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세리와 죄인을 향한 복음

1. 복음과 사랑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이 왜 ‘사랑’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왜 복음은 곧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장’이라 부르는 성경학자들의 말대로, 그 안에는 구원과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본질은 삶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 곧 우리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흥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그 실천적 내용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어떤 교리나 신앙 체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삶으로 보이신 복음은, 말 그대로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장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도바울이 도시인의 언어로 표현한 이 ‘사랑장(章)’은, 사랑의 속성을 매우 논리적이고 해설적으로 풀어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는 말씀(고전 13:4 이하)은, 세상 도처에서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도덕적 가르침이나 예의범절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구절을 통해, 사랑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적 측면을 담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말씀은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 또한 주를 완전한 사랑으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가르치듯이, 복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시작되며, 그 대상은 모든 이, 심지어 세리와 창기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그 낮추심과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먼저 열리고,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때로는 먼저 지적으로 깨달음이 와서 마음이 열릴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이 먼저 열려서 지적인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과 이성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숙고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틀이나 습관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역사 속 사례 중 유명한 예로, 폼페이(Pompeii)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묻혔을 때, 어미가 아이를 품고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의 본능적 희생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성은 자기 보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올 때, 서로 양보하기보다는 자신이 빛과 양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생존 경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자연적 본성과 달리, ‘자기 희생’을 통해 다른 생명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는 행동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최정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 없이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종종 설교나 강연에서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몸소 보여주신 행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지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은 가장 궁극적 형태이며,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특히 한자로 ‘희생(犧牲)’이라 쓸 때 ‘소’(牛)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도 해석하는데, 소가 평생 밭을 갈고, 자기 힘을 다해 주인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고기, 가죽, 뼈, 심지어 꼬리까지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가 생애를 다해 주인을 섬기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행사가 아닌, 정말 우리가 곁에서 직접 보는 낮은 자리에서의 헌신,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3:1).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배신이나 거부,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감싸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교훈이나 위안이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때,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저변에는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대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곧 ‘복음’인가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의 선언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 삶에서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듯 ‘발 벗고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과 세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가르쳐온 바,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근거로,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복음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99라는 다수를 중시합니다. ‘하나보다 아흔아홉이 더 중요하다’는 이 세상의 평범한 계산식에 길들여져 있으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자원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는 그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 세리와 죄인의 복음

누가복음 15장은 바로 이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란 단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류를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식사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익숙했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구별됨’을 강조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들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심지어 죄인들과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낯선 접촉’을 통해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멀리서 “너희는 죄인이니 당장 회개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죄로 물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원 의지와, 회복된 후에 함께 기뻐하는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데서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5:7). 이는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창기는 당시 율법 체제에서 가장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폄하되었고, 창기는 성적인 죄로 가장 경멸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았던 만큼 용서를 받았을 때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그 감사가 결국 삶의 완전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처럼(롬 5:20), 회개한 큰 죄인이 느끼는 은혜와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풍조는 때때로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이런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여, 더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 더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방치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낮은 곳을 향한 관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올리벳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사랑’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선교적 접근에서, 복음은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deed(행동)가 따라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복음 사역을 확장해나갈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고, 그들과 밥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애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바쁜 일상, 혹은 우리의 이기심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장벽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재정적인 자원이 풍성해질수록, 자칫하면 ‘잃어버린 자 한 명’보다 ‘이미 모인 많은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역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5장 5절, 6절을 보면,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그 양을 되찾았을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이는 그저 물건 한 점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생명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단지 도덕적 반성이나 형식적 죄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며, 그 속에는 자신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는 그 죄된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의 심각성, 그리고 자신이 그 죄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을수록, 감사와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 사람은 복음의 힘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범할 것이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사랑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죄로 쓰러져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 사용하여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다른, 복음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가 당연한 질서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서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신뢰가 우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닫힌 집이 아니라, 늘 열려 있고, 새로운 기회를 제시해주며,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의 그늘진 곳, 가난하고 병든 자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이주민 등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리와 죄인의 복음’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많은 재정과 자원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성공’을 인정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이웃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때로는, 조직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의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지에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역을 펼치며,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내년 교회 30주년을 맞아 가난한 나라에 300개의 학교를 지어주자”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목적이 단지 ‘건물 건립’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의 실제적 혜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교육받고, 질병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는 단순한 선교 프로젝트를 넘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복음’의 실천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세계입니다. 한 명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뒤로 남겨두는 세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세계, 죄인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말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은 단지 범죄자들이나 특정한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나는 의인이니,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된 ‘잃어버린 양’이었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던진 질문 중, “우리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찰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늘리는 일, 교인 수나 헌금을 늘리는 일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일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사랑의 수고를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자기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즉,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 용서의 기쁨을 서로에게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세리와 죄인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 큰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받아 더 큰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혁명적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것처럼,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요청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을 깨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사명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복음 공동체라면, 그들을 찾아다니며 보살펴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세리도, 사랑에 실패한 창기도, 삶에서 방황하는 청년도, 병실에서 고통받는 환자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영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힘 있게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 감동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하늘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세리와 죄인의 복음’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시금 깊이 깨닫길 간절히 소망하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사회와 선교지 곳곳에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길 호소합니다. 도시와 농촌,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를 막론하고,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소명을 감당할 때, 결국 복음은 삶으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죄인들이 회개와 용서,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격하고, 함께 구원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듣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까지 품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이, 실은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할 사명의 핵심이며,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헌신자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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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아담과 그리스도

1.  아담 한 사람의 죄와 그 영향

로마서 5장 12-2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여 아담과 그리스도를 극명히 대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가 우리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문이라고 강조한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고, 그 결과 사망이 만인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와 생명이 임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로마서 5장 12-21절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신학적 개념은 ‘원죄(original sin)’이다. 장재형목사는 원죄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반발, 즉 “왜 내가 죄 지은 적이 없는데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느냐”라는 항변을 자주 언급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범죄가 어떻게 자기 책임으로 전가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라는 폭군 같은 권세가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오늘날 인류가 사망의 그늘 아래 살고 있음을 구체적인 예로 든다. 만약 우리 본성이 갈망하는 에덴동산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었다면, 지금의 세계가 고통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원치 않는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고, 그것이 우리를 폭군처럼 억압한다. 설사 “인간은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니 죄인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나와 상관있다고 성경이 말하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해도, 성경은 그 시작점이 아담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즉, 아담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리를 바울이 설명할 때, 율법과 죄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덧붙여 말한다. 로마서 5장 13절에 따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율법은 모세 이후에 주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죄 자체는 이미 존재했다. 단지 법적 기준으로 ‘죄’가 확정되지 않았을 뿐이며, 모세 율법이 제시된 이후라야 죄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나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이미 그것은 ‘죄’이지만, 명문 율법이 없었기에 ‘법을 어겼다’는 식의 개념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다 해도 죄는 계속 존재했고, 율법은 죄를 죄로 더 분명히 인식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율법 자체가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율법으로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 주목하면서, 비록 아담처럼 직접 금지된 열매를 먹은 행위는 하지 않았어도 그 죄의 결과로서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죄론’이 갖는 무게이다. 한 사람 아담이 머리가 되어 범죄에 들어갔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그 죄의 영향력 아래 태어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이 대목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일컫는 부분을 특히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온 것처럼,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생명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아담이 상징하는 ‘옛 사람’에 속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새 사람’에 속할 것이냐를 묵상해야 한다.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강조한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구원이 전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전가(imputation)’라는 신학적 개념을 장재형목사는 다시 한번 자세히 풀이한다. 우리가 직접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넘어왔고, 반대로 우리의 의로움이 전혀 없음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처럼 죄의 전가(original sin)와 의의 전가(Christ’s righteousness)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철저히 신적인 주권과 은혜에 의한 사건이다.

이와 연동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5-47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난 육의 존재이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신령한 분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산 영(a living being)이라면, 둘째 사람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놓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므로, 두 대표자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대표성에 대해 “대표이론(Doctrine of Representation)” 혹은 “연합이론(Principle of Representation and Corporate Solidarity)”으로 설명한다.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범죄가 전가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그분의 의가 전가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구조적으로 서로 얽혀 있듯이,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순종은 그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띤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상의 예시로도 풀어낸다. 가령,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을 때, 어떤 부족 문화권에 사는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름이 아니라 부족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그 공동체와 ‘연대’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영적 차원에서 아담의 ‘머리됨’ 아래 한 몸체로 연대되었기에,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를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머리(new head)가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그분이 이루신 의의 공로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종자 개량론”이라고 비유적으로도 설명한다. 이사야서 53장 10절에서는 고난의 종이 죽지만 씨를 본다고 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종자’가 나타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아담’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핵심적이고 으뜸 되는 죄는 불신앙(unfaith)과 불순종(disobedience)이다. 아담에게서 드러났던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믿지 않고 어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만약에 아담이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다면, 사망과 죄의 지배가 인류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불신앙의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지만,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대표이론, 그리고 연합의 원리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려면 먼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못 박혀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얻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본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적이고 죄된 생명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갈라디아서2장 20절). 그럴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된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역시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설명한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온 인류가 복을 받는 언약이 주어졌고, 동일한 원리로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전가했고, 예수 한 사람이 의를 전가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장면에서도,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라는 언급이 나오듯이, 죄와 복은 결코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온 공동체와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연대적 결과를 낳는다.

