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할례와 복음의 본질 – 장재형목사

아래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로마서 3장 1-8절에 대한 설교 원고를 바탕으로 하되, 내용의 주제를 크게 두 갈래로 묶어, 본문의 의미와 신정론적(神正論) 문제 그리고 복음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다룹니다. 말씀의 주된 흐름은 바울사도의 논지가 가지는 의의, 그리고 그 논지로부터 파생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죄의 책임’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또한 여기서는 원문 본문에 제시된 내용과 함께, 그 배경에서 설명된 구약과 신약의 구절들, 교회사적·신학적 함의를 다루었습니다.


1. 바울의 논지와 신정론(神正論)의 문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 1-8절을 강해하면서, 이 본문이 갖는 핵심 화두가 ‘신정론’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惡)과 죄(罪), 불의(不義) 같은 것들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변론 혹은 해명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바라볼 때 인간 편에서 생겨나는 모든 의문에 대해, 하나님이 여전히 의로우시며 전혀 잘못이 없으심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항상 신앙인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동시에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반신(反神)하게 만드는 대표적 주제로 작동해 왔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특권, 다시 말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문과 대답을 제시한다. 그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과 율법을 부여받아, 모세로부터 계승된 선민사상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할례’라는 표징은“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상징하는 강력한 표식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2장 말미에서 표면적 할례는 진정한 의미의‘하나님의 백성 됨’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율법의 조문을 받았어도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이방인보다 더 무거운 정죄를 받을 수 있다고 엄하게 말한다. 이런 충격적인 가르침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왔던 모든 특권은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할례 자체가 무효가 되었단 말인가?”라는 반발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은 곧 신정론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나,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율법을 어겼다. 그렇다면 이는 곧 하나님 편의 실패가 아닌가?”라는 식으로, 인간 쪽의 불순종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논리가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죄나 잘못을 변명하려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변명과 책임 전가’의 연장선에 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이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제시한다. 즉 ‘만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 중 일부 혹은 다수가 믿음 없고 불순종한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이 땅에 떨어지고 무효화되는 것이냐?’라는 물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을 두고, 당시 교회 안팎에서 제기되었을 법한 대표적 신정론적 항의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택하심에 후회가 없으시다는데, 왜 택한 백성이 불순종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가? 결국 하나님께서 택정을 잘못하신 것이냐, 아니면 택하셨음에도 지키지 못한 무능력이냐? 이런 식의 질문들이다.

바울은 여기에 “그럴 수 없느니라”(4절)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이 결코 불의하시거나 실수하시거나 언약에 불성실하신 분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말은, 사람 편에서는 아무리 변명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와 신실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며, 다윗의 참회시인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한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고백한 대목이다. 이는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흠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불순종해 심판받을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가? 혹은 아예 타락 자체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으셨는가? 이것이 신정론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그 해답이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응답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만일 자유의지가 없으면, 기계적 순종이나 자동적 복종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진정성은 강제나 프로그래밍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혹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겠는가? 결국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협력한 공로자가 아닌가?”라고 묻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와 같은 궁극적 질문에 대해 바울이 제시하는 논리를 소개한다. 특히 7-8절에서 바울이 말하듯,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해졌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의 진의를 살펴보면,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미리 계획”하여 그 악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면, 악행을 일삼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도구로 쓰임 받는 셈이 되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궤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죄악에 대해 책임을 면하거나,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 전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확장해 설명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결국 애굽(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다. 형들은 명백히 “악한 마음”으로 동생을 팔아넘겼다. 이는 절대로 선한 행동이나 타락 전제의 계획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함의 한복판에서도 요셉을 붙드시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 자리까지 올려놓으심으로써 훗날 많은 민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게 하셨다. 그 일이 있은 뒤, 형들이 요셉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자 요셉은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이다”(창 50:20).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지, ‘악 자체를 계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악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실 만큼 크고도 전능하시다. 그 사실이 곧, 신정론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 편에서의 타락과 악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그것을 선한 결과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그러나 “타락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거나, “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이 드러날 수 없었다”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바울이 극구 경계하는 오류이며 불경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 교회 안팎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바울이 제기한 이 논지에 주목하라고 촉구한다. 바울 자신도 한때는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뒤, “모든 것이 변했다.” 율법이 가진 참 의미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죄짓는 모든 장면은 결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강제로 계획해 놓으신 것도 아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오직 인간 편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 사랑으로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시고, 회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시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1~8절에서 바울이 펼치는 문답 형태의 논의는, “유대인의 실패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마저 깨지느냐?” “악을 통해 선을 드러내신다면, 결국 악도 필요하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며, 죄와 악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악마저 선으로 바꾸실 만큼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받고서, 그동안 자신들이 율법을 받은 특권을 자랑만 하던 태도를 돌아봐야 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부분, 곧 자유를 하나님께 순복하여 사랑으로 순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다.

