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 율법의 멍에를 벗고 은혜의 자유를 입다 (Olivet University)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남긴 거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거대한 대자연의 심연을 홀로 마주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인간의 뒷모습을 강렬하게 포착해 냅니다. 바위산 정상에 홀로 올라 발아래 펼쳐진 구름과 안개를 고독하게 굽어보는 그 단독자의 실존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절대적인 자율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근대 인간의 거대한 열망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주체적 독립의 정점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실재는 눈부신 해방이 아니라, 사방으로 정처 없이 일렁이는 자욱한 안개처럼 허무하고 아득한 존재론적 방랑과 깊은 영적 불안뿐입니다.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율의 충동이 어떻게 도리어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 무거운 속박이 되는지 이 예술적 풍경은 고요히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거룩한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는 장엄한 신학의 정점 또한,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오만한 자율의 시도가 어떻게 처절한 영적 속박과 종살이로 귀결되는지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서사에서 출발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등장하는 “두 여자의 비유”는 단순히 고대 교회의 특수한 교리적 분쟁을 수습하기 위한 과거의 낡은 기록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내밀한 영적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오래된 성경의 본문을 오늘의 척박한 강단 위로 생생하게 끌어올려 복음과 은혜, 행위와 율법의 거대한 소용돌이 사이에서 우리 영혼의 닻이 참으로 어디에 내려앉아 있는지를 엄중하게 되묻습니다.

존재의 근원적 비대칭성과 자녀의 신분으로 일어나는 영적 혁명

인간 실존이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자 조건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성에 놓여 있습니다. 말씀의 흐름이 영적으로 비추듯, 이 창조적 관계는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처럼 본질적으로 완벽한 비대칭성을 이룹니다. 태양은 해바라기의 실재 여부나 헌신과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하며 무한한 빛을 발산하지만, 해바라기는 태양이 위로부터 쏟아내는 따스한 빛과 은혜가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본질은 이 엄연하고도 엄숙한 진실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창조주를 향한 절대적 의존의 관계 속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는 이러한 창조적 의존을 강하게 거부하고, 스스로 자율과 독립을 선언하며 창조주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오만한 충동이 끊임없이 요동쳐 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역사적 문장을 인간 자율성 충동의 극단적인 표지로 읽어내며, 신의 부재를 선포한 그 비장한 자리에서 도리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공허와 처절한 파열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로 지적합니다. 영원의 실재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유한함은 결국 씻을 수 없는 불안과 정죄의 노예가 될 뿐이며, 이 무거운 속박은 오직 전적인 은혜의 빛 아래서만 진정한 자녀의 자유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인간 영혼이 겪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가장 깊은 뿌리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입니다. 이 비극적인 소외와 단절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거절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주인이 되려 했던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 보여준 역사적 사례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가 먼저 여호와의 살아있는 말씀을 가볍게 버렸을 때, 그 처절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이 완전히 끊어지며 비참한 영적 파멸과 공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이 깊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인류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들려줍니다.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내면에 거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심판자의 두려운 위엄 앞에서 공포에 떨며 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가장 친밀하고 다정한 언어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녀의 신분으로 담대히 일어서게 됩니다. 이 경이로운 호칭의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위로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신분 변화이며, 두려움의 종에서 사랑받는 아들로 옮겨지는 영적 혁명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고대의 조잡한 우상숭배나 현대의 세련된 기복주의, 공로주의, 성과주의가 겉모습만 바꾸었을 뿐 모두 인간을 조건과 점수의 세계에 묶어두는 율법주의의 다른 얼굴임을 폭로합니다. 그 잔인한 체제의 핵심은 인간을 끊임없는 자격 심사 아래 영원히 노예로 묶어두는 데 있기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갈라디아서 5장의 선언은 속박의 회로를 의지적으로 끊어내라는 강력한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조급함의 장막을 걷어내고 기다림의 미학으로 걷는 언약의 길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펼쳐지는 갈라디아서 4장의 비유는 우리 신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깊은 설득력을 획득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가정의 내부 이야기, 곧 여종 하갈과 자유하는 여자 사라,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이삭의 서사를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두 개의 언약을 상징하는 거대한 구속사의 드라마로 재해석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17장까지의 서사를 배경으로 살피면,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지만, 그 장엄한 선언 뒤에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길고 캄캄한 침묵의 시간이 뒤따랐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늙어가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깊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육체를 따라” 인간적인 해결책을 서둘러 도모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겨주는 인간적인 계산을 감행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수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 어떻게 흔히 무너지고 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거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카이로스의 때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유한한 능력과 눈앞의 계산으로 은혜의 결과를 강제로 앞당기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조급함의 순간, 거룩한 은혜의 질서는 차가운 인간 행위의 질서로 순식간에 변질되고 공동체는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약속을 바라보며 견디는 기다림의 미학을 포함하기에, 그 기다림이 무너지면 은혜의 순수한 표지였던 할례 같은 거룩한 상징이 어느새 구원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이 설교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순서의 전도야말로 우리 영혼 속에 독한 율법주의가 싹트는 치명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옛 이름을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시며 언약을 새롭게 하셨을 때 행해진 할례는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순종과 감사의 표지였을 뿐입니다. 은혜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 행위를 원인으로 삼으려는 모든 종교적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육체의 열매를 낳고 영혼을 깊은 불안의 수렁으로 밀어 넣을 뿐입니다.