민수기 16장 고라의 반역 사건에서, 고라의 죄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소유까지 전부 징벌받는 장면은 대표이론과 연대성의 무시무시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수아서 7장의 아간의 범죄에서도 아간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이 돌로 쳐서 불태워진다. 그들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이유는 죄의 연대적 파급 효과를 두려워했고, 죄가 공동체 전체에 미칠 영향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암소와 염소와 양을 쪼개어 놓고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고난을 받는다”라고 예언하셨는데, 이는 언약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의 작은 순종 혹은 불순종, 완전함 혹은 미흡함까지도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 부분이 후대에 결과적으로 연결되어 나간다. 이처럼 한 개인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개인 이상으로 공동체와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불러오는 여파가 후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대표이론이 갖는 무시무시함이자 동시에 복된 약속이기도 하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는 장면도 바울이 말하는 대표성과 공명한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온 백성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의 기도로 인해 하늘이 열리고 닫힌다는 사실은 한 개인의 위치와 권세가 결코 개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로마서 5장 20-21절에 이르러, 바울은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려 온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 “생명과 영생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죄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던 세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로 바뀐다. 이로써 인류가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서 고통받던 낡은 역사는 지나가고,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새 역사가 열린다(고린도후서 5장17절).

장재형목사는 결국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아담 안에 속한 옛 본성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새 본성이냐를 묻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 안에 살 때 우리는 의와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바울이 말하는 대표이론과 연대성은 그저 난해한 교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 아니면 은혜의 지배를 받고 사느냐를 결정짓는 실제적인 문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넘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며, 아담의 죄와 정죄가 걷어낼 수 없었던 깊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2.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와 구원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강조되는 주제는 아담과 결정적으로 대조되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새 아담’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앞서 아담이 죄의 문을 열어 죽음과 파멸이 임하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의와 생명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여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5-19절에서 ‘한 사람(아담)의 범죄’와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을 명확히 대비시킨다. 죄와 불순종이 지배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의와 순종이 확립되었고, 그로 인해 죄인이었던 자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반복적으로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전가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이루신 결과를 우리가 ‘공로 없이’ 전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 은혜의 정수다.

이러한 사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으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을 초래했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도야말로 복음서와 사도서신 전반에 깔린 핵심 줄거리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한 개인의 죽음과 부활 이상이며, 모든 인류의 머리(대표)로서 죄가운데 있는 자들을 대신해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나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을 받나? 내가 못한 것을 예수님이 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적용되느냐?” 하고 묻는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대표이론”과“연합의 원리”가 해답을 제시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인간은 본래 아담과 죄의 연대 속에 태어나 죄의 종속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새 대표자가 되셔서 그 죄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움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시인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장재형목사는 ‘종자의 근본적 변화’로도 설명한다. 마치 씨앗 자체가 새롭게 바뀐 것이기에, 이제는 다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7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해 왕 노릇했다면,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두고 사망과 죄가 왕 노릇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은혜와 의가 왕 노릇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다고 해석한다. 바울은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사람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새 생명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스리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죄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우리를 의와 생명의 왕권 아래로 이끌어,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누리게 하는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다시 끌어온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는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지만, 떨어진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삶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친히 요한복음 15장 9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초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 영적 성장과 풍성함의 필수 열쇠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대표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라고 부른다. 연합은 그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문제이기에, 교회가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의와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넘어서는 실재적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기록된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사용하는 세 가지 비유―노예시장(속량), 법정(칭의), 제단(화목제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대속적이며, 실재적인 의미를 갖는지 설명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고, 우리가 죄인이지만 법정에서 ‘의롭다’ 선고받게 하셨으며,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의 담을 허무셨다. 이런 모든 구원 은혜가 ‘대표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말한다.

이와 같은 대표이론은 세상적인 예시로도 설명될 수 있다. 국가의 대표자가 체결한 조약 하나가 국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듯이, 가정의 대표가 집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기면 그 구성원 전체가 거기에 연대적으로 영향을 받듯이, 한 사람의 결정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전반에 미치는 것이다. 영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담이 죄의 문서를 ‘도장’ 찍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 묶어놓았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와 생명의 문서를 ‘도장’ 찍어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죄의 심각성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크고 전인적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5장 20-21절의 결론부에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선포한다. 사망이 왕 노릇하던 곳에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죄가 극심한 상황을 본다 해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사는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폭발적으로 드러났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은혜가 죄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며, 생명이 사망보다 무한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인용한다.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 노릇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날마다 인식해야 하며, 나아가 삶 속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전체적으로, 로마서 5장 12-21절에 드러난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이 구원의 대서사를 붙들 때, 인간의 죄에 대한 자기연민이나 절망, 또는 “과연 내가 바뀔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자리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아담의 타락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새 아담’과 연합되어 의와 생명,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었음을 날마다 확인해야 한다. 그저 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근본이 뒤바뀌었다는 선언이기에, 사망이 왕 노릇하던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벗어나, 이제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를 성도 개인의 경건 생활, 교회 공동체의 비전,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확대해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한 개인의 믿음과 순종이 결코 개인 한 사람의 테두리 안에 그치지 않고,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대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이 흐르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잠재력과 사명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된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표권을 위임받아, 죄가 만연한 곳에 은혜와 생명을 실어 나르고, 불의가 가득한 곳에 정의와 사랑을 전파하며, 절망이 짙은 곳에 희망을 심는 삶을 살게 된다.

로마서 5장 12-21절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죄와 사망, 그리고 의와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인류와 개개인에게 전개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아담의 불순종이 몰고 온 재앙적인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구원과 생명의 복된 소식을 장중하게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설교하며, 각 성도가 “도대체 나는 어떤 대표 아래 있는가?”를 성찰해 보길 권면한다. 아담 아래 남아 있다면 죄의 무게에 영원히 눌릴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로써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바울의 결론은 그저 개인적 깨달음이나 신앙적 위로를 넘어, 실제 존재의 혁신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복음이야말로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라고 역설하며, 이 복음의 능력이 신앙고백 차원을 넘어 삶의 변화를 이끌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본문의 핵심은 단지 죄가 있다, 은혜가 있다를 넘어서는 ‘생명의 실제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선언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너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신자는 아담의 죄와 연합된 옛 정체성을 끊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정체성을 살아내는 소명을 가진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성도들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붙들기를 촉구한다. 첫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와 생명의 운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담의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더욱 크고 더 강력하다. 죄가 깊을수록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고백을 현실 속에서 체득할 때, 신자들은 참된 자유와 소망을 얻는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류가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망의 권세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믿는 이들이 그 사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날마다 은혜와 의, 그리고 생명의 실체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로마서 5장이 전하는 가장 기쁜 소식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과 정죄가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의롭다 함과 생명이 임했다. 이 단순한 진술 안에는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구속사(救贖史)가 집약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이 진리를 붙들 때, 과거 아담이 열어버린 죄의 세계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펼쳐 보인 새로운 에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이 땅 위에서부터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 설파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2-21절의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변함없이 강력하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성과 연합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죄와 사망이 얼마나 강한 폭군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는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이 선언은, 우리가 매일 죄와 싸우고 넘어질 때조차도 여전히 우리를 붙드는 복음의 능력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구원의 근본 원리인 대표성과 연대성,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한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옛 대표인 아담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따른 결과는 죄와 사망의 지속이거나, 아니면 의와 생명의 새 역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 현실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가 전해야 할 참된 희망의 메시지라고 힘주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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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겟세마네의 기도 – 장재형목사

1. 겟세마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그분의 기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마가복음 14장 32절부터 42절까지 전개되는 내용을 주목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극한 고난을 앞에 두셨을 때의 심정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땅에 엎드려 간구하셨고, 제자들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잠에 빠져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참된 기도의 모범”이 되심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도가 단순히 ‘담대한 확신’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로 표현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을 중요한 핵심으로 언급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여러 차례 기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환자들을 치유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권능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기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어떠한 고난도 피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능력을 통한 고난 회피’가 아니라, “전인격적 순종”을 통하여 이 길을 선택하셨음을 본문에서 드러내신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막 14:36)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절대적 신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도 위대한 지점이라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연약한 인간적인 면모가 배어 있으나, 바로 그 인간적 두려움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향한 신뢰가 함께 결합되어 “온전한 복종”을 이뤄낸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현실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예수님조차도 십자가를 앞두고 “이 잔을 옮겨달라”는 간구를 드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뜻이라면 감당하겠다”는 결단에 이르기까지,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고독한 기도의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배울 수 있는 본질적 교훈을 찾아낸다.