신정론적 답변이 바로 여기에 놓인다. “하나님께서 왜 악인을 빨리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역사가 이렇게 길게 이어지도록 죄가 판치게 허용하시는가?” 같은 질문도 결국 인간 편의 시각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단호한 대답을 하나님을 변명하기 위한 방어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로 충만하신 분임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의 탓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봐야 하며, “내가 믿음 없고, 내가 불순종하고, 내가 말씀에 불의했구나”라고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당신이 막지 않았지 않느냐” “당신이 예정하셨지 않았느냐”라는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바른 길에 이를 수 없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오해일 뿐 아니라, 바울이 소리 높여 거부했던 악용된 예정론적 사유, 혹은 왜곡된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복음의 본질,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와 참된 신앙

위에서 논의한 신정론의 문제와 더불어,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 1-8절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인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바울은 앞선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 파격적인 주장은 선민사상을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단순히 ‘할례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할례, 참된 믿음과 순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를 밝히는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고, 자신들이 ‘언약 백성’임을 공식화해 왔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롬2:25)고 경고한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표피를 베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할례가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로마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석한다. 세례 자체가 무익한 의식이 아니라, 본래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장사되고, 주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중요한 예식이다. 문제는 ‘겉모습만 남은 의식’으로 전락했을 때다.

바울이 9장 이후에서 다시 언급하는 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양자됨(롬9:4)’과 ‘언약들(롬9:4)’을 받았고, ‘율법(롬9:4)’과‘약속들(롬9:4)’을 위탁받았으며, 그리스도도 그 혈통으로부터 오셨다(롬9:5).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 혹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믿음을 생활화한 사람들은, 대단히 중요한 은혜의 조건을 선물로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조건이 ‘내 실천 없는 자랑’으로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는 이면적 신앙이 될 것인가?

장재형목사는 구약의 예언서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상기시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언약 관계라는 것이다. 표피에 새겨진 할례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새겨진 할례, 곧 표면적 행위를 뛰어넘어 영 안에서의 순종을 강조한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 또한 “너희 마음의 굳은 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주리라”(겔36:26)는 메시지를 전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에서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다룬다. 갈라디아 교회 내부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만 진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출신 형제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들을 대단히 강하게 비판하며,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고 선언함으로써, ‘외적인 할례’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되레 “개들을 삼가라”는 극단적 표현으로 경고한다.

골로새서 2장 11절 이하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의 중요성을 밝히면서, 육체적 의식이 아니라“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골2:12)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연합’(Union with Christ)의 진리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보이는 표징(sign)은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 표징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논리를 유대인들에게 직접 적용한 것이 로마서 2장에서 3장으로 이어지는 맥락이다. 바울은 “겉으로 한 할례만으로 선민이라 자랑하지 말라.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마음의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있을 때, 그 할례가 의미가 되고 효력을 갖는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만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너희의 할례는 무할례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무할례자는 할례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롬2:25-27 참조).

이 충격적인 가르침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할례받고 율법을 전승해온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여기에 “그렇지 않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으므로 유대인의 나음이 분명 있다”(롬3:2)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나음과 특권이 ‘네가 본질에 충실할 때’만 참으로 의미가 있으며, 만약 그 특권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불신앙을 드러낸다면, 그 특권은 오히려 더 큰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오늘날 교회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라고 제안한다. 세례 혹은 오랜 신앙 경력, 교회 직분, 신학 지식 등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은혜의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외적 자랑거리에 불과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울이 지적한 대로, 어떤 이방인(오늘날로 치면 믿지 않는 이들)이라도 ‘선한 양심과 도덕적 삶’을 통해, 형식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도리어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도리어 너희를 정죄하리라”는 경고다(롬2:27).

