 질문 앞에서 갈라디아서의 비유는 더 이상 고대의 낡은 사례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을 남김없이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됩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을 신뢰하고, 성령의 조용한 인도에 귀 기울이며,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작은 걸음 속에서 그 위대한 자유의 여정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복음의 영원한 약속을 붙들고 종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진 당신의 발걸음은, 이제 어떤 사랑의 열매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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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설교: 십자가 복음과 은혜로 빚어내는 참된 교회의 삶 (Olivet University)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그의 저서에서 배를 만들고자 한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게 하거나 일을 지시하기보다, 저 넓고 끝없는 바다를 향한 갈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거대한 돛을 올리고 파도를 가르는 기술의 바탕에는 결국 목적지를 향한 본질적인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건축과 교회의 본질을 세우는 일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테네로 이어지는 바울의 긴박한 발걸음을 추적하며,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 되게 하고 생명을 낳는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본질을 우리 앞에 꺼내어 놓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추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는 성도들의 내면을 찌르는 거룩한 질문입니다. 화려한 목회 기술이나 복잡한 현대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교회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출발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진하고 핍박이 동시에 솟구치던 그 뜨거운 현장 속에서, 바울의 심장은 오직 사랑으로 뛰었고 그의 발걸음은 은혜의 질서 위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갔습니다.

전략을 넘어서는 가장 깊은 동력, 사랑의 관계성

바울이 빌립보에서 모진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는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대지 않고 즉시 데살로니가를 향해 걸음을 옮긴 것은 단순한 종교적 사명감을 넘어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 설교는 그 멈추지 않는 움직임의 배후에 차가운 관례가 아닌 뜨겁고 간절한 관계의 열망이 있었음을 깊이 조명합니다. 자신을 거절하고 고발하며 공격하던 동족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당으로 찾아가 그들을 품으려는 마음은 인간의 의지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역설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첫 번째 기초는 다른 어떤 위대한 사역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관계성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원수까지 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는 깊은 도전은, 선교가 일종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효율성과 정확성, 혹은 눈에 보이는 성과라는 이름 아래 영혼을 향한 기다림과 인내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는 진리는 자칫 상대방의 영혼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결여된 신학적 정확성만을 자랑하거나, 인격적인 관계가 빠진 종교적 열심을 휘두를 때 그 모든 선교적 외침은 공허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무리한 사역은 도리어 영적인 피로감만을 남기게 될 뿐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첫 단추가 되어 올바로 채워질 때, 교회의 모든 영적 질서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부드러운 용납과 끝없는 인내, 심지어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픈 권면과 책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행위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참된 생명력을 얻습니다.

진리를 관통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단순함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담겨 청중에게 전해지는 메시지의 내용 또한 인간의 철학처럼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이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성경을 치밀하게 풀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오직 하나의 진실만을 증명했음을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흩어져 있던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조각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되는 영적 퍼즐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순하지만 우주적인 진실이 정확히 맞춰질 때, 청중의 닫힌 심령에는 성령이 부어주시는 폭발적인 깨달음과 은혜가 빛처럼 쏟아지게 됩니다. 경건한 헬라의 지성인들과 귀부인들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복음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인간의 화려한 수사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진리의 핵이 가진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질서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강단과 사역 현장에도 동일하고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지성을 만족시키는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의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기반합니다. 다채로운 문화적 콘텐츠와 수많은 행사들이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정작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뚜렷하게 서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은 부수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질수록 복음의 광채가 오히려 흐려질 수 있는 역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아무리 화려한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결국 방향을 잃고 거센 파도에 표류하는 배가 됩니다. 반대로 어떤 시대적 환난 속에서도 이 단순하고 명징한 복음의 진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면, 성도들은 세상의 척박한 광야 한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생명의 길을 내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을 뚫고 피어나는 말씀과 공동체의 호흡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탄의 교묘한 시기와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마련입니다. 시장의 불량배들이 선동되어 야손의 집을 거칠게 습격하고, 세상을 뒤집어놓는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두려움 섞인 고발이 울려 퍼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 역사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영적 무기인 시기심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는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내는 전진의 관문이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증명합니다. 환난은 결코 성도들을 위축시키거나 나약하게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의 반경을 베뢰아를 넘어 세상 끝을 향해 확장시키는 강력한 영적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외부의 오해와 내부의 핍박 앞에서 우리는 낙심하여 방어와 도피를 택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정화와 담대한 전진을 기꺼이 선택해야만 합니다.