장재형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지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앞둔 상황에서 힘겨워하셨다’는 역사적 서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고난을 온전히 감내하는 상징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겟세마네라는 이름 자체가 “채유소”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올리브 열매가 압착되어 기름이 나오듯, 예수님 역시 ‘죄인을 구원할 대속물’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이 압착되는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왕을 세울 때, 예언자나 제사장이 머리에 기름을 붓곤 했다. 그 상징은 “왕권”을 의미하며, 동시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백성을 인도한다는 소명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즉시 오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에 수많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리면, 기드론 시내를 따라 핏물로 물든 붉은 물이 내려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이후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붉은 피로 흘러가는 시내를 건너시는 구세주의 고독한 뒷모습”으로 그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마치 이 양들의 피처럼 흘러가야 함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 잔인한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셨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을 동행해야 할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고, 의지를 다지기는커녕 잠에 빠져버렸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고독이 한층 부각된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독은 단순히 ‘인간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물론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넘겨줄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제자들조차 주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막 14:37)라며 슬픔 어린 책망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사명자로서의 고독이었다. 홀로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셨기에,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 위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이 고독이 예수님의 인생 전반에 흐르는 어떤 필연적 흐름과 맞물려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반부터 주변인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지나친 환대를 받다가, 때로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진심으로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론하실 때마다 겉으로는 “아멘”이라고 화답했어도, 실제로 그 말씀의 본질에는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난 예고에 대해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들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그런 무지와 둔감함은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좀 더 가까이 데리고 가셨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따르면, 이 세 제자는 변貌산 사건에서도 함께했던 핵심 인물들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들이 모두 특별히 용기 있고 신실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줄 만한 이들로 선택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던(눅 22:44) 예수님의 옆에서, 그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졸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주님의 ‘극한 고통’을 미처 받아들일 정신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시는 순간에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길이 바로 ‘고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하는데, 이러한 고독 속에서도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매달리는 기도를 드리심으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요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다짐으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결국 실패하고야 만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인간적인 ‘결단’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낸다고 설교한다. 베드로는 인간적 의지만으로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영적 깨어 있음은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실제로 주님이 체포되자 그는 겁에 질려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처참한 상황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의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간구하시는 연약한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고백하며 십자가를 스스로 감당하시는 강인한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상반된 두 모습의 결합이야말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즉, 진정한 신앙의 담대함이란 결코 ‘인간적 무감각’이나 ‘사고의 단순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직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복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셨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는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 길은 바로 “기도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를 “고독한 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예수님 개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도 종종 인생의 골짜기에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떠올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세상 모든 이가 잠들고, 내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 사라져버린 그 밤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라 부르며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대신 13장부터 16장까지 최후의 만찬과 고별설교가, 그리고 17장에 긴 고별기도가 기록된 뒤, 18장부터 예수님의 체포 장면이 진행된다. 장재형목사는 그 이유를 두고 “요한이 이미 예수님의 결단이 최후의 만찬(요 13:1~)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내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며 수난을 ‘영광’으로 규정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다만 마가복음 14장에서 읽히는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그 결단의 뒷면에 어떤 통곡과 눈물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을 서로 보완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종합해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만을 부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인간적 면모를 함께 드러냄으로써 예수님의 희생이 어떤 각오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전폭적 신뢰로 승화되어, 십자가를 향한 담대한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강조되듯,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도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주님 안에는 “이 쓴 잔을 옮겨달라”는 인간적 바람과 동시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앙적 결단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어려움과 고통을 직면했을 때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결국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전한다.

또한 그는 이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단지 옛날 예루살렘의 한 밤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혹은 뜻밖의 시험과 고난 앞에 놓인 순간, 우리에게도 “겟세마네의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힘 주세요”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아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복종의 기도다. 장재형목사는“인생에 찾아오는 고독한 밤, 아무도 곁에 없어 보이는 바로 그때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설 때”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거룩한 발자취를 따르는 길임을 힘주어 말한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고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굳이 그런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을 경험하실 필요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해도, 실제로 몸소 겪으신 “죽기까지의 복종”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성경이 그것을 자세히 증언하고,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통곡과 땀흘림을 여실히 드러내며, 장재형목사 같은 사역자가 계속해서 그 의미를 풀어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고독의 밤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동시에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서 이 고독한 순종의 길을 배우도록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이제 때가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1-42)라고 선포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전진”이며, 고독을 넘어서는 ‘구속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온갖 눈물과 통곡 가운데서도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사실 예수님 자신만의 결단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이 고난의 길에 동참하라”고 초대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동행’의 의미를 본다. 본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고, 주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이후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기 시작했고, 교회는 이 ‘고난과 영광’을 계승해 왔다. 장재형목사는“오늘날에도 교회는, 그리고 개인 성도들은, 겟세마네의 밤에 오롯이 깨어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우리 역시 주님이 감당하신 고독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는 길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베드로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제자의 길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장면에 이어, 같은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세밀히 살펴본다. 그중 특히 마가복음 14장 50절 이후,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이 도망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서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던 한 청년”이 무리에게 잡히자 그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전승적으로 이 청년이 곧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해석이 많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제자들과 마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점이야말로 복음서가 가진 생생한 정직성이라고 설파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결심했었다.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막 14:29).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결심은 무너졌고, 베드로의 맹세는 부질없는 말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오직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연약함’을 대변한다. 장재형목사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몸에 위험과 공포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피하려 드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신앙이 깊어 보이는 사람도,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압박 앞에서 철저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교훈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복음서는 베드로가 부인한 직후 쓴맛을 보았고, 결국 회개하여 다시 주님의 제자로서 새롭게 서는 과정을 전한다(요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장면).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쓰임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겟세마네에서 잠들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치고, 심지어 스승을 팔아넘기거나 부인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지극히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 즉, 제자들의 실패가 곧 영원한 버림이 아니었고, ‘비겁한 제자들’이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지닌 은혜를 여실히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마가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진 ‘마가’다. 장재형목사는 마가가 14장 51-52절의 부끄러운 사건을 굳이 자기 복음서에 기록해두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대개라면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복음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실패를 낱낱이 기록하면서, “인간은 이렇게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부족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마가는 베 홑이불을 걸친 채 몰래 예수님을 좇아갔을 정도로 한편으로는 ‘주님을 떠나고 싶지 않은’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리에게 잡힐 뻔하자 공포에 질려 옷을 내던지고 도망칠 정도로 연약했고, 결국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과오를 복음서 기록에 담아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장치가 된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이렇게 비겁하고 부끄럽게 물러갔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홀로 견뎌야 했던 십자가의 중량감을 한층 더 짙게 해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이런 점을 예리하게 부각한다.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실패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고독한 순종과 희생이 이렇게까지 우리 가슴에 와닿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도행전 이후 성령의 강권적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 복음 전파의 일선에서 영적 대각성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된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배신과 도주, 잠과 무지였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신앙은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격이나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음으로써 얻게 되는 은혜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토대로, “우리도 연약함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 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실패가 곧 끝이 아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신다”고 역설한다. 이 메시지는 2천 년 전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선교지에서, 혹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 앞에 무너질 수 있다. 한때 베드로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다가도, 막상 곤경에 처하면 기도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듯이, 우리 또한 회개하면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는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다시 일으키신다”는 그 복음의 핵심을 강조한다. 그는 베드로가 눈물로 통곡하고 나중에 예수님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을 세 번 받으면서(요21장), 같은 횟수로 회복되는 장면에서 큰 희망을 발견한다. “실패로 끝난 인생은 없다.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가와 베드로처럼, 가장 부끄러운 순간에도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주님이 부활로써 완성하신 승리에 동참할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의 연약함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철저하게 ‘홀로의 길’이었는가”를 다시금 부각시킨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희생이며,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지셨다. 물론 기드론 시내를 함께 건넌 제자들도 있었고, 겟세마네까지 함께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예수님 혼자 남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구원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예수님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죄의 문제 앞에서는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 또한 역설적인 길이 된다. 한편으로는 “같이 가자”라는 예수님의 부름으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홀로 져야 할 십자가”가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다른 이들의 기도나 위로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장재형목사는 “각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마16:24)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잠들어버린 모습은 그 ‘영적 실체’를 우리에게 직면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은 자기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십자가가 있으며, 그 길을 막는 온갖 시험이 눈꺼풀을 무겁게 하듯이 우리를 짓누른다. 그때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인간적 한계만을 의지하면 베드로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너짐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장재형목사는 줄곧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옮겨 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가장 가르침 받았어야 할 기도였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 깨어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 실패를 토대로 교회의 사도로 자라나고, 나중에 성령 충만함을 입은 뒤에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거는 순교자적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고난이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 속에서 회개하고 다시금 제자로 서는 사람이 훨씬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허물과 실패를 “감추지 않고 있는” 복음서의 정직함을 높이 사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고 말한다. 만약 성경이 “제자들은 언제나 대단히 훌륭했다. 어떠한 배신도 없었다”고 기술했다면,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현재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결코 투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되, 예수님이 그 연약함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시켜주셨음을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연약함이 드러난 자리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하고 무너져서 내 안의 한계를 철저히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리가 열린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결연히 다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를 다시 찾아“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는 단순히 베드로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신앙인에게 주시는 위로이자 사명이다.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바라보면서,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모색할 수 있다. “주님, 저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만으로 제자의 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세워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스토리이며, 믿음의 여정은 바로 이 패턴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도, 넘어지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반드시 오지만, 그때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을 기억하며, 다시금 제자의 길로 돌아설 수 있다.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째 일어나면 된다”는 세간의 문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복음의 진리가 여기에 스며 있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가 되면, 정죄하기보다는 ‘내가 바로 그 연약한 자 중 하나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 베드로 한 사람이 실패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돌아서서 그를 나무라고 정죄했다면, 그것은 복음적 태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로 묶으셨고, 베드로와 함께 다른 이들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셨다. 훗날 사도행전에 이르면,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고, 물건을 통용하며, 때로는 넘어진 형제를 다시 세워주는 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이다. 십자가 이후의 부활, 그 이후의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겟세마네의 잠든 제자들이 깨어나 “이제는 함께 깨어 기도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부각되는 제자들의 한계를 정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다음의 결론을 전한다. 첫째,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의 길’이었고, 우리 죄인을 위해 대속의 잔을 홀로 마신 길이었다. 둘째,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도망가거나, 스승을 배반하고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실패조차 용서하시고 다시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곧, 우리 역시 예외 없이 연약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가 이 ‘십자가와 회복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지금 당장 고난 중에 있을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완전한 복종, 그리고 그 복종에서 빚어지는 구원의 역사”로 귀결된다.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신앙 고백이, 그 길로 동행하지 못하고 이탈한 제자들을 다시금 “같이 가자”라고 부르시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러나 동시에 소망을 잃지 않는 “부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난의 현장 속에서도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이 넘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며,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통곡과 제자들의 실패는 그 신앙이 얼마나 인간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꽃피우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겟세마네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조망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밤이 결코 예수님 한 분의 희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난과 구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장재형목사의 표현대로, “예수님이 가장 심히 통곡하셨던 그 순간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은 다 잠들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졸음과 배신, 도주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부활로 이어지는 복음의 결론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애초에 자기 자신만 믿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조차, 실패를 딛고 교회 초대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주님 곁에서 도망친 과거가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비극과 고독의 절정으로 보이지만,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새벽”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그 십자가가 부활의 문을 여는 핵심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날 밤 깨지 못했으나, 부활과 성령의 임재 이후 비로소 “깨어 있는” 제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겟세마네 기도를 되새기며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의 길이 예수님의 길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할지라도, 혹은 오히려 예수님이 겪으신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미 걸어가신 그 고독의 길이 “우리를 위한 길”이었고, 동시에 “우리에게 동행하자고 권면하시는 길”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의미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땀방울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으나, 그 기도는 ‘우리를 대속하시려는 중보의 기도’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결국은 회복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았다. 이는 우리도 “주님, 제가 깨어 있고 싶었지만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영혼을 깨워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다시 일으키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매년 우리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반복해서 기념하지만,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이 고독한 순종의 역사 위에 세워진 구원이 ‘오늘의 나에게도’ 실제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결론맺는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설교에서 “만약 내가 그 밤에 예수님 곁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적으로는 “나도 아마 잠에 들었을 것이고, 도망쳤을 것”이라고 답하곤 한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인간의 나약함은 본질적으로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 한 분이 충성스럽고 완전하셨기에, 우리 모두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 메시지가 바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여전히 절실한 이유라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강조한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란, 고난과 시련이 없는 평탄한 동행이 아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그것을 목전에 두신 채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길이었고, 그 길이야말로 구원을 이룬 길이었다. 제자들은 그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했으나, 부활 이후에는 각자 십자가를 품고 새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고난과 은혜의 길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제자의 길은 실패할 때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길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고독은 철저했지만, 그 고독이 결국 전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고, 제자들처럼 연약한 자들을 다시 부르시어 세워주셨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장재형목사가 줄곧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은, “아바 아버지여”라는 예수님의 기도 한 마디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처절하게 순종하시고 복종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을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있기에, 실패한 제자도, 잠들어버린 우리도, 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마가도, 다시금 공동체로 돌아와 기도로 깨어날 수 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우르는 복음의 정수이며, 우리의 회복과 승리의 관건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우리는 늘 좌절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끝없는 은혜의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긴 밤은 그런 은혜의 길이 시작된 자리였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상황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나, 억울함이나, 두려움 앞에서 “이 잔을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때, 예수님이 보이셨던 그 길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낙심이 깊어도, 심지어 실패와 부끄러움이 커도,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제자들의 실패마저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출발하고, 그 신뢰를 끝까지 붙드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집약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길은, 바로 이 기도를 삶 가운데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 안에서, 제자들의 연약함이 강함이 되어가듯,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간다.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의 기도와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독, 그리고 그 앞에서 드러난 베드로와 제자들의 비참한 연약함이야말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얼마나 값비싼 은혜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의 길인지를 보여준다. 이 고난의 밤은 결코 비극적 마침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2)는 주님의 음성으로 이어졌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점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도 각자의 겟세마네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깨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결국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겟세마네의 기도와 베드로 및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 주는 장면 중 하나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독은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가 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우리가 실패해도, 끝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그렇기에 신앙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복된 길은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그리스도와의 동행’의 핵심이며, 겟세마네 동산의 밤이 오늘에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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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와 복음의 본질 – 장재형목사