따라서 복음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명제를 되풀이한다(롬1:17, 갈3:11 등 참조). 즉,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외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 그리고 이를 진실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엡2:8-9). 그럼에도 그것이‘육체적 표징의 완전한 무가치’를 뜻하진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표징이란 마음에 있는 실체를 드러내는 외적 사인(sign)이며,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시키는 예식”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표징(할례나 세례)이 곧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마음의 한례’, 곧 성령을 통한 내면의 변화와 참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려는 순종이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 섬김, 은혜의 모습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열매다. 장재형목사는 “할례 혹은 세례가 구원을 보장한다고 착각하거나, 교회에서 충성 봉사한 이력이 많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아울러,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쟁점인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를 대조하는 이야기는, 곧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선이 아니냐?”라는 궤변을 초래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는 식의 무모하고 극단적인 논리 말이다(롬3:8). 바울은 이를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단숨에 잘라버린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결과적으로 하나님 영광이 더 드러났으니 내 죄가 오히려 선을 가져왔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구원은 내게서 시작된 것이 전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내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 임해, 마음의 한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라는 진리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가르침이 모든 율법적 형식주의를 깨뜨리며, 동시에 ‘신정론의 문제’로부터 하나님을 변호하는데도 강력한 논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악을 계획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로 세우셨으며, 그 자유를 범해 죄 가운데 빠진 우리를 끝내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1-8절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이냐?”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하셨느냐?”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죄도 유익한 것이냐?”라는 질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 그리고 인간 편의 불신과 무지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바울의 단호한 결론을 거듭 해설하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형식만 붙드는 표면적 종교생활을 반성하고, 참된 마음의 한례를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신정론적 측면에서 보면, ‘왜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하나님은 나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지 않으셨는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그러나 자유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발적 응답을 원하셨다는 사실이, 전체 구원계획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그토록 인간을 높이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죄를 택했으며, 이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심으로써, 우리의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부정하거나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죄와 악마저 선으로 뒤바꾸시는 힘’을 소유하셨음을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선택받았지만 그 선택에 합당하게 살지 않은” 유대인들, 혹은 “복음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고 행위로 증명하지 못하는” 현대의 형식적 신앙인의 문제를 똑같이 마주한다. 이를 명백하게 지적하는 바울의 말씀, 그리고 이를 해석하고 강해하는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한다. 마음의 한례 없이 교회 의식만 따라가는 믿음은 결코 ‘참된 복음 생활’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아, 결국 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엄중한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복음의 본질 회복’이라 요약한다. 이 복음의 본질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이 오직 인간 편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없이 신실하셔서,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셔서, 누구든지 진실로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표면적 할례가 아닌 마음에 할례받은 자”의 존재 방식이다.

결국,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 드러나는 큰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은 거짓되고 죄악된 상태에 머무를 때 하나님을 쉽게 오해하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자 한다. 이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인간의 죄성(罪性)이다. 둘째,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어느 누구도 그 신실함을 흔들 수 없으며,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셋째, 표면적 할례나 외적 의식, 혹은 오랜 신앙생활 경력만으로 자신의 의를 삼으면, 바울이 경고한 유대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넷째, 참된 복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10:10) 것이며, 이는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 즉,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와 결단을 수반한다. 다섯째, 악이 더해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식의 어리석은 궤변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으나, 인간에게 악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가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동시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깨뜨려야만, 바울이 로마서 전반에서 말하는 ‘복음에 의한 자유’(롬8:2)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정론적 의문, 즉 “하나님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두셨나?”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나는 과연 마음에 참된 할례를 받았는가?” “나는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라고 먼저 자문해야 한다.

