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소리 없이 방향을 틀어, 1453년 5월 29일 찬란했던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던 그 비극적인 순간은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영원히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만을 세상에 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신약 성경의 생명력 넘치는 초대 교회들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찬란한 비잔티움 기독교 문화가 꽃을 피우며 번성했던 그 거룩한 땅이,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지배 질서 안으로 속절없이 넘어가게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명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깊은 영적 설교는 바로 이 비극적인 함락의 장면에 멈춰 서지 않고,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신약 성경 속 고대 도시들의 구석구석에 선명하게 새겨진 사도 바울의 열정적인 선교 발자취와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눈부신 흔적들을 조용히 따라갑니다. 단순한 과거의 유적지나 폐허가 된 낯선 지명을 답사하는 호기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연 살아 있는 복음이라는 거대한 능력이 어떻게 당시 타락한 도시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오늘날 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의 풍요 속에서도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뜨거운 첫사랑을 목숨 걸고 지켜내야만 하는지 우리의 영혼을 향해 엄숙하게 묻습니다.
오늘날 터키라는 지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 아나톨리아의 거친 땅 위에는 찬란한 역사를 품은 에베소와 갈라디아, 라오디게아와 버가모, 비시디아 안디옥과 드로아, 골로새와 서머나 같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성경의 도시들이 눈부시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대 도시들은 단순히 사도 바울이 거쳐 지나간 무대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땀방울이 머물고 목숨을 건 교회가 세워졌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울 같은 믿음과 세상의 썩어질 우상 숭배, 값없는 은혜와 인간의 교만한 자기 확신이 피 터지게 충돌했던 치열한 영적 전쟁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 도시들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먼 옛날의 낡은 지도를 펼쳐보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위태로운 신앙이 과연 어떤 반석 위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거룩한 성경 묵상입니다.
복음은 도시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에베소는 거대한 상업의 물결과 음란한 종교 의식이 함께 뒤엉켜 소아시아의 경제와 문화를 쥐락펴락하던 중심 도시였습니다. 시내 한복판에 웅장하게 솟아 있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온 도시의 명성과 막대한 경제적 부를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각종 마술과 주술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을 교묘하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영적 어둠의 요새 같은 곳에 약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머물며 생명의 복음을 거침없이 선포했고,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예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먹고사는 생업의 현장까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이 도시의 거대한 우상 숭배 질서와 정면으로 거칠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한 도시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절대적으로 믿고 무엇을 삶의 가치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중심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목숨처럼 의지하던 수많은 마술책들을 한곳에 모아 불길 속에 던져 넣는 극적인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되어 쓸모없어진 낡은 물건들을 정리해 없애는 단순한 행위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든든하게 붙들어 주리라 맹목적으로 믿었던 세상의 힘을 스스로 내려놓고, 이제는 삶의 중심을 오직 하나님께 새롭게 정하겠다는 철저하고도 두려운 회개의 확실한 표지였습니다. 진정한 복음이란 단순히 인간의 지식 창고에 고상한 문장 하나를 더 보태어 주는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삶의 의지하던 잘못된 토대를 과감하게 바꾸고 내 인생의 걸어가는 방향을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돌이키게 만드는 강력한 영적 능력입니다.
이방 땅 갈라디아에서는 율법과 믿음, 눈에 보이는 할례와 영원한 구원의 문제가 교회 안팎의 가장 뜨거운 중심 질문으로 거세게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자신의 훌륭한 외적인 종교적 표지나 썩어질 전통을 앞세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없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만 값없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목소리 높여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또 다른 무거운 종교적 규범이나 굴레를 억지로 부과하는 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의 수많은 교회들은 참된 복음이 인간의 좁은 민족적 편견과 관습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소식임을 온 세상에 보여 주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역사적인 제1차 선교 여행 도중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문이 활짝 넓어진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드로아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케도니아를 향한 전혀 새로운 선교의 길이 극적으로 열렸고, 바울은 자신이 익숙하게 머물던 안식의 영역을 과감히 떠나 푸른 바다를 건너는 모험에 나섰습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서로에게 보내진 편지를 기쁘게 나누어 읽으며 멀리 떨어진 한 교회가 받은 생명의 말씀을 이웃 공동체와 아낌없이 공유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세상의 도시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각각 세워나갔지만, 결코 그 교회들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외딴섬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촘촘히 엮어 놓았습니다.