땅의 예루살렘을 넘어 하늘의 도성이 선포하는 자녀의 자유

사도 바울은 이 극적인 비유의 상징적 대응을 서신 속에서 매우 명료하고 단호하게 제시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엄숙하게 주어진 율법 언약을 완벽하게 상징하며, 그 행위의 체제 아래서 태어난 자들은 결코 온전한 상속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종을 낳을” 뿐입니다. 사도는 하갈을 지리적으로 척박한 “아라비아의 시내산”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는 사도 당시의 막강한 종교적 권력이 지배하던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율법의 신성한 기원과 상관없이, 그것을 인간의 공로와 자격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강요하는 모든 종교적 기득권 체제가 결국 엄격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낼 뿐이라는 슬픈 진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유하는 여자 사라는 땅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찬란하게 상징합니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도성이자 어린 양의 거룩한 신부, 그리고 참된 자유인들의 공동체로 묘사되는 교회는 결코 땅의 방식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신실한 약속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녀를 낳아 자유케 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생물학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에게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기적처럼 태어난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방적이고도 완벽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정점입니다. 이사야 54장의 예언이 노래하듯이,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했던 척박한 여인의 자손이 도리어 땅의 유력한 자들의 후손보다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되는 이 은혜의 패턴은 오직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복음을 신뢰하는 모든 신자는 자신의 육체적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이삭과 같이 존귀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역사 속에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했듯이, 오늘날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도 행위와 성과를 앞세운 완고한 율법주의는 은혜 중심의 순수한 복음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정죄하려 든다. 이 치열한 영적 긴장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기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원리를 공동체의 중심에서 분명히 분별하고 치워야 합니다.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는 준엄한 명령은 특정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왜곡하는 거짓된 체제를 단호히 배제하라는 신학적 요청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이 맺어내는 사랑의 열매와 영원한 안식

이 장엄한 구속사적 비유는 자연스럽게 갈라디아서 5장이 선포하는 기독교 자유의 위대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는 바울의 선포 속에서 자유는 결코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책임을 해체해 버리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를 짓누던 모든 정죄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사랑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해 내는 창조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단호히 벗어던져야 할 “종의 멍에”는 단지 고대의 할례 규정만을 뜻하지 않으며, 인간의 공로주의, 도덕적 완벽주의, 성과 중심의 신앙, 그리고 경건의 외형적인 형식에만 집착하느라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모든 종교적 강박과 내면의 두려움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복음이 선물하는 진정한 자유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역동적인 안식으로 확인됩니다.