만약 “나는 틀림없이 세례도 받았고, 교회 몇십 년 다녔으니 안전하다”라며 스스로를 안주시킨다면, 유대인들이 바울의 책망 앞에서 보였던 항변(“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과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인의 명예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으로 입증된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과연 너희가 말하는 복음이 참이로구나”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진정한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이 교회 안의 위선과 죄악을 보고, 오히려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는다”고 말하게 된다면, 겉으로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보다 나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 로마서 3장 1-8절에 대한 강해 전체를 통해, 장재형목사가 거듭 역설하는 바는 명확하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내 영혼이 깊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죄에서 떠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예정하심’ 같은 단어들만 앞세우며 변명한다면, 결국 나 스스로 삶의 변화 없이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렇게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와 믿음이 없다면, 소위 ‘신정론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허공 속 이론에 머무른다. “하나님이 다 하신 일”이라고만 치부하거나, “하나님의 섭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끝맺는다 한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신뢰하거나 복음을 기쁘게 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감사와 감격이 살아 있는 자는, 신정론의 그 어떤 질문도 자기 변명에 쓰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 위대함’을 감사한다.

결국 바울이 ‘유대인의 나음과 불신앙’을 이야기하며 이 신정론적 화두를 던지고,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강력한 경고와 선언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어떤 식으로든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시도를 멈춰야 하고, 죄를 더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려는 이율배반적 발상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의 은혜가 참되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마음의 한례’를 통해 변화되었음을 보여줄 때 드러난다.

본문의 배경과 신정론의 문제,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 그리고 초대교회의 갈등 상황까지 더 폭넓게 언급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기억해야 할 중심 진리는 명료하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자유의지 남용으로 인한 타락조차도 선으로 바꾸실 만큼 크다. 그러나 그 사실이 결코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겉모습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는 ‘이면적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함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단호한 어조 속에 담긴 진실이자,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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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olitude et l’obéissance à Gethsémané – Pasteur David Jang

1. Contexte et signification de la prière à Gethsémané

La scène de la prière à Gethsémané, dans le jardin, est considérée comme l’un des moments les plus dramatiques et les plus profonds de Jésus-Christ avant sa crucifixion. Les Évangiles synoptiques – Matthieu, Marc et Luc – relatent tous cet événement, soulignant l’angoisse et la solitude éprouvées par Jésus, ainsi que sa totale soumission à la volonté de Dieu par la prière. En revanche, l’Évangile de Jean ne décrit pas directement la scène de Gethsémané. On peut interpréter cela en considérant que Jean a déjà suffisamment montré, dans les chapitres 13 à 16, la détermination de Jésus à emprunter la voie de la croix à travers ses discours d’adieu. Bien que chaque Évangile mette l’accent sur des facettes légèrement différentes de la personne de Jésus, la profondeur de la prière qu’il adresse devant l’épreuve de la croix demeure uniforme dans les synoptiques. Quant à l’enseignement spirituel qui s’en dégage, il reste un thème central que tout croyant doit impérativement retenir.

En particulier, Marc 14,32-42 présente de manière condensée tout le déroulement : Jésus entrant dans le jardin de Gethsémané avec ses disciples, les brèves paroles échangées avec eux, sa prière solitaire au point que sa sueur devienne comme des gouttes de sang, puis sa parole finale – « Levez-vous, allons-y ensemble » – qui scelle sa détermination à aller au-devant de la croix. Le Jardin de Gethsémané se trouve au pied du mont des Oliviers, à l’est de la ville de Jérusalem. Le nom « Gethsémané » signifie « pressoir à huile » ou « lieu d’extraction d’huile », confirmant que les olives y étaient réellement pressées. Par ailleurs, les titres de « Messie » en hébreu ou de « Christ » en grec signifient « l’oint », ce qui établit un lien symbolique profond entre Jésus et ce lieu.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dans son explication de la signification du Jardin de Gethsémané, l’importance du mont des Oliviers, souvent associé à la paix et à l’éternité. Lorsque Jésus, le Roi de la Paix, est entré à Jérusalem, les foules attendaient une délivrance immédiate de leurs problèmes, mais le roi n’a pas porté une couronne de triomphe, et c’est une couronne d’épines qui est finalement déposée sur sa tête. Le dernier endroit où il s’est retiré avant d’être crucifié est précisément Gethsémané. Originellement destiné à presser les olives, ce jardin devient le théâtre d’une prière de sang et de larmes à la place d’une onction « officielle ». L’ironie est totale : celui qui mérite d’être couronné comme roi se trouve précipité vers l’humiliation de la mort. Le décor spatial de Gethsémané rend ce contraste encore plus poignant.