가혹한 핍박을 넘어선 베뢰아 사람들은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진리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가 비추는 자리는 이러한 베뢰아 성도들의 영적 태도를 말씀과 성령과 공동체라는 세 가지의 강력하고 유기적인 고리로 풀어냅니다. 개인의 골방에서 묵상한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삶의 지표가 되고, 그것이 소그룹이라는 공동체의 용광로 속에서 나누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의 삶이 시작됩니다. 거창한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네이버 카페에 남겨지는 신앙에세이 같은 짧고 진실한 묵상 한 줄이나 성경공부 모임이 지닌 위대한 힘도 결국 이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말씀 앞에 철저히 겸손해질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성도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어떠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영적 면역력으로 자라납니다.

주일의 고백이 월요일의 성실로 이어지는 신앙

복음의 역동성은 결코 한 번의 뜨거운 눈물이나 일회적인 종교 집회의 감격으로 증발하지 않는 영원한 특성을 지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에는 다가올 재림에 대한 막연한 소망만을 핑계로 삼아 현재의 일상적인 삶과 책임을 소홀히 하려는 태도를 향한 단호하고 준엄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밤낮으로 땀 흘려 수고하며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지치지 않고 텐트를 만들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숭고한 삶은, 참된 믿음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도피나 금욕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치열하게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책임윤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일 예배당의 무거운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에서 다시 치열하고 아름답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서의 거룩한 신앙 고백이 월요일 아침 일터에서의 땀방울과 정직, 그리고 성실함으로 번져가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믿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삼십 주년을 맞이하며 전 세계 백육십일 개국으로 놀랍게 넓어진 공동체의 사역 지형도 역시 뛰어난 개인기나 우연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낯선 땅으로 짐을 싸서 떠나고, 누군가는 그가 온전히 사역할 수 있도록 물질과 기도로 파송하며, 또 누군가는 현지의 문화를 배우고 언어의 다리를 놓는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선교가 차가운 조직의 성과가 아니라, 누군가는 앞장서서 가고 누군가는 뒤에서 보내주며 서로를 생명처럼 굳게 받쳐주는 유기체적 생명 작용임을 깊이 웅변합니다. 결국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은 세련되고 논리적인 기법이 아니라, 입술의 말과 삶의 궤적이 일치하는 정직한 일상의 성실함에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위대한 역사는 화려한 건물이나 통계표의 숫자가 아니라, 늘 흔들리고 아파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야손의 불안한 눈빛과 새 신자의 떨리는 심장, 핍박 속에서도 서로를 염려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체온은 오늘 우리의 곁에 있는 이웃들의 얼굴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의 굉음과 알고리즘의 차가운 속도, 분열의 프레임이 난무하는 삭막한 현대 도시 한복판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쉬지 않고 상한 영혼들을 다정하게 부르며 거룩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갑니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박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할 때, 삼십 년의 묵직한 은혜는 다음 세대의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찬란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깊고 고요한 십자가의 진리가 나의 굳은 내면을 관통할 때, 당신의 오늘 하루는 과연 누구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으로 뻗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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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반석 위에 종말의 일상을 세우다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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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머무는 자리, 우리는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1599년,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는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이라는 압도적인 명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어두침침한 세관입니다. 탁자 위에서 은화를 세는 데 여념이 없는 마태오의 세속적인 일상 위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리스도의 손끝을 따라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집니다. 그 빛은 어둠을 찢고 들어와 묻습니다. “언제까지 그 낡은 동전을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마태오는 세속의 장부를 덮고 영원을 향해 일어섭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Chiaroscuro)를 통해 인간 내면의 회심을 그려낸 이 명작은, 오늘날 우리의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손에 쥐고 서성이고 있습니까?

흩어진 영혼의 관절을 맞추는 진리의 빛

이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파편화된 지식과 세속의 논리 속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라는 정밀한 텍스트를 통해 이처럼 어긋난 현대인들의 신앙 관절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영적 정형외과 의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정통’, 즉 올바름과 정확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공부와 취업,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청년 세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일시적인 진통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잇닿아 있는 정밀한 영적 설계도야말로 존재의 방향을 바로잡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반복해서 읽고 새기는 과정은, 비틀린 뼈대를 맞추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숭고한 영적 재활의 시간이 됩니다.