이 과정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모든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묵묵히 걸어가게 만듭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아 날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영광스러운 날 완성에 이르게 되는 소망의 서사입니다. 이 역동적인 과정에서 가시적으로 맺히는 결실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짜내어 만드는 고단한 업적의 목록이 결코 아니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넘치는 증거이자, 은혜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결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무서운 유혹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대개 “더 거룩해지자”는 경건한 구호로 시작되지만, 어느새 “더 많이 행하라”는 율법적 압박으로 기울어지며, 결국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점수의 종교로 회귀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진리를 교묘하게 교란하고 인간의 행위를 섞으려는 세력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문제는 성례나 규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격상시키는 치명적인 오용에 있습니다. 만일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완전하고도 충족적인 효력을 손상시키는 일이며, 결국 “은혜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길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서의 신학적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 바로 그 절대적인 결론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모든 종교적 짐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며, 신앙의 중심축을 언제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복음의 능동태 위에 굳건히 두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진정한 자유의 종착지는 놀랍도록 명쾌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이 그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는 이기적인 자기 해방을 넘어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한 명령 속에 온 율법이 요약된다는 사도의 통찰은, 은혜가 율법을 무가치하게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원리를 통해 그 본질적 정신을 완성함을 뜻합니다. 교회가 이 사랑의 원리를 잃어버릴 때 공동체는 순식간에 서로를 채점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지옥”으로 변질되지만, 교회가 서로의 짐을 져주는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때 “위 예루살렘”의 질서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신앙의 출발점을 “내가 해야 한다”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로 옮겨 놓는 일, 곧 은혜를 원인으로, 우리의 행위를 그 결과로 명확히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혈통이나 업적이 아닌 약속의 자녀에 둘 때 섬김이 강요가 아닌 기쁨으로 변화되며,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숨는 종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오는 자녀가 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의 모든 논의는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갈의 장막입니까, 사라의 품입니까. 행위와 자격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체제 속에서 불안과 우월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값없이 주어진 은혜 위에서 자유와 감사의 깊은 호흡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이 실존적 질문 앞에서 갈라디아서의 비유는 더 이상 고대의 낡은 사례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을 남김없이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됩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충족성을 신뢰하고, 성령의 조용한 인도에 귀 기울이며,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작은 걸음 속에서 그 위대한 자유의 여정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복음의 영원한 약속을 붙들고 종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진 당신의 발걸음은, 이제 어떤 사랑의 열매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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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반석 위에 종말의 일상을 세우다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943년, 나치의 테겔 형무소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감방에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옥중 서신은 차가운 교리 문답이나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절망적인 시대 한복판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피 끓는 고백이자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성경 속 사도 바울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남긴 서신들을 텅 빈 진공 상태에서 빚어진 이론으로 읽지 않고, 박해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거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설교는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사도행전의 흙먼지와 땀방울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며, 박제된 문자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되살려낸다.

상처 입은 역사의 현장에서 피어난 복음의 서사

바울서신을 사도행전이라는 입체적인 무대 위에 겹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공중에 붕 떠 있던 말씀이 땅으로 내려와 걷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도가 특정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조언과 권면들은 결코 한가로운 학문적 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상과 시장, 경제적 궁핍과 노동, 그리고 성도 간의 뼈아픈 갈등이라는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골로새 교회에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충만과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한 이유 역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자 했던 절박함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학은 이론을 위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치열한 목회의 사건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장재형 목사의 시선은, 성경의 교리와 역사의 서사가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생명의 나침반이 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닻, 그 위에 돛을 올린 종말의 시간

사도 바울의 고단한 발걸음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관통하여 황제 숭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린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가 회당에서 전한 핵심은 정교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오직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누군가는 벅찬 믿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기심에 불타오른 일부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을 습격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잔혹한 프레임을 씌웠다. 밤을 틈타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던 긴급한 압박과 환난의 풀무질 속에서 막 태어난 교회는 폭풍 속에 남겨졌다. 골로새서가 만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 혹독한 위기 속에서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역사는 어디로 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론을 반석으로 삼고,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 종말론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한다.