성령이 머문 자리에는 완전히 다른 삶의 문화가 자라났다
드로아에서 시작되어 바다를 건넌 선교의 발걸음은 마침내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당시 강력한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바울은 영광스러운 유럽 대륙의 첫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 거룩한 시작점에는 멀리서 온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신실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해진 생명의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인 루디아는 사랑하는 온 가족과 함께 기쁨으로 세례를 받은 즉시, 자신의 개인적인 집을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아낌없이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거대한 석조 제구나 화려하게 치장된 웅장한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한 사람의 뜨거운 마음과 활짝 열린 평범한 가정집에서 참된 교회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차디찬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갇힌 채 온몸에 쇠사슬이 묶여 있으면서도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거룩한 하나님을 향해 큰 목소리로 불러 올렸던 감격적인 찬송은, 빌립보 성도들이 가진 신앙의 깊이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입니다. 삶의 고난과 핍박이 완전히 사라진 안전한 뒤에야 비로소 안도하며 부른 노래가 아니라, 숨이 막히는 고난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거룩한 찬송의 소리는 두려움과 절망이 짙게 지배하던 어두운 감옥을 단숨에 하늘의 영광이 가득한 예배의 자리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깊이 조명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감정만 고조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세상의 환경에 이끌려 무너너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도록 인간의 영혼의 중심을 새롭게 붙들어 주는 하늘의 힘입니다.
빌립보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향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섬기고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는 거룩한 가르송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헛된 영광을 최고로 추구하던 당시의 각박한 문화 속에서, 내 것을 내려놓고 연약한 자를 돌보며 가진 소유를 기쁘게 나누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분명히 낯설고 신비로운 질서였습니다. 참된 복음은 성도들을 세상의 도시에서 도망쳐 외딴 산속에 홀로 숨어 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악이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 당당히 머물면서도,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지적으로 세워 나갔습니다.
에베소의 뜨거운 변화 역시 단순한 외형적 종교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우상과 헛된 마술을 과감히 내버린 사람들은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고, 눈에 보이는 썩어질 물질적 욕망보다 영원한 사랑과 평화를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용했던 십자가와 물고기, 선한 양과 포도나무 같은 다양한 신앙의 상징들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되었고, 이후의 기독교 미술과 성화, 웅장한 교회 건축에도 깊은 기독교적 주제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솜씨로 빚어낸 미술과 건축의 화려한 변화보다 훨씬 더 앞서서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바로 완악했던 사람의 마음과 상처 입은 관계의 근본적인 회복이었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의 풍요 속에서도 영적으로 가난해진다
과거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었던 거룩한 도시였다고 해서, 그곳의 뜨거운 믿음이 세월이 흘러도 저절로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에베소 교회는 수많은 영적 수고와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주님을 향한 처음의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뼈아픈 책망을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보기에 바른 일들을 계속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왜 내가 이 거룩한 일을 처음 시작했는지 그 초심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고, 교회의 거대한 외형과 전통을 악착같이 지켜내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에서 진정한 사랑이 차갑게 식어 사라질 수 있다는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당시 상업과 눈부신 금융 발전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한 채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 머물러 매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가진 것이 많고 부유하다는 객관적사실이 결코 그 영혼의 영원한 충만함을 조금도 보증해 주지 않았으며,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오만한 자기 확신은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눈멀고 벌거벗었는지 영적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겪었던 첫사랑의 상실과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졌던 미지근한 영적 나태함은 겉보기에는 서로 전혀 다른 모습처럼 비쳐지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두 살아 있는 복음이 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한참 밀려나 버린 비참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버가모는 온 세상에 황제 숭배와 타락한 우상 숭배가 거세게 몰아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믿음을 끝까지 지킨 거룩한 이들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공동체 내부에는 서서히 도덕적 타락과 잘못된 가르침의 누룩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고난의 상징이었던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세상의 박해와 헐벗은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을 끝까지 지키라는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한 교회는 세상의 썩어질 풍요 속에서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버렸고, 다른 교회는 매서운 환난의 불길 속에서도 오히려 영적으로 더 환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깊이와 영적 가치는 그 도시가 누리는 물질적 번영이나 삶의 편안함의 크기로 결코 측정될 수 없습니다.