아래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로마서 3장 1-8절에 대한 설교 원고를 바탕으로 하되, 내용의 주제를 크게 두 갈래로 묶어, 본문의 의미와 신정론적(神正論) 문제 그리고 복음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다룹니다. 말씀의 주된 흐름은 바울사도의 논지가 가지는 의의, 그리고 그 논지로부터 파생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죄의 책임’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또한 여기서는 원문 본문에 제시된 내용과 함께, 그 배경에서 설명된 구약과 신약의 구절들, 교회사적·신학적 함의를 다루었습니다.


1. 바울의 논지와 신정론(神正論)의 문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 1-8절을 강해하면서, 이 본문이 갖는 핵심 화두가 ‘신정론’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惡)과 죄(罪), 불의(不義) 같은 것들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변론 혹은 해명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바라볼 때 인간 편에서 생겨나는 모든 의문에 대해, 하나님이 여전히 의로우시며 전혀 잘못이 없으심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항상 신앙인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동시에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반신(反神)하게 만드는 대표적 주제로 작동해 왔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특권, 다시 말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문과 대답을 제시한다. 그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과 율법을 부여받아, 모세로부터 계승된 선민사상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할례’라는 표징은“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상징하는 강력한 표식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2장 말미에서 표면적 할례는 진정한 의미의‘하나님의 백성 됨’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율법의 조문을 받았어도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이방인보다 더 무거운 정죄를 받을 수 있다고 엄하게 말한다. 이런 충격적인 가르침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왔던 모든 특권은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할례 자체가 무효가 되었단 말인가?”라는 반발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은 곧 신정론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나,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율법을 어겼다. 그렇다면 이는 곧 하나님 편의 실패가 아닌가?”라는 식으로, 인간 쪽의 불순종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논리가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죄나 잘못을 변명하려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변명과 책임 전가’의 연장선에 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이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제시한다. 즉 ‘만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 중 일부 혹은 다수가 믿음 없고 불순종한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이 땅에 떨어지고 무효화되는 것이냐?’라는 물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을 두고, 당시 교회 안팎에서 제기되었을 법한 대표적 신정론적 항의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택하심에 후회가 없으시다는데, 왜 택한 백성이 불순종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가? 결국 하나님께서 택정을 잘못하신 것이냐, 아니면 택하셨음에도 지키지 못한 무능력이냐? 이런 식의 질문들이다.