Autre détail significatif : juste avant d’arriver à Gethsémané, Jésus et ses disciples ont traversé le torrent du Cédron. Or, lors de la Pâque, d’innombrables agneaux étaient sacrifiés au Temple de Jérusalem, et on estime que leur sang s’écoulait en abondance sous le Temple, puis dans le torrent du Cédron, dont les eaux pouvaient ainsi être teintes de rouge. Jésus, sachant qu’il était l’« Agneau de Dieu » destiné à être sacrifié, a traversé ce torrent chargé de sang, déjà conscient de son propre sort. Selon David Jang, Jésus a non seulement perçu la gravité de cet instant, mais il l’a aussi pleinement embrassée. Il devait se charger du péché du monde, un rôle que ses disciples ignoraient encore, et qu’il devait assumer seul.

Lorsque l’on évoque la prière de Gethsémané, on saisit que Jésus n’a pas traversé cette épreuve comme un héros surnaturel et impassible, mais plutôt comme un « vrai homme » partageant la même chair, la même souffrance et la même crainte que nous. Marc évoque son état en disant qu’il était « saisi d’effroi et d’angoisse » (Mc 14,33). Hébreux 5,7 souligne qu’il a offert « des prières et des supplications, avec de grands cris et avec des larmes ». Cela indique que Jésus a littéralement exprimé sa peur de la mort et sa détresse face à ce qui l’attendait. Comme il le supplie lui-même : « Abba, Père, tout t’est possible, éloigne de moi cette coupe » (Mc 14,36). Confronté à la perspective d’une souffrance inévitable, il a ressenti une angoisse profondément humaine.

Pourtant, cette prière s’achève par la fameuse phrase : « Toutefois,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oi tu veux ». On y discerne une obéissance active « jusqu’à la mort ». Le pasteur David Jang la décrit souvent comme « la foi en la possibilité de Dieu dans une situation qui semble impossible ». Car Jésus, en invoquant « Abba », se confie pleinement au Père tout-puissant, persuadé qu’il conduira toutes choses vers un bien ultime. Si Jésus, chargé de la tâche de sauver l’humanité, a pu aller jusqu’à implorer le Père de lui épargner la coupe, c’est la preuve du poids écrasant de la croix. Mais en choisissant malgré tout la volonté du Père plutôt que la sienne, il a démontré sa foi par des actes concrets.

Un autre point essentiel est la solitude de Jésus pendant que ses disciples s’endorment. Tandis que lui sue des gouttes de sang en priant, les disciples, même alertés de prier pour ne pas succomber à la tentation, ne tiennent pas une heure avant de sombrer dans le sommeil. Cette solitude amplifie encore le caractère rude de la voie de la croix. Quand Jésus est arrêté, tous s’enfuient, et Pierre ira jusqu’à le renier trois fois dans la cour du grand prêtre. Cela prouve à quel point la Passion de Jésus était une route solitaire, que personne ne pouvait réellement partager avec lui. Cependant, Jésus déclare : « Levez-vous, allons ! » (Mc 14,42), exprimant ainsi une détermination déjà affermie par la prière, et qui ne vacillera plus sur le chemin de la croix.

La prière de Gethsémané confronte ainsi le croyant à la question suivante : « Suis-je capable, malgré ma faiblesse, de faire confiance à la bonté de Dieu et de lui obéir pleinement ? » Même si la souffrance et la peur ne disparaissent pas du jour au lendemain, Jésus nous a montré qu’on peut tout de même choisir de crier « Abba, Père » et de finir par embrasser la volonté du Père. C’est le pivot de la compréhension de la croix : Jésus aurait pu éviter ce supplice, et la prière de Gethsémané inclut cette demande – « que cette coupe passe loin de moi » –, mais il a finalement accepté la volonté divine. Ainsi, la croix n’est pas une simple victime impuissante, c’est un acte délibéré d’amour. Gethsémané est donc à la fois le théâtre de la décision ultime et un avant-goût de la crucifixion et de la résurrection.