은혜가 허문 담장, 평강이 피워낸 일상의 순종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띄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혜는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숭고한 사랑이며, 평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가 이웃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샬롬이다. 철저한 회개를 거쳐 은혜를 경험한 자는, 에베소서의 선언처럼 나와 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 위대한 복음의 사역은 특출난 영웅 한 사람의 독주가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 입은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동역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시대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본문의 맥박을 짚어내는 정직한 읽기의 윤리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히브리서가 서두의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거대한 신학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것은, 복음이 가진 진리의 무게가 텍스트의 외형마저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경을 단순히 나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확증의 도구로 소비하거나, 내 입맛에 맞게 편식하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본문이 지닌 고유한 문학적 논리를 세밀하게 살피고, 이천 년 전 당대의 역사적 장면이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관습과 종교적 표현이 원래 어떤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습관이 바로 깊은 성경 묵상의 출발점이다. 문학과 역사, 신학과 목회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태도는 낡은 종이 위의 활자를 오늘 나와 공동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수의 강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에 성실의 씨앗을 심는 영성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다가올 미래의 날짜를 예측하는 자극적인 신비주의나, 세상을 등진 채 하늘만 바라보는 냉소적 도피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역사의 뚜렷한 목적을 묻고, 환난 중에도 오늘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도록 돕는 인내의 묵직한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절대 변치 않는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근면과 절제, 형제 우애와 순종의 윤리로 치열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 다가올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되, 두 발은 내가 서 있는 땅에 굳게 딛고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상을 이긴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조급함에서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박한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정작 세상을 해석할 참된 지혜는 메말라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섣부른 종말론은 반드시 길을 잃고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위기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는 얄팍한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 주님이 남기신 신실한 약속의 기억이다. 교리가 머리의 지식으로만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의 따뜻한 체온으로 건너갈 때, 데살로니가의 핍박받던 젊은 교회가 지켜냈던 그 푸른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다시 맥동할 것이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을 마친 지금, 당신의 남겨진 일상 한가운데에는 십자가의 흔적과 종말을 살아가는 성실함이 어떠한 모양으로 새겨지고 있는가? 이 엄숙하고도 다정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쓰인 또 한 통의 눈부신 서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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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세리와 죄인을 향한 복음

1. 복음과 사랑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이 왜 ‘사랑’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왜 복음은 곧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장’이라 부르는 성경학자들의 말대로, 그 안에는 구원과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본질은 삶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 곧 우리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흥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그 실천적 내용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어떤 교리나 신앙 체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삶으로 보이신 복음은, 말 그대로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장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도바울이 도시인의 언어로 표현한 이 ‘사랑장(章)’은, 사랑의 속성을 매우 논리적이고 해설적으로 풀어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는 말씀(고전 13:4 이하)은, 세상 도처에서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도덕적 가르침이나 예의범절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구절을 통해, 사랑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적 측면을 담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말씀은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 또한 주를 완전한 사랑으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가르치듯이, 복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시작되며, 그 대상은 모든 이, 심지어 세리와 창기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그 낮추심과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먼저 열리고,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때로는 먼저 지적으로 깨달음이 와서 마음이 열릴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이 먼저 열려서 지적인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과 이성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숙고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틀이나 습관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역사 속 사례 중 유명한 예로, 폼페이(Pompeii)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묻혔을 때, 어미가 아이를 품고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의 본능적 희생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성은 자기 보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올 때, 서로 양보하기보다는 자신이 빛과 양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생존 경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자연적 본성과 달리, ‘자기 희생’을 통해 다른 생명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는 행동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최정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 없이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종종 설교나 강연에서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몸소 보여주신 행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지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은 가장 궁극적 형태이며,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특히 한자로 ‘희생(犧牲)’이라 쓸 때 ‘소’(牛)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도 해석하는데, 소가 평생 밭을 갈고, 자기 힘을 다해 주인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고기, 가죽, 뼈, 심지어 꼬리까지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가 생애를 다해 주인을 섬기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행사가 아닌, 정말 우리가 곁에서 직접 보는 낮은 자리에서의 헌신,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3:1).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배신이나 거부,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감싸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교훈이나 위안이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때,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저변에는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대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곧 ‘복음’인가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의 선언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 삶에서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듯 ‘발 벗고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과 세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가르쳐온 바,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근거로,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복음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99라는 다수를 중시합니다. ‘하나보다 아흔아홉이 더 중요하다’는 이 세상의 평범한 계산식에 길들여져 있으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자원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는 그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 세리와 죄인의 복음