바울은 여기에 “그럴 수 없느니라”(4절)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이 결코 불의하시거나 실수하시거나 언약에 불성실하신 분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말은, 사람 편에서는 아무리 변명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와 신실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며, 다윗의 참회시인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한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고백한 대목이다. 이는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흠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불순종해 심판받을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가? 혹은 아예 타락 자체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으셨는가? 이것이 신정론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그 해답이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응답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만일 자유의지가 없으면, 기계적 순종이나 자동적 복종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진정성은 강제나 프로그래밍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혹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겠는가? 결국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협력한 공로자가 아닌가?”라고 묻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와 같은 궁극적 질문에 대해 바울이 제시하는 논리를 소개한다. 특히 7-8절에서 바울이 말하듯,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해졌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의 진의를 살펴보면,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미리 계획”하여 그 악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면, 악행을 일삼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도구로 쓰임 받는 셈이 되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궤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죄악에 대해 책임을 면하거나,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 전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확장해 설명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결국 애굽(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다. 형들은 명백히 “악한 마음”으로 동생을 팔아넘겼다. 이는 절대로 선한 행동이나 타락 전제의 계획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함의 한복판에서도 요셉을 붙드시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 자리까지 올려놓으심으로써 훗날 많은 민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게 하셨다. 그 일이 있은 뒤, 형들이 요셉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자 요셉은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이다”(창 50:20).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지, ‘악 자체를 계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악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실 만큼 크고도 전능하시다. 그 사실이 곧, 신정론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 편에서의 타락과 악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그것을 선한 결과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그러나 “타락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거나, “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이 드러날 수 없었다”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바울이 극구 경계하는 오류이며 불경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 교회 안팎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바울이 제기한 이 논지에 주목하라고 촉구한다. 바울 자신도 한때는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뒤, “모든 것이 변했다.” 율법이 가진 참 의미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죄짓는 모든 장면은 결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강제로 계획해 놓으신 것도 아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오직 인간 편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 사랑으로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시고, 회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시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1~8절에서 바울이 펼치는 문답 형태의 논의는, “유대인의 실패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마저 깨지느냐?” “악을 통해 선을 드러내신다면, 결국 악도 필요하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며, 죄와 악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악마저 선으로 바꾸실 만큼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받고서, 그동안 자신들이 율법을 받은 특권을 자랑만 하던 태도를 돌아봐야 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부분, 곧 자유를 하나님께 순복하여 사랑으로 순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다.

신정론적 답변이 바로 여기에 놓인다. “하나님께서 왜 악인을 빨리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역사가 이렇게 길게 이어지도록 죄가 판치게 허용하시는가?” 같은 질문도 결국 인간 편의 시각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단호한 대답을 하나님을 변명하기 위한 방어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로 충만하신 분임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의 탓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봐야 하며, “내가 믿음 없고, 내가 불순종하고, 내가 말씀에 불의했구나”라고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당신이 막지 않았지 않느냐” “당신이 예정하셨지 않았느냐”라는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바른 길에 이를 수 없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오해일 뿐 아니라, 바울이 소리 높여 거부했던 악용된 예정론적 사유, 혹은 왜곡된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복음의 본질,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와 참된 신앙

위에서 논의한 신정론의 문제와 더불어,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 1-8절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인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바울은 앞선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 파격적인 주장은 선민사상을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단순히 ‘할례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할례, 참된 믿음과 순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를 밝히는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고, 자신들이 ‘언약 백성’임을 공식화해 왔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롬2:25)고 경고한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표피를 베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할례가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로마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석한다. 세례 자체가 무익한 의식이 아니라, 본래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장사되고, 주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중요한 예식이다. 문제는 ‘겉모습만 남은 의식’으로 전락했을 때다.

바울이 9장 이후에서 다시 언급하는 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양자됨(롬9:4)’과 ‘언약들(롬9:4)’을 받았고, ‘율법(롬9:4)’과‘약속들(롬9:4)’을 위탁받았으며, 그리스도도 그 혈통으로부터 오셨다(롬9:5).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 혹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믿음을 생활화한 사람들은, 대단히 중요한 은혜의 조건을 선물로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조건이 ‘내 실천 없는 자랑’으로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는 이면적 신앙이 될 것인가?

장재형목사는 구약의 예언서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상기시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언약 관계라는 것이다. 표피에 새겨진 할례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새겨진 할례, 곧 표면적 행위를 뛰어넘어 영 안에서의 순종을 강조한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 또한 “너희 마음의 굳은 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주리라”(겔36:26)는 메시지를 전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에서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다룬다. 갈라디아 교회 내부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만 진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출신 형제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들을 대단히 강하게 비판하며,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고 선언함으로써, ‘외적인 할례’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되레 “개들을 삼가라”는 극단적 표현으로 경고한다.

골로새서 2장 11절 이하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의 중요성을 밝히면서, 육체적 의식이 아니라“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골2:12)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연합’(Union with Christ)의 진리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보이는 표징(sign)은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 표징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논리를 유대인들에게 직접 적용한 것이 로마서 2장에서 3장으로 이어지는 맥락이다. 바울은 “겉으로 한 할례만으로 선민이라 자랑하지 말라.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마음의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있을 때, 그 할례가 의미가 되고 효력을 갖는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만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너희의 할례는 무할례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무할례자는 할례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롬2:25-27 참조).

이 충격적인 가르침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할례받고 율법을 전승해온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여기에 “그렇지 않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으므로 유대인의 나음이 분명 있다”(롬3:2)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나음과 특권이 ‘네가 본질에 충실할 때’만 참으로 의미가 있으며, 만약 그 특권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불신앙을 드러낸다면, 그 특권은 오히려 더 큰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오늘날 교회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라고 제안한다. 세례 혹은 오랜 신앙 경력, 교회 직분, 신학 지식 등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은혜의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외적 자랑거리에 불과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울이 지적한 대로, 어떤 이방인(오늘날로 치면 믿지 않는 이들)이라도 ‘선한 양심과 도덕적 삶’을 통해, 형식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도리어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도리어 너희를 정죄하리라”는 경고다(롬2:27).

따라서 복음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명제를 되풀이한다(롬1:17, 갈3:11 등 참조). 즉,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외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 그리고 이를 진실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엡2:8-9). 그럼에도 그것이‘육체적 표징의 완전한 무가치’를 뜻하진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표징이란 마음에 있는 실체를 드러내는 외적 사인(sign)이며,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시키는 예식”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표징(할례나 세례)이 곧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마음의 한례’, 곧 성령을 통한 내면의 변화와 참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려는 순종이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 섬김, 은혜의 모습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열매다. 장재형목사는 “할례 혹은 세례가 구원을 보장한다고 착각하거나, 교회에서 충성 봉사한 이력이 많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아울러,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쟁점인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를 대조하는 이야기는, 곧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선이 아니냐?”라는 궤변을 초래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는 식의 무모하고 극단적인 논리 말이다(롬3:8). 바울은 이를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단숨에 잘라버린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결과적으로 하나님 영광이 더 드러났으니 내 죄가 오히려 선을 가져왔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구원은 내게서 시작된 것이 전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내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 임해, 마음의 한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라는 진리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가르침이 모든 율법적 형식주의를 깨뜨리며, 동시에 ‘신정론의 문제’로부터 하나님을 변호하는데도 강력한 논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악을 계획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로 세우셨으며, 그 자유를 범해 죄 가운데 빠진 우리를 끝내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1-8절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이냐?”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하셨느냐?”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죄도 유익한 것이냐?”라는 질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 그리고 인간 편의 불신과 무지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바울의 단호한 결론을 거듭 해설하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형식만 붙드는 표면적 종교생활을 반성하고, 참된 마음의 한례를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신정론적 측면에서 보면, ‘왜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하나님은 나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지 않으셨는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그러나 자유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발적 응답을 원하셨다는 사실이, 전체 구원계획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그토록 인간을 높이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죄를 택했으며, 이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심으로써, 우리의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부정하거나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죄와 악마저 선으로 뒤바꾸시는 힘’을 소유하셨음을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선택받았지만 그 선택에 합당하게 살지 않은” 유대인들, 혹은 “복음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고 행위로 증명하지 못하는” 현대의 형식적 신앙인의 문제를 똑같이 마주한다. 이를 명백하게 지적하는 바울의 말씀, 그리고 이를 해석하고 강해하는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한다. 마음의 한례 없이 교회 의식만 따라가는 믿음은 결코 ‘참된 복음 생활’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아, 결국 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엄중한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복음의 본질 회복’이라 요약한다. 이 복음의 본질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이 오직 인간 편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없이 신실하셔서,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셔서, 누구든지 진실로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표면적 할례가 아닌 마음에 할례받은 자”의 존재 방식이다.

결국,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 드러나는 큰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은 거짓되고 죄악된 상태에 머무를 때 하나님을 쉽게 오해하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자 한다. 이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인간의 죄성(罪性)이다. 둘째,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어느 누구도 그 신실함을 흔들 수 없으며,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셋째, 표면적 할례나 외적 의식, 혹은 오랜 신앙생활 경력만으로 자신의 의를 삼으면, 바울이 경고한 유대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넷째, 참된 복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10:10) 것이며, 이는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 즉,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와 결단을 수반한다. 다섯째, 악이 더해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식의 어리석은 궤변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으나, 인간에게 악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가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동시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깨뜨려야만, 바울이 로마서 전반에서 말하는 ‘복음에 의한 자유’(롬8:2)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정론적 의문, 즉 “하나님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두셨나?”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나는 과연 마음에 참된 할례를 받았는가?” “나는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라고 먼저 자문해야 한다.