Selon le pasteur David Jang, la croix ne peut être pleinement comprise sans la prière de Gethsémané. Jésus, bien qu’il fût « roi digne d’être oint », a demandé avec angoisse : « Éloigne de moi cette coupe ». La croix est donc un choix qu’il n’a pas fait à la légère. Toutefois, elle débouche sur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Souffrance et gloire, tout comme croix et résurrection, sont inséparables. La prière de Jésus renferme la force essentielle de cette obéissance décisive. C’est précisément cette vérité qui, encore aujourd’hui, nous offre un enseignement spirituel de la plus haute importance.


2. La faiblesse des disciples et la solitude du Christ

Dans la scène de la prière à Gethsémané, tandis que l’angoisse et la lutte de Jésus occupent l’avant-plan, on découvre en contrepoint frappant la faiblesse des disciples. Dans Marc 14,26 et suivants, on voit les disciples, après le dernier repas, chanter un cantique puis se rendre au mont des Oliviers. Jésus, conscient de la Passion imminente, est déjà en proie à l’angoisse, mais les disciples, peu conscients de la gravité de la situation, le suivent avec un certain détachement. Pierre déclare même : « Quand bien même tous t’abandonneraient, moi je ne le ferai pas », mais cette résolution se brise en un instant lorsque Jésus est arrêté.

En arrivant à Gethsémané, les disciples restent avec Jésus pour prier, mais s’endorment rapidement. Matthieu, Marc et Luc soulignent qu’ils se sont assoupis à plusieurs reprises. Jésus leur reproche leur incapacité à veiller, ne serait-ce qu’une heure, et leur demande de « veiller et prier pour ne pas entrer en tentation ». Pourtant, leur fatigue, leur incompréhension ou leur insensibilité spirituelle les enchaînent. Dès lors que Jésus est effectivement arrêté, ils fuient tous. Même Pierre renie Jésus par trois fois dans la cour du grand prêtre. Les évangiles synoptiques exposent sans fard cet échec cinglant des disciples.

L’épisode du jeune homme anonyme dans Marc 14,51-52 attire particulièrement l’attention. On y voit un jeune homme, vêtu seulement d’un drap, suivre Jésus de près. Quand on tente de l’arrêter, il s’enfuit nu, laissant son drap derrière lui. Il existe une hypothèse selon laquelle ce jeune homme pourrait être Marc lui-même. David Jang relève que cet épisode prouve que la communauté primitive n’a pas cherché à dissimuler ses défaillances. L’affaire de Gethsémané montre, de manière crue, la fragilité de toute résolution humaine.

L’exemple de Pierre, qui va plus loin dans la faute en reniant Jésus, est encore plus probant. Lui qui proclamait qu’il était prêt à donner sa vie pour son Maître se défait en une seconde devant la question d’une simple servante, jurant ne pas connaître cet homme. Lorsque le coq chante après le troisième reniement, Pierre se souvient de la parole de Jésus et fond en larmes. C’est l’échec de l’un des disciples les plus influents, et cela confirme la prophétie : « Je frapperai le berger, et les brebis seront dispersées. »

Ainsi, la solitude de Jésus en devient plus évidente encore. Même ses plus proches compagnons, qui juraient fidélité éternelle, l’ont abandonné au moment crucial et ont tremblé devant la parole d’une servante. Jésus a été abandonné par tous, placé dans une situation où personne ne pouvait réellement le soutenir. La Passion de Jésus était un chemin d’isolement complet, d’autant plus qu’il était le seul à pouvoir porter le péché du monde. David Jang souligne que cette solitude était inévitable dans l’histoire du salut, personne d’autre que Jésus ne pouvant payer le prix pour le péché de l’humanité. Même si les disciples étaient restés éveillés pour prier, cela n’aurait pas changé la nécessité que Jésus porte seul ce fardeau. Leur ignorance et leur trahison ont seulement accru la sensation d’abandon.

De manière étonnante, après la Résurrection, les disciples apparaissent totalement transformés. Pierre devient un leader courageux, prêchant l’Évangile avec hardiesse dans les Actes des Apôtres, et les autres disciples se dressent face aux persécutions pour répandre l’enseignement de Jésus dans le monde entier. Leur échec à Gethsémané s’est mué en un point de départ pour une repentance sincère et une prise de conscience de leur faiblesse. Ils ont par la suite mis leur confiance dans le Seigneur ressuscité et dans la puissance du Saint-Esprit. David Jang explique que leur chute n’était pas un abandon définitif, mais l’occasion d’un nouveau départ. De même, les croyants d’aujourd’hui, confrontés à leur propre fragilité, peuvent se relever et devenir des témoins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s’ils reviennent au Seigneur et expérimentent l’action de l’Esprit.

