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영혼의 거울: 로마서 2장을 통한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복음 성찰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인류 역사의 지혜로 전해 내려오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과 같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현미경 같은 예리함을 발휘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어둠을 직시할 때는 시력을 잃은 듯 무력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근시는 신앙의 영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 유창한 종교적 수사, 수십 년의 신앙 경력과 교회 내의 중직이라는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이미 구원의 안전지대에 안착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2장 12절에서 29절에 이르는 바울의 준엄한 선언은 이러한 안일한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그것을 모르는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라는 심판대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관통하는 핵심 관점 또한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은 피부에 새긴 표식이나 손에 든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의 만지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외형적 경건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물음은 비단 고대의 유대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은밀한 불의를 용인한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늘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화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도 똑바로 날아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증서, 매주 거르지 않는 주일 성수,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 자체가 우리를 자동적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순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투영하며 ‘표면적 신앙’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유대인인 자가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없듯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자는 결코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은 소유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나 통회하는 회개가 없으며, 입술에는 복음의 언어가 가득하나 삶의 궤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내면의 양심, 그 피할 수 없는 법정

바울은 율법이라는 명문화된 기록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어둠이 단지 지식의 부재라는 변명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증거와 도덕적 지침을 이미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거창한 행위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은밀한 미움, 탐욕의 찌꺼기, 자기 의로 가득 찬 교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행해진 불순종의 순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고발은 시리도록 아프고 무겁지만, 결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왜 유일한 희망인지를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의 날카로운 영적 진단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줄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룩하고도 간절한 초대장입니다.


3. 성령의 칼로 새기는 ‘마음의 할례’

로마서 2장의 위대한 절정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혁명적인 선언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새기는 관습적인 할례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마음의 할례’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죽어있는 문자와 율법 조문에 갇힌 박제된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면의 본질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신앙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돌처럼 단단해진 완고한 마음이 살점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이어가는 변화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에 목매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는 삶으로 그 목적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이며, 복음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체화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의식과 전통은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자기 의를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로 전락할 때,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고안해낸 형식을 완수함으로써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겸손한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꺼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자신의 죄를 먼저 세밀하게 살피며,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됩니다.


4. 사람의 갈채를 넘어 하나님의 인정을 향하여

바울은 장의 말미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보상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찰나의 칭찬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의식하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사람들에게 신실해 보이기 위해 종교적 외양을 다듬는 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 가슴에 남기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나는 그저 종교적 무대 위의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 영적인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아는 자만이 쏟아지는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 복음의 찬란한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가두려는 어두운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뱉는 말,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허히 머무는 사람에게, 비로소 참된 성경 묵상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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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머무는 자리, 우리는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1599년,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는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이라는 압도적인 명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어두침침한 세관입니다. 탁자 위에서 은화를 세는 데 여념이 없는 마태오의 세속적인 일상 위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리스도의 손끝을 따라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집니다. 그 빛은 어둠을 찢고 들어와 묻습니다. “언제까지 그 낡은 동전을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마태오는 세속의 장부를 덮고 영원을 향해 일어섭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Chiaroscuro)를 통해 인간 내면의 회심을 그려낸 이 명작은, 오늘날 우리의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손에 쥐고 서성이고 있습니까?

흩어진 영혼의 관절을 맞추는 진리의 빛

이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파편화된 지식과 세속의 논리 속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라는 정밀한 텍스트를 통해 이처럼 어긋난 현대인들의 신앙 관절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영적 정형외과 의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정통’, 즉 올바름과 정확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공부와 취업,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청년 세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일시적인 진통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잇닿아 있는 정밀한 영적 설계도야말로 존재의 방향을 바로잡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반복해서 읽고 새기는 과정은, 비틀린 뼈대를 맞추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숭고한 영적 재활의 시간이 됩니다.