만약 “나는 틀림없이 세례도 받았고, 교회 몇십 년 다녔으니 안전하다”라며 스스로를 안주시킨다면, 유대인들이 바울의 책망 앞에서 보였던 항변(“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과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인의 명예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으로 입증된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과연 너희가 말하는 복음이 참이로구나”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진정한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이 교회 안의 위선과 죄악을 보고, 오히려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는다”고 말하게 된다면, 겉으로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보다 나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 로마서 3장 1-8절에 대한 강해 전체를 통해, 장재형목사가 거듭 역설하는 바는 명확하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내 영혼이 깊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죄에서 떠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예정하심’ 같은 단어들만 앞세우며 변명한다면, 결국 나 스스로 삶의 변화 없이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렇게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와 믿음이 없다면, 소위 ‘신정론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허공 속 이론에 머무른다. “하나님이 다 하신 일”이라고만 치부하거나, “하나님의 섭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끝맺는다 한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신뢰하거나 복음을 기쁘게 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감사와 감격이 살아 있는 자는, 신정론의 그 어떤 질문도 자기 변명에 쓰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 위대함’을 감사한다.

결국 바울이 ‘유대인의 나음과 불신앙’을 이야기하며 이 신정론적 화두를 던지고,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강력한 경고와 선언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어떤 식으로든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시도를 멈춰야 하고, 죄를 더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려는 이율배반적 발상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의 은혜가 참되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마음의 한례’를 통해 변화되었음을 보여줄 때 드러난다.

본문의 배경과 신정론의 문제,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 그리고 초대교회의 갈등 상황까지 더 폭넓게 언급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기억해야 할 중심 진리는 명료하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자유의지 남용으로 인한 타락조차도 선으로 바꾸실 만큼 크다. 그러나 그 사실이 결코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겉모습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는 ‘이면적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함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단호한 어조 속에 담긴 진실이자,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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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고독과 순종

1. 겟세마네 기도의 배경과 의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보여주신 가장 극적이면서도 심오한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된다. 복음서 중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 이른바 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뇌와 고독,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드러나는지를 알려 준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미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에 이르는 고별 설교에서 십자가의 길을 결심하셨음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고 보았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별로 예수님이 강조되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난 앞에 서셨을 때 드린 기도의 깊이는 공관복음 모두에 일관되게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담긴 영적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신앙인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핵심 주제로 남아 있다.

특히 마가복음 14장 32-42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는 순간부터 제자들과 주고받은 간략한 대화, 홀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선포하시며 십자가를 향해 결단하시는 장면까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위치한 감람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기름을 짜는 틀’ 혹은 ‘채유소’를 뜻한다는 점에서, 감람나무 열매를 실제로 수확해 기름을 짜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메시아(히브리어)나 그리스도(헬라어)라는 호칭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이 장소 사이에는 깊은 영적 상징이 연결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겟세마네 동산의 의미를 해설하며, 감람산이 ‘평화’와 ‘영원성’을 상징하는 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기대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쓰신 것은 승리의 왕관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관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이 바로 겟세마네이며, 이 동산은 본래 기름을 짜는 곳이었으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여기서 어떤 ‘공식적 기름 부음’ 대신 처절한 땀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점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왕이 되실 분이 도리어 가장 비천한 죽음의 자리에 내몰리신 사실이, 이 공간적 배경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예수님과 제자들이 건너온 기드론 시내 역시 유의미한 배경이 된다. 유월절 시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어린 양들이 한꺼번에 제물로 바쳐졌는데, 그 피가 성전 아래를 지나 기드론 시내로 흘러나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 피로 물든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로 가셨고, 그 장면에서 곧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피 흘려 죽으실 운명을 떠올리셨을 가능성이 높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이미 그 무게감을 아셨고 피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 할 어린 양이 되실 분은, 아직 제자들에게는 감춰진 구원의 드라마를 혼자서 온전히 감당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면, 예수님이 그 결단을 아주 간단히 해치우신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적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히 겪으신 ‘참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고 표현하고,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실제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셨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아빠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는 간절한 호소가 보여 주듯, 예수님은 피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를 겪으셨다.

하지만 그 기도가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귀결된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여기에는 ‘죽기까지 복종’하는 적극적 순종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는 믿음”이라고 자주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짖고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절대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인류 구원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조차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을 정도였다면, 그 고난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그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혼자서 기도의 씨름을 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 옆에서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 주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고독은 십자가의 길을 더욱 혹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아가 베드로는 공회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이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독한 길임을 증언한다. 그 길을 통해 예수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2)라고 외치시며, 이미 기도로서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결단을 내리신 상태가 되었다. 그 기도의 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게 한 것이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는 신앙인에게 ‘인간적 약함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고난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는 관계 속에서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게 되는 순간을 예수님은 직접 보여 주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십자가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으나,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를 드리면서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다는 점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력한 희생이 아닌, 의식적인 사랑의 결단으로 완성된다. 겟세마네는 그 결단이 현실로 드러나는 무대이자, 앞으로 벌어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성격을 예표하는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설과 설교를 통해, 겟세마네 기도가 없이는 십자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아 마땅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실 만큼, 십자가는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부활의 영광과 연결되는 길이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될 수 없고, 십자가와 부활도 분리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이 기도 안에는 고통을 극복한 결정적 순종의 힘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곧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영적 교훈을 제시한다.

2.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고독

겟세마네 기도 장면에서 예수님의 고뇌와 기도의 씨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동시에, 그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이 제자들의 연약함이다. 마가복음 14장 26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간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곧닥칠 수난이 예견되어 있었겠지만, 제자들은 그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스승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으나, 이 결의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순간에 산산이 부서진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올라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자, 제자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곧 잠에 빠진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모두 이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드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예수님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물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시지만, 제자들은 피곤과 무지, 혹은 영적 무감각에 사로잡혀 허덕인다. 그러다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자 놀라 달아나고, 베드로조차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이처럼 제자들의 실패담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특히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등장하는 익명의 청년 일화는 눈길을 끈다. 이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 하나만 두른 채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붙잡히려 하자 이불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기록되는데, 이것이 마가 자신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을 통해, 복음서가 쓰인 초기 공동체 내부의 부끄러운 실패 사례조차 감추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겟세마네 사건은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이 실수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결심과 의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더욱 심각한 예는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다. “나는 주를 위해 생명도 버리겠다”고 자신하던 베드로가, 재판정 마당에서 계집종의 질문 한 번에 무너져 “나는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해 버린다. 성경은 세 번째 부인 직후 닭이 울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것은 제자 공동체의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철저한 실패이며,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독이 한층 더 두드러지는 것을 본다.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을 평생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던 측근들조차 결정적 순간에는 그를 떠나 버렸고, 오히려 미약한 계집종의 말 앞에서도 겁을 내는 모습으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던 이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자리에 서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 얼마나 철저히 고독한 길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고독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드러내는 동시에, ‘죄 없는 자’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이 고독이 인류 구원 역사에서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셔야 할 죄 값은 그 누구도 함께 나누어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아무리 깨어서 기도했더라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대신 감당해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예수님 혼자서 걸어가야 할 길이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무지와 배신은 그 길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부활 이후 제자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리더가 되고, 다른 제자들도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 세계로 퍼뜨리는 핵심 증인들이 된다.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그들의 연약함이 오히려 회개와 자각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살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제자들의 실패가 영원한 낙오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같은 패턴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 의지와 힘으로는 결코 버텨 낼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재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결국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예수님의 고독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지닌 연약함을 투명하게 밝힘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음으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막상 현실의 두려움과 시련 앞에서 그 결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제자들은 몸소 증명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의 실패와 연약함마저 덮어 주시고 다시 사명감당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점을 드러낸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해 보면,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역시 하나님 없이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독은 바로 그 연약한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필연적 희생의 길이었음을 더욱 부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내용을 설교할 때,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이 단순히 “주님께서 고생하셨던 한 장면”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주는 표본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의 체험은 너무나 부끄러웠으나, 복음서가 이를 가감 없이 전하는 이유는 바로 ‘무너지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길이 예비되어 있다’는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결국 겟세마네 사건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연약함은, 예수님의 희생이 없이는 우리 역시 어떤 선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선명히 보여 주는 반면, 그 뒤를 잇는 부활의 승리는 연약함이 극복되고도 남는 하나님의 능력을 약속한다.