거짓된 철학과 규율이 빚어낸 거울 방을 지나

골로새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는 오늘날에도 낡은 옷만 갈아입은 채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얄팍한 지적 우월감으로 포장된 세상의 철학이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을 경직된 도덕 규율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가 우리를 억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위태로운 좌우의 압력 속에서, 어느 한쪽에도 갇히지 않는 사도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을 조명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종교적 허례허식이나 인간의 교만을 부추기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결코 영혼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외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가로채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임 바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복음이 지닌 폭발적인 생명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움켜쥔 손을 펼칠 때 비로소 안게 되는 영원

마태오가 세관의 동전을 기꺼이 내려놓았듯, 참된 제자도의 첫걸음은 소유를 향한 악력을 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원숭이가 좁은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쥐고 놓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얄팍한 성취와 소유를 움켜쥐느라 진짜 자유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부자 청년이 율법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던 이유는, 존재가 소유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지닌 강렬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의 진리를 피워낸다는 것입니다. 억지의 윤리가 아니라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자의 환희가 결단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앞세우는 대신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자처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거듭납니다. 깊은 성경 묵상을 통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의 영적 문법이 전환될 때, 굳게 닫혔던 손은 자연스레 펼쳐지고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땅을 딛고 하늘을 호흡하는 자의 부요함

결국 우리의 시선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향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성경의 권면은 결코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라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권세를 이긴 생명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일상을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끈질기게 파고드는 부활신앙은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얄팍한 이분법을 뛰어넘어 우리를 무한한 은혜의 바다로 인도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어찌 땅의 썩어질 것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내면의 질서가 하늘의 정조로 재편될 때, 우리의 학업과 노동,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삶은 더 이상 비교와 열등감의 무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의 소명을 다하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해 몸을 돌리던 마태오의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장재형목사 신학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 위에 세워진 새로운 자아’는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낡은 지식의 자만과 자기혐오의 늪을 모두 끊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당신의 펼친 손위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부요함이 소리 없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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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계산기를 부순 어느 여인의 거룩한 낭비, 그리고 십자가-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어스름이 짙게 깔린 예루살렘의 한 화려한 연회장. 사람들의 나지막한 담소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를 날카롭게 가르며,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습니다.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전 재산이자 가장 귀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진동하는 향기 속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화의 낭비를 지적했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광신이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파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단순한 값비싼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골고타 언덕에서 처참하게 부서질 예수의 몸통에 대한 예표였으며, 그보다 앞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한 영혼의 순전하고도 맹렬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리며, 진짜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파편, 효율의 시대를 역행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조차 손익계산서의 항목처럼 취급받는 오늘날,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거액을 일순간에 바닥에 쏟아버린 여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이 강렬한 복음서의 장면을 두고 장재형 목사는 세상의 눈에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이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는 역설적인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의 깊이 있는 설교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효율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민 구제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이 당신의 장례를 온전히 준비했다며 극찬하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허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십자가 은혜의 법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부를 내어준 자만이 아는 사랑의 무게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과 헌신의 메시지는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저작들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C.S. Lewis)의 고전 명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는 이 ‘거룩한 낭비’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시간이나 잉여의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전체’라고 역설합니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의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원한다”는 그의 선언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향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 즉 인생 전부를 부어드렸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진짜 사랑은 쪼개어 계산할 수 없으며 미래의 안정을 기약하며 유보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여인은 ‘지금 당장’ 전부를 내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영혼의 직감으로 알았고, 그 즉각적인 순종이 그녀를 영원한 복음의 역사 속에 살게 했습니다.

화폭에 담긴 눈물, 영원한 복음의 흔적이 되다

이 숨 막히는 헌신의 순간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며, 시대를 초월한 성경 묵상의 장이 되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파올로 베로네세가 남긴 대작 ‘시몬의 집에서의 잔치’를 보면,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호화로운 연회석 한가운데서 오직 한 여인만이 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주변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각자의 세속적 관심사에 빠져 있는 동안, 오직 그녀만이 하늘의 왕에게 온전한 경배를 올립니다. 훗날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역시 이 장면을 극적인 명암 대비로 화폭에 담아내며, 차가운 세상의 시선과 여인의 뜨거운 회개를 강렬하게 대조시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비효율적이었을 이 예술적 ‘낭비’의 산물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미술사적 증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쏟아부은 눈물과 헌신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원한 복음의 향기가 됨을 역설합니다.