이 엄숙한 성경의 기록들은 고대 교회들의 과거 잘못을 앉아서 차갑게 평가하고 심판하기 위해 주어진 인류의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 각자의 성도가 거울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비추어 보게 만드는 영적 거울입니다. 내가 처음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복음을 들었을 때 가슴 뛰던 그 뜨거운 사랑이, 어느덧 메마른 의무감만 앙상하게 남은 율법적 습관으로 굳어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일상의 풍요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사보다 영적 무감각과 교만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이 주는 외부의 커다란 위협보다 내 안의 영적 타협이 훨씬 더 깊은 영혼의 균열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비록 세상의 화려한 도시는 결국 언젠가 흉물스러운 폐허로 무너져 내릴 수 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처음 사랑을 끝까지 회복하라는 그 거룩한 말씀의 생명력은 결코 영원히 폐허가 되지 않습니다.
제국의 거대한 성벽이 무너진 뒤에도 복음의 영원한 질문은 남는다
11세기 말 이후 거친 아나톨리아의 역사는 참으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전환의 소용돌이를 맞이했습니다. 1071년에 벌어진 치열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용맹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비잔티움 제국의 방어 군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이후, 비잔티움은 동부의 광활한 영토를 점차 속절없이 잃어버렸습니다. 서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잃어버린 기독교 세력의 영광을 기적적으로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명목으로 시작되었으나, 1204년에 벌어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무자비한 점령과 약탈은 오히려 같은 기독교 제국을 치명적으로 크게 약화시키는 자멸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1261년에 비록 수도를 우여곡절 끝에 다시 되찾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비잔티움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적 방어력은 깊이 쇠잔해진 상태였습니다.
13세기 말부터는 강력한 오스만 투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 전체에서 거침없이 세력을 넓혀 나갔고, 비잔티움 제국의 남은 영토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거대한 수도와 그 주변의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지역들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마침내 역사적인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정예 군대가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거대한 대포들을 대거 동원하여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참히 무너뜨리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천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상징이었던 웅장한 성 소피아 대성당이 하루아침에 이슬람의 사원으로 극적으로 전환된 역사적 사건은, 아나톨리아 땅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표지가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시행했던 독특한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소수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종교적으로 제한적인 자치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으나, 사회의 거대한 중심무대에서는 점차 밀려나 주변부로 전락했습니다. 한때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힘차게 전파하고 수많은 초대 교회가 눈부시게 성장했던 그 거룩한 땅은, 긴 세월의 흐름을 지나 이슬람 중심의 지역으로 완전히 변모했습니다. 이 엄숙한 역사의 흐름은 교회의 외적인 거대한 규모나 화려한 정치적 힘이 결코 그 안에 담긴 믿음을 영원히 보존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뼈저리게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세운 제국과 웅장한 건축물은 당대에 너무나 강하고 견고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의 거룩한 중심도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신약 성경의 고대 도시들과 터키 기독교의 기나긴 역사를 언제나 함께 나란히 바라보는 까닭은, 단순히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막연히 그리워하며 한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처절한 회개와 빌립보 감옥의 감격스러운 찬송, 서머나 교회의 눈물겨운 인내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믿음의 현장 안으로 생생하게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살아 있는 복음은 단순히 어느 시대 어느 도시에 한때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저절로 보존되지 않습니다. 매 시대마다, 매 순간마다 누군가가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듣고, 그동안 잘못 의지해 왔던 세상의 헛된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좁은 길을 기꺼이 선택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현재가 됩니다.
에베소의 차갑게 부서진 돌기둥들과 라오디게아의 쓸쓸한 폐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를 품은 낡은 성벽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아주 오랜 옛날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없는 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주는 가장 깊고 날카로운 질문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유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지금 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과연 무엇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 있으며, 내가 속해 있는 이 믿음의 공동체는 과연 어떤 영적 문화를 매일 세상 속에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복음이 쓸쓸히 스쳐 지나간 과거의 도시들의 낡은 흔적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오늘 이 거친 세상의 한복판에서 다시 한번 첫사랑을 거룩하게 선택하며 주님의 복음이 새롭게 머물러 살아 숨 쉴 또 하나의 거룩한 도시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