3. 복종과 동행의 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 주신 핵심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탄원하실 정도로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숨기지 않으셨다.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셨다. 이는 억지나 체념이 아닌, 아버지를 절대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가능한 능동적 순종이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 이상으로 마음속에서 치열한 씨름을 하셨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전한다.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표현은 그만큼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압박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고, 이후에는 십자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기도에서 승부가 결판났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겟세마네 기도 후 예수님 마음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복종이 결국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고, 그것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므로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고 선언한다. 즉,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자리였고, 예수님의 복종이 그 거룩한 열매를 맺게 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선택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었다”고 설명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체포되신 예수님의 행보가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아가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동일한 복종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이는‘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보여 준다. 간혹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 믿으면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도 하지만, 실상 복음은 오히려 “너희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직접 겪으셨던 고난과 고독, 그리고 복종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을 떠올리면, 당장 눈앞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 결국 선을 이루리라’는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복종’과 ‘동행’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신 후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이, 성령을 통해 성도들 안에 계속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잠이 들고, 두려워 도망쳤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순교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변화는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실제로 응답한 사례다. 우리 역시 매일 일상 속에서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를 선택하며 사는 순간에,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오랜 목회 경험 속에서, 겟세마네 기도를 곱씹으며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크고 작은 시련들을 이겨 낸 간증 사례를 자주 나눈다. 그 경험담의 요지는 고통스러운 문제 앞에서 처음에는 “이 잔이 그냥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그 뜻에 복종할 때,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길이 열리고, 그 길은 생명과 소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 자체가 즉시 없어지지 않을 수 있어도,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여기서 복종이란 결코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을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내어주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을 펼치신 것이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르게 될 때, 고난 중에도 두려움과 절망에 휩쓸리지 않고,오히려 영적인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복종과 동행의 길이 주는 자유이자 참된 해방이다. 결국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은 “예수님이 이미 걸으신 길”이라는 확신과 함께, 어떤 시련에서도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기도 이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실제로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졌다. 이 처형은 로마 제국 당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고, 누구도 그 길을 ‘영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그 수치와 고통의 길이 곧 승리와 구원의 길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준비하신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는 결코 온전한 기쁨에 이를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가 없이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고통과 고독, 그리고 그분의 절대적 복종이 있었기에 부활의 능력이 비로소 온전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제자들의 실패와 회복에도 적용된다. 겟세마네에서 철저히 무너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자기들의 배신과 부끄러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심지어 그들의 실패가 훗날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러운 부인 사건을 떠올리며, 다른 이들이 넘어졌을 때 더욱 따뜻하고 힘 있게 붙들어 주는 지도자로 변화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겟세마네의 고독과 눈물이 한낱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 안에서 오히려 넘치는 은혜로 전환되는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우리는 겟세마네 장면에서 ‘인간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예수님의 고독은 얼마나 처절했는가’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믿고 복종함으로써 승리하신 예수님의 길이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극적인 기도를 숨기지 않고 기록함으로써, 단지 예수님의 고통을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 길로 초대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 끝에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으며, 제자들 역시 부활 신앙으로 새롭게 거듭나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할 때, 인생의 다양한 시련 속에서 “아바 아버지,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고난과 영광이 함께하는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수 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수 있고, 배신과 외면을 당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때 부끄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을 이미 예수님이 지나가셨고, 그 길에서 “함께 가자”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이야말로 최대의 위로다. 이는 곧 복종이 고통스러운 결말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생명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의미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동행’이 성립한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보여 주는 복종과 동행의 길이란, ‘눈물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깊이 신뢰하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는 우리의 신앙적 여정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가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맞닥뜨리게 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닌 아버지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라고 부르짖으며, 스스로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지 시험받는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도 결국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셨고, 그 길이 곧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다. 제자들은 비참하게 실패했으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되어 더욱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기초해, “우리가 지금 어떤 고난이나 연약함을 경험하든지, 그 속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본받는다면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겟세마네 기도를 잊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의 깊은 의미와 부활의 능력을 놓치지 않게 되며, 비록 눈물과 실패를 겪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사명의 길로 결국 인도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곧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동행의 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먼저 몸소 걸으셨고,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첫째 소주제에서는 겟세마네 기도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았고, 둘째 소주제에서는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고독을 대조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셋째 소주제에서는 예수님의 복종과, 그 복종에 동행하는 길이 어떤 영적 결실을 맺는지 이야기했다. 십자가는 잔혹하고 치욕적인 형틀이었으나, 예수님의 기도로부터 시작된 이 순종의 사역은 부활을 통해 가장 강력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죄성과 무능함을 처절하게 깨달았으나,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회복되고 세워지는 은혜를 입었다. 이 모든 드라마의 전초 무대가 된 겟세마네 동산은,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묵상해야 할 핵심 장면이다.

오늘날에도 고통과 시험을 만나면 우리 안의 연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그 길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 “아빠 아버지”라고 울부짖을 만큼 절박해도,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결국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제자들도 비록 잠이 들고 배신했지만, 회복되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복음 증인으로 쓰임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떤 실패와 약함 가운데 있더라도, 그 길에서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부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건이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생히 가르쳐 준다. 즉,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고난과 고독이 뒤섞인 길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는 영광의 길이었다. 겟세마네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복종의 완성’을 이루셨고, 그 복종으로 인해 인류는 구원의 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제자들은 거기서 무너졌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일어섰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겟세마네 없이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누차 역설한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인생에서도 ‘작은 겟세마네들’을 마주칠 때마다,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지를 기억하며 동일한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다. 아무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십자가를 내 앞에 마주했을 때,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떤 길이든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가 전해 주는,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복음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실체다.

이미 목욕한 자 – 장재형목사

1.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이미 목욕한 자’의 의미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2-11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발 씻김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장면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주는 메시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이 본문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마귀가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배반의 생각을 심어 놓았다는 점에서 극도의 긴장과 비극이 예고된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돌이키기 원하시는 사랑을 베푸신다. 특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라는 말씀은, 중생한 자와 매일의 회개가 필요한 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먼저 “이미 목욕한 자”라는 표현이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중생(重生) 체험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새 삶으로 옮겨지는 근본적 변화다. 비유하자면, 잔칫집에 초대받아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미 몸을 씻고 가는 것이 예의이며, 그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동안 발은 먼지와 흙탕물로 더러워질 수밖에 없기에, 잔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에는 발을 다시 씻어야 한다. 이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죄 짓기에 빠른 발’을 갖고 있기에, 늘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함을 상징한다.

장재형목사는 중생의 체험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자 필수 요소임을 거듭 강조한다. 만일 아직 목욕(중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 예배와 봉사에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주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 이는 마치 가룟 유다가 주님 곁에 있었으나, 끝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배반의 길로 가버린 것과 상통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중생한 사람들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목욕한 자라 해도 매일의 삶에서 발이 더러워질 수 있으므로, 날마다 자신의 발을 씻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발을 씻는 과정은 ‘자범죄(自犯罪)’를 다루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에도 남아 있는 죄성(罪性)과 매일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위는 스승과 제자의 전통적 위계를 뒤엎는 듯하다. 당대에는 스승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자나 하인들에게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예수님은 거꾸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사랑의 종’이 되신 예수님의 극단적 낮아지심으로 설명한다. 그분은 진정한 권위와 영광은 섬김에서 온다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몸소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본 시몬 베드로는 반발한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는 놀람은 예수님이 왜 그런 겸손의 행동을 취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제 아무리 자격 없다 생각하고,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긴다 해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씻김을 받지 않으면 결코 주님과 연합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교만일 수 있다.

베드로가 이에 놀라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대목이 곧 믿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매일의 죄 씻음’이지, 거듭난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새로 중생 의식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세례의 의미도 이와 연관해 해설하는데, 물로 받는 세례는 이미 내면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세례를 공적으로 표현하는 외적 표지라는 것이다. 교회 전통에서 세례 의식을 매우 중시하지만, 그 의식 자체가 중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개인이 죄로부터 돌이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근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단 ‘목욕’을 마친 사람도 발을 씻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육체와 본성이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세상 안에서 살면서 탐심, 미움, 시기, 음란, 교만 등 각종 죄의 요소를 접하게 되고 때로는 그것에 굴복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는, 즉 날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경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자리에 대한 귀한 통찰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을 좇아 살기보다 육체의 소욕에 발목 잡히는 일이 잦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5)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발은 너무도 쉽게 죄를 향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곧장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 제 발을 씻어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이미 목욕한 자’는 이렇게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미 구원받은 존재로서 하나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발을 씻음으로써 주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은혜에의 무모함’과 ‘은혜 안의 깨어 있음’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한편으로는 아무 자격 없는 죄인을 끝까지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은혜를 등한시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늘 점검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하게 촉구한다.

이 ‘이미 목욕한 자’의 신분을 소중히 여기고, 발을 씻는 매일의 회개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단지 개인적 경건 생활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은,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낮아짐과 사랑의 실천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서로의 죄와 허물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을 씻어주는 마음으로 돌보고 기도하며 권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런 문화가 없다면, 교회는 금세 인간적 다툼과 분쟁에 파묻혀버린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 다투고 있었음을 누가복음 22장이 보여주듯, 섬김보다 지배와 위계를 앞세우려는 인간적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를 폭로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안팎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따라 살라는 초청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미 중생으로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매일 발을 씻지 않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친히 손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매달려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해간다.

이처럼 소주제 1에서 다룬 ‘이미 목욕한 자’의 의미는, 근본적인 중생과 매일의 회개가 긴장 속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개인의 구원 확신에 머무르지 말고, 계속해서 자기 발을 씻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죄와 타협하지 않는 거룩과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 모든 ‘발 씻음’의 과정은 스스로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며, 그 은혜에 응답하고 또 서로에게 나누어줄 때 교회 공동체는 새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무정함,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2절, 즉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는 부분을 매우 심각하고 비극적인 장면으로 해석한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원수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가 극적으로 맞부딪히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음에도, 끝내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배반의 길로 들어선다.