거짓된 철학과 규율이 빚어낸 거울 방을 지나

골로새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는 오늘날에도 낡은 옷만 갈아입은 채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얄팍한 지적 우월감으로 포장된 세상의 철학이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을 경직된 도덕 규율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가 우리를 억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위태로운 좌우의 압력 속에서, 어느 한쪽에도 갇히지 않는 사도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을 조명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종교적 허례허식이나 인간의 교만을 부추기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결코 영혼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외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가로채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임 바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복음이 지닌 폭발적인 생명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움켜쥔 손을 펼칠 때 비로소 안게 되는 영원

마태오가 세관의 동전을 기꺼이 내려놓았듯, 참된 제자도의 첫걸음은 소유를 향한 악력을 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원숭이가 좁은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쥐고 놓지 못해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얄팍한 성취와 소유를 움켜쥐느라 진짜 자유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부자 청년이 율법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던 이유는, 존재가 소유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지닌 강렬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의 진리를 피워낸다는 것입니다. 억지의 윤리가 아니라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자의 환희가 결단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앞세우는 대신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자처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거듭납니다. 깊은 성경 묵상을 통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의 영적 문법이 전환될 때, 굳게 닫혔던 손은 자연스레 펼쳐지고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땅을 딛고 하늘을 호흡하는 자의 부요함

결국 우리의 시선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향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성경의 권면은 결코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라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권세를 이긴 생명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일상을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끈질기게 파고드는 부활신앙은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얄팍한 이분법을 뛰어넘어 우리를 무한한 은혜의 바다로 인도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어찌 땅의 썩어질 것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내면의 질서가 하늘의 정조로 재편될 때, 우리의 학업과 노동,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삶은 더 이상 비교와 열등감의 무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의 소명을 다하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해 몸을 돌리던 마태오의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장재형목사 신학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 위에 세워진 새로운 자아’는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낡은 지식의 자만과 자기혐오의 늪을 모두 끊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당신의 펼친 손위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부요함이 소리 없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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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계산기를 부순 어느 여인의 거룩한 낭비, 그리고 십자가-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어스름이 짙게 깔린 예루살렘의 한 화려한 연회장. 사람들의 나지막한 담소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를 날카롭게 가르며,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습니다.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전 재산이자 가장 귀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진동하는 향기 속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화의 낭비를 지적했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광신이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파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단순한 값비싼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골고타 언덕에서 처참하게 부서질 예수의 몸통에 대한 예표였으며, 그보다 앞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한 영혼의 순전하고도 맹렬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리며, 진짜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파편, 효율의 시대를 역행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조차 손익계산서의 항목처럼 취급받는 오늘날,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거액을 일순간에 바닥에 쏟아버린 여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이 강렬한 복음서의 장면을 두고 장재형 목사는 세상의 눈에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이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는 역설적인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의 깊이 있는 설교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효율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민 구제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이 당신의 장례를 온전히 준비했다며 극찬하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허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십자가 은혜의 법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부를 내어준 자만이 아는 사랑의 무게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과 헌신의 메시지는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저작들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C.S. Lewis)의 고전 명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는 이 ‘거룩한 낭비’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시간이나 잉여의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전체’라고 역설합니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의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원한다”는 그의 선언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향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 즉 인생 전부를 부어드렸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진짜 사랑은 쪼개어 계산할 수 없으며 미래의 안정을 기약하며 유보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여인은 ‘지금 당장’ 전부를 내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영혼의 직감으로 알았고, 그 즉각적인 순종이 그녀를 영원한 복음의 역사 속에 살게 했습니다.

화폭에 담긴 눈물, 영원한 복음의 흔적이 되다

이 숨 막히는 헌신의 순간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며, 시대를 초월한 성경 묵상의 장이 되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파올로 베로네세가 남긴 대작 ‘시몬의 집에서의 잔치’를 보면,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호화로운 연회석 한가운데서 오직 한 여인만이 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주변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각자의 세속적 관심사에 빠져 있는 동안, 오직 그녀만이 하늘의 왕에게 온전한 경배를 올립니다. 훗날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역시 이 장면을 극적인 명암 대비로 화폭에 담아내며, 차가운 세상의 시선과 여인의 뜨거운 회개를 강렬하게 대조시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비효율적이었을 이 예술적 ‘낭비’의 산물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미술사적 증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쏟아부은 눈물과 헌신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원한 복음의 향기가 됨을 역설합니다.