누가복음 15장은 바로 이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란 단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류를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식사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익숙했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구별됨’을 강조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들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심지어 죄인들과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낯선 접촉’을 통해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멀리서 “너희는 죄인이니 당장 회개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죄로 물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원 의지와, 회복된 후에 함께 기뻐하는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데서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5:7). 이는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창기는 당시 율법 체제에서 가장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폄하되었고, 창기는 성적인 죄로 가장 경멸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았던 만큼 용서를 받았을 때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그 감사가 결국 삶의 완전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처럼(롬 5:20), 회개한 큰 죄인이 느끼는 은혜와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풍조는 때때로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이런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여, 더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 더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방치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낮은 곳을 향한 관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올리벳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사랑’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선교적 접근에서, 복음은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deed(행동)가 따라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복음 사역을 확장해나갈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고, 그들과 밥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애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바쁜 일상, 혹은 우리의 이기심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장벽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재정적인 자원이 풍성해질수록, 자칫하면 ‘잃어버린 자 한 명’보다 ‘이미 모인 많은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역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5장 5절, 6절을 보면,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그 양을 되찾았을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이는 그저 물건 한 점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생명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단지 도덕적 반성이나 형식적 죄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며, 그 속에는 자신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는 그 죄된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의 심각성, 그리고 자신이 그 죄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을수록, 감사와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 사람은 복음의 힘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범할 것이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사랑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죄로 쓰러져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 사용하여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다른, 복음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가 당연한 질서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서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신뢰가 우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닫힌 집이 아니라, 늘 열려 있고, 새로운 기회를 제시해주며,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의 그늘진 곳, 가난하고 병든 자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이주민 등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리와 죄인의 복음’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많은 재정과 자원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성공’을 인정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이웃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때로는, 조직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의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지에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역을 펼치며,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내년 교회 30주년을 맞아 가난한 나라에 300개의 학교를 지어주자”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목적이 단지 ‘건물 건립’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의 실제적 혜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교육받고, 질병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는 단순한 선교 프로젝트를 넘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복음’의 실천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세계입니다. 한 명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뒤로 남겨두는 세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세계, 죄인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말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은 단지 범죄자들이나 특정한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나는 의인이니,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된 ‘잃어버린 양’이었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던진 질문 중, “우리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찰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늘리는 일, 교인 수나 헌금을 늘리는 일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일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사랑의 수고를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자기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즉,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 용서의 기쁨을 서로에게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세리와 죄인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 큰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받아 더 큰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혁명적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것처럼,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요청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을 깨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사명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복음 공동체라면, 그들을 찾아다니며 보살펴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세리도, 사랑에 실패한 창기도, 삶에서 방황하는 청년도, 병실에서 고통받는 환자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영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힘 있게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 감동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하늘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세리와 죄인의 복음’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시금 깊이 깨닫길 간절히 소망하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사회와 선교지 곳곳에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길 호소합니다. 도시와 농촌,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를 막론하고,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소명을 감당할 때, 결국 복음은 삶으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죄인들이 회개와 용서,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격하고, 함께 구원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듣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까지 품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이, 실은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할 사명의 핵심이며,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헌신자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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