먼저, 장재형목사는 마귀가 “주님과 제자를 갈라놓는 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제자 중 하나를 골라 주님께 반역과 배반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마귀에게 가장 큰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배반과 분열, 불신과 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해준다. 유다와 예수님은 분명히 한 식탁에서 함께 떡을 떼고, 예수님은 그런 그를 끝까지 붙드려 노력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그 사랑의 초청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시고, 마지막까지 사랑과 기회를 주어도, “마귀가 넣은 생각”이라는 거짓된 씨앗이 이미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3장 2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셔도, 제자들은 유다가 구제할 물건을 사러 가는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도 그가 배반하려고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무정함과 둔감함, 그리고 타인의 영적 상태를 깊이 살피지 않는 태도가 결국 공동체 안에서 큰 배반이 벌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교회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가 겉으로는 함께 예배하고 식탁을 나누지만, 누군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배반의 씨앗을 키우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둔감하고 서로의 영혼에 무관심하다면, 어느 순간 마귀가 그 빈틈을 노려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영적으로 경계하며, 동시에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그를 끝까지 붙드셨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주님께서 배반자에게 베푸시는 마지막 사랑의 손길”이라고 부른다. 유다가 만찬을 함께 하고, 심지어 발까지 씻김을 받은 상태에서 떠나고 말았는데,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반이다. “유다가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는 성경 구절은 이 비극의 절정을 보여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다의 모습은, 결국 자신의 의지로 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내버려진다는 것,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시는 것’의 무서움을 말한다. 로마서 1장 24절과 2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거절하는 자가 결국 스스로 돌아설 수 없는 심연으로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유다는 자신의 탐심과 배반의 마음을 스스로 거두지 않았고, 주님의 거듭된 사랑의 권면을 내쳤다. 결국 그는 내버려진 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내버려짐은 하나님이 단지 냉혹하고 무정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등을 돌리며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유다의 예를 통해, 우리도 언제든지 죄와 유혹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유다와 같은 배반자가 나타날 수 있으며, 혹은 내가 곧 그 유다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에도, 그 사랑을 거부하거나 남용하여 결국 신앙의 어둠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제자들의 둔감함에 대해서도 장재형목사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최후의 만찬 직전, 제자들은 다투고 있었다. 누가 더 높은지,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지 경쟁하는 모습이 누가복음 22장 24절에 나타나는데,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는 결코 타인의 내면적 갈등이나 죄악의 소용돌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오히려 각자의 욕심과 자리다툼에 빠져 있기에, 자기 곁의 형제가 배반자로 전락해 가는 과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교회 공동체가 새겨야 할 교훈으로 삼는다. 우리는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누가 더 높은가”로 다투며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생길 때, 혹은 누군가 영적으로 크게 흔들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진심으로 끝까지 붙드는 사랑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나는 아니겠지’라고 하며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곁에 있는 이의 파멸을 방치하는가?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유다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밤” 속으로 들어갔다는 요한복음 13장 30절을 매우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밤’이란 단순히 해가 진 시간만이 아니라 영적 어둠, 죄와 절망의 자리가 된다. 유다가 주님의 만찬을 떠나 그 어둠에 들어갔듯,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면 더 이상 빛 안에 거하지 못하고 어둠의 사로잡힘을 당한다.

결국 이 모든 장면은 배반자 유다와 무정한 제자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극단적 대비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고, 또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발을 씻어주며, 마지막 권면의 손길을 내미셨지만, 유다는 그 사랑을 뿌리쳤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이 그 과정을 막아낼 정도로 성숙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종종 접하는 갈등과 배반은 이 장면이 반복되는 작은 축소판일 수 있다. 우리가 겉으로는 함께 찬양하고 봉사하고 식탁을 나누지만, 내면에서는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경쟁하며, 심지어는 배반과 분열의 씨앗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시는가? 장재형목사는,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며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유다처럼 그의 손길을 배반할 수도, 혹은 주님의 은혜로 눈물로 돌이켜 회복될 수도 있다.

이처럼 소주제 2는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교회 공동체와 개인 신앙인 모두가 경계해야 할 죄와 배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심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지 일깨워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 단순히 “유다는 나쁜 제자였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유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붙드신다”라는 경고이자 위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석한다.

3.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과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명령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4-5절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며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으시는 장면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극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당시에 발을 씻는 일은 보통 하인이나 종의 역할이었다. 혹은 랍비와 제자의 관계에서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길 수는 있었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한 사람씩 발을 씻어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이 종 중의 종이 되셨다”라는 표현으로, 이것이 단지 예의상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진정한 ‘낮아지심’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내가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명령하신다(요 13:14). 이는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 곧 서로를 향한 섬김과 사랑의 본보기가 된다.

문제는 제자들이 그 상황에서조차 누가 더 높으냐를 다투고 있었다는 것이다(눅 22:24). 장재형목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인간의 보편적 죄된 본성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누가 더 인정받는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가를 계산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경쟁과 다툼 한가운데서 스스로 종이 되심으로, 참된 섬김이란 무엇인지, 사랑의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사랑의 종 된 자유”라고 표현한다. 즉, 예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은 지배나 군림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종”이 될 때 참된 자유가 온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그 삶을 통해 오히려 어떤 억압이나 두려움도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사건과 그대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예수님의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째, 개인 차원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비움과 낮아짐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발은 언제든지 죄로 더러워질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삶을 선택하려면 반드시 자기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십자가가 바로 그 ‘자기 부정’의 자리다. 십자가가 교회나 가정, 혹은 내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기보다는 지배와 이익 추구의 태도로 돌아가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는 결국 교만한 인간들의 모임이 될 뿐”이라고 강하게 말한다.

둘째,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는 실제로 상대방의 육체적 필요를 보살피고, 그의 삶을 섬긴다는 물리적 차원도 있고, 더 나아가 영적으로 형제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덮어주고 회복시키며, 회개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준다는 차원도 있다. 교회가 진정 ‘발 씻김’의 의미를 실천한다면, 그곳에는 정죄나 수치심이 아닌, 회복과 화해와 사랑이 충만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모든 성도가 “남의 발을 씻길 대야와 수건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이와 함께 강조되는 것이 “내가 너희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너희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의 심각성이다. 이는 우리가 내 힘으로 내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생을 통해 이미 목욕한 자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금 발이 더러워질 때,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씻음을 받아야 한다. 동시에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내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발 씻김’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갈등은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옳으냐’ ‘누가 더 많이 기여했느냐’ 같은 비교의식과 자기주장이 부딪칠 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셨다. 스승이자 주인 되신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져 종이 되었듯이, 우리도 바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왕이 되어 통치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성공과 지배, 영향력을 추구하는 문화 한가운데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삶은 역설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역설 속에 진정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이의 발을 씻어줄 때, 그 행위는 곧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능력이 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이 발 씻김의 메시지가 사순절과 부활절에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고 설명한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순종의 길을 함께 걷는 영적 훈련 기간이다. 이 기간에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다시 되새길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예배당에 모여 의식을 치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의 회개와 섬김, 나눔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부활절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선 예수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자기 낮춤과 희생은 결코 실패나 패배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 영광스러운 승리로 나타났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는 이 작은 섬김의 실천도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세상이 볼 때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솟아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3장 2-11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발 씻김 사건은,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교회의 본질이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중요 장면이다. 첫째, 이미 목욕한 자는 거듭난 존재이지만, 매일 자신의 발을 씻어야 하는 회개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둘째, 가룟 유다의 배반과 제자들의 둔감함은, 교회 안에 여전히 자리할 수 있는 무서운 죄와 불신, 무관심을 상기시킨다. 셋째, 예수님이 직접 발을 씻어주신 행동은, 사랑이야말로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 섬기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해서만 참된 공동체와 구원의 기쁨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원수’처럼 느끼는 사람 혹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섬기기 어려운 사람의 발을 씻길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예수님조차 가룟 유다의 발을 씻으셨는데, 우리는 과연 누구의 발을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은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가, 아니면 실제로 낮아져 형제를 섬기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발을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은 기준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놀라운 은혜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줄 능력이 없음을 아시기에, 먼저 우리를 씻어주신다. 그리고 매일 더러워지는 우리의 발을 기꺼이 닦아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교회의 구체적인 사명과 존재 목적이 있다.

이처럼 소주제 3에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서 ‘발 씻김’이 지닌 영적·실천적 의미를 살폈다. 장재형목사는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증언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은 사순절을 지나 부활의 아침에 다다르는 순례자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낮아짐과 희생의 모범을 참으로 좇아가기만 한다면, 비록 발을 씻기는 행동은 작고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로 이루어가는 기적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다.

장재형목사의 이 모든 해설을 종합할 때, 요한복음 13장에 담긴 발 씻김의 본질은 구원받은 이들의 지속적 회개, 교회 안의 배반 가능성에 대한 경계, 그리고 종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섬기는 삶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길이야말로 은혜와 진리, 그리고 사랑의 완성임을 우리는 매일 묵상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목욕한 자”로서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동시에 서로를 섬기는 교회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