오늘, 나의 깨어지지 않은 옥합을 마주하며

그렇다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옥합은 과연 무엇일까요? 장재형 목사는 그 옥합의 범위가 단순히 금전적 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움켜쥔 나의 진로, 황금 같은 시간,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 그 모든 것이 주님 발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각자의 옥합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죄인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만큼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의 죽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계산을 뛰어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권면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적당한 타협을 멈추고 오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효율이라는 이름의 계산기를 부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낭비를 선택할 때, 우리의 투박한 삶은 비로소 거룩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걸작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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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의 온기와 먹이는 사랑, 부활이 일상이 되는 기적에 대하여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숲의 가장 깊은 적막은 나뭇잎의 마찰음으로 깨진다고들 하지만, 내가 기거하는 숲속 마을의 고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창밖, 발톱의 미세한 긁힘과 마른 흙을 밟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기척을 확인하는 숨의 교환. 어느덧 스무 마리가 훌쩍 넘는 고양이 대가족이 숲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은 세계의 시작은 거대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연민이 베란다에 놓아둔 사료 그릇 하나, 그 작은 친절이 숲의 결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고독과 존재를 채우는 응시

그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 흰 고양이였습니다. 신비로운 외양과 달리 녀석은 무리 안에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따뜻한 밥자리에 발도 붙이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배회하던 녀석이 비를 피하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뻣뻣한 경계심 뒤로 느껴진 것은 지독한 허기와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료를 씹는 작은 소리와 사람의 손길을 확인하는 미묘한 망설임 속에서 나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거친 야생에서도 돌봄과 수용을 갈구하는 그 마음은, 실상 우리 인간의 영적 기갈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사유는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1장 강해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단순한 에필로그가 아닌, 부활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사명으로 응결되는 결정적 장면으로 읽어냅니다. “부활 이후의 세계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니라 동선이며, 신앙은 감상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그의 강조는 숲속 고양이에게 내밀었던 내 손길 위로 겹쳐졌습니다.

디베랴 새벽, 빈 그물을 채우는 말씀의 권위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허탈함은 성실하게 살아도 결과가 비어 있을 때 느끼는 실존적 무능을 상징합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를 떠올려 보십시오. 화면 속 제자들의 몸은 긴장으로 팽팽하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근육은 역동적이지만,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는 고요한 권위로 서 있는 예수가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인간의 분투가 한계에 부딪힐 때 비로소 열리는 ‘타자의 개입’을 시각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인간의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라고 정의하며, 제자들이 ‘더 열심히’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비로소 153마리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음에 주목합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어획량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비전입니다. 밤의 공허가 새벽의 충만으로 바뀌는 찰나, 그것은 인간이 자기 중심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시작되는 복음의 사건입니다.

정죄를 넘어 치유로 흐르는 반복의 리듬

부활하신 주님의 첫 사역이 화려한 설교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조반의 준비’였다는 사실은 눈물겨운 은혜입니다. 숯불의 온기와 빵의 냄새로 인간의 절망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 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물음은 베드로가 가졌던 세 번의 부인을 거울처럼 비추지만, 장재형 목사는 이 반복을 추궁이 아닌 ‘치유의 리듬’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처는 한 번의 선언으로 봉합되지 않기에, 사랑의 물음을 반복함으로써 실패의 기억을 회복의 통로로 재배치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큰 사랑(Agape)’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우정조차 버거워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주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조차 버리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자가 사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인정하며 사랑의 질문 앞에 울컥하는 자가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역설적인 힘입니다.

흩어져서 먹이는 삶, 교회의 살아있는 본질

마침내 주어지는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예수 사랑의 진위를 판별하는 실천적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먹인다’는 행위를 단지 양식을 주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상처 입은 자의 피를 닦아주고 미성숙한 자를 양육하는 전인격적 헌신, 즉 목양(Shepherding)으로 해석합니다. 예배당 안에 모이는 것(Gathering)도 중요하지만, 세상으로 흩어져서(Scattering) 굶주린 영혼을 먹이는 존재로 살아갈 때 교회는 비로소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눈이 다르게 생긴 고양이가 내게 몸을 비비며 신뢰를 보낼 때,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선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무리에서 소외되고 연약함 때문에 주저앉았던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받은 양들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처럼, 목양은 맞춰진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어긋난 사람을 사랑으로 길들이는 예술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수많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부활 신앙은 먼 곳의 기적이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외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소박한 동행에서 완성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이 이제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먹이는 삶’으로 번역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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