오늘, 나의 깨어지지 않은 옥합을 마주하며

그렇다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옥합은 과연 무엇일까요? 장재형 목사는 그 옥합의 범위가 단순히 금전적 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움켜쥔 나의 진로, 황금 같은 시간,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 그 모든 것이 주님 발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각자의 옥합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죄인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만큼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의 죽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계산을 뛰어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권면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적당한 타협을 멈추고 오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효율이라는 이름의 계산기를 부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낭비를 선택할 때, 우리의 투박한 삶은 비로소 거룩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걸작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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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의 온기와 먹이는 사랑, 부활이 일상이 되는 기적에 대하여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숲의 가장 깊은 적막은 나뭇잎의 마찰음으로 깨진다고들 하지만, 내가 기거하는 숲속 마을의 고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창밖, 발톱의 미세한 긁힘과 마른 흙을 밟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기척을 확인하는 숨의 교환. 어느덧 스무 마리가 훌쩍 넘는 고양이 대가족이 숲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은 세계의 시작은 거대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연민이 베란다에 놓아둔 사료 그릇 하나, 그 작은 친절이 숲의 결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고독과 존재를 채우는 응시

그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 흰 고양이였습니다. 신비로운 외양과 달리 녀석은 무리 안에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따뜻한 밥자리에 발도 붙이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배회하던 녀석이 비를 피하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뻣뻣한 경계심 뒤로 느껴진 것은 지독한 허기와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료를 씹는 작은 소리와 사람의 손길을 확인하는 미묘한 망설임 속에서 나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거친 야생에서도 돌봄과 수용을 갈구하는 그 마음은, 실상 우리 인간의 영적 기갈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사유는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1장 강해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단순한 에필로그가 아닌, 부활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사명으로 응결되는 결정적 장면으로 읽어냅니다. “부활 이후의 세계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니라 동선이며, 신앙은 감상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그의 강조는 숲속 고양이에게 내밀었던 내 손길 위로 겹쳐졌습니다.

디베랴 새벽, 빈 그물을 채우는 말씀의 권위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허탈함은 성실하게 살아도 결과가 비어 있을 때 느끼는 실존적 무능을 상징합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를 떠올려 보십시오. 화면 속 제자들의 몸은 긴장으로 팽팽하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근육은 역동적이지만,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는 고요한 권위로 서 있는 예수가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인간의 분투가 한계에 부딪힐 때 비로소 열리는 ‘타자의 개입’을 시각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인간의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라고 정의하며, 제자들이 ‘더 열심히’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비로소 153마리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음에 주목합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어획량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비전입니다. 밤의 공허가 새벽의 충만으로 바뀌는 찰나, 그것은 인간이 자기 중심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시작되는 복음의 사건입니다.

정죄를 넘어 치유로 흐르는 반복의 리듬

부활하신 주님의 첫 사역이 화려한 설교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조반의 준비’였다는 사실은 눈물겨운 은혜입니다. 숯불의 온기와 빵의 냄새로 인간의 절망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 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물음은 베드로가 가졌던 세 번의 부인을 거울처럼 비추지만, 장재형 목사는 이 반복을 추궁이 아닌 ‘치유의 리듬’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처는 한 번의 선언으로 봉합되지 않기에, 사랑의 물음을 반복함으로써 실패의 기억을 회복의 통로로 재배치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큰 사랑(Agape)’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우정조차 버거워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주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조차 버리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자가 사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인정하며 사랑의 질문 앞에 울컥하는 자가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역설적인 힘입니다.

흩어져서 먹이는 삶, 교회의 살아있는 본질

마침내 주어지는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예수 사랑의 진위를 판별하는 실천적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먹인다’는 행위를 단지 양식을 주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상처 입은 자의 피를 닦아주고 미성숙한 자를 양육하는 전인격적 헌신, 즉 목양(Shepherding)으로 해석합니다. 예배당 안에 모이는 것(Gathering)도 중요하지만, 세상으로 흩어져서(Scattering) 굶주린 영혼을 먹이는 존재로 살아갈 때 교회는 비로소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눈이 다르게 생긴 고양이가 내게 몸을 비비며 신뢰를 보낼 때,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선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무리에서 소외되고 연약함 때문에 주저앉았던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받은 양들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처럼, 목양은 맞춰진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어긋난 사람을 사랑으로 길들이는 예술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수많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부활 신앙은 먼 곳의 기적이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외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소박한 동행에서 완성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이 이제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먹이는 삶’으로 번역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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