Ainsi, le récit de la prière à Gethsémané n’illustre pas seulement la solitude de Jésus : il montre aussi sans détour l’incapacité des disciples à tenir bon par leurs propres forces. Malgré la bonne volonté initiale, ils se sont effondrés au premier choc venu. Mais l’histoire biblique ne s’arrête pas à cet échec. La Résurrection de Jésus couvre leur faute et leur offre la possibilité de reprendre la mission qu’il leur a confiée. Au final, le comportement des disciples à Gethsémané révèle notre propre vérité : séparés de Dieu, nous ne sommes capables d’aucun bien. Et la terrible solitude de Jésus souligne la nécessité de son sacrifice pour racheter une humanité incapable de se sauver elle-mêm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ouvent dans ses prédications : l’épisode de Gethsémané n’est pas juste un moment de détresse du Seigneur, mais un miroir dans lequel l’Église, à chaque chute, devrait se contempler afin de revenir à Dieu. Les évangiles relatent ces faits sans rien édulcorer, montrant qu’il n’y a « pas d’humain infaillible » et qu’il existe néanmoins « un chemin de restauration » pour les repentis. La faiblesse des disciples à Gethsémané, associée à la Passion de Jésus, nous rappelle combien nous avons besoin de la grâce de Dieu. Par la suite, la victoire de la Résurrection illustre que cette grâce dépasse amplement toutes nos défaillances et restaure même ceux qui l’ont trahi.


3. La voie de l’obéissance et de la marche commune

Le message central que Jésus nous laisse à Gethsémané est celui de « l’obéissance absolue » à la volonté du Père. Dans sa prière, il supplie : « Ôte de moi cette coupe », révélant pleinement sa faiblesse humaine. Pourtant, il ajoute aussitôt : « Cependant, non pas ma volonté, mais la tienne ». Ce n’est pas un abandon résigné, mais l’acceptation volontaire de la souveraineté de Dieu dans un acte de foi, fondé sur la certitude que le Père conduit toute chose vers un bien ultime.

Il serait facile de penser : « Jésus l’a pu, car il est Fils de Dieu ». Mais les Évangiles ne cachent pas l’intensité de la lutte intérieure qu’il a menée, au point que sa sueur devînt comme des gouttes de sang. Malgré cela, il choisit le plan du Père. Dès lors, il n’hésite plus à se rendre à ceux qui viennent l’arrêter, déclarant : « Levez-vous, allons ! » (Mc 14,42).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 « Une fois la bataille spirituelle gagnée à Gethsémané, Jésus n’a plus eu la moindre hésitation. »

Son obéissance a porté un fruit d’une portée insondable : la croix, signe de mort et d’humiliation, s’est transformée en chemin de salut pour l’humanité, et a débouché sur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Philippiens 2 explique que parce que Jésus est allé jusqu’à « l’obéissance de la croix », Dieu l’a souverainement élevé. La croix a donc été la manifestation la plus éclatante de l’amour et de la puissance divine, rendue possible par l’obéissance de Jésus.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c’est le choix même de Jésus d’embrasser la croix qui nous a ouvert la porte du salut. S’il a semblé « passif » en subissant l’arrestation, c’était en réalité l’expression la plus active et la plus volontaire de l’amour.

Par ailleurs, Jésus nous invite sur ce même chemin en disant : « Si quelqu’un veut venir après moi, qu’il se renie lui-même, qu’il se charge de sa croix et qu’il me suive. » C’est le sens profond de la « marche avec Jésus ». Il arrive que certains croyants croient que la foi supprime la souffrance, alors que l’Évangile avertit clairement : « Dans le monde, vous aurez des tribulations. » Cependant, la prière de Jésus à Gethsémané nous garantit que ce chemin n’est pas sans espoir. Même si la souffrance ne s’efface pas immédiatement, nous pouvons avancer dans la confiance que « la volonté du Père concourt finalement au bien ». Devant Gethsémané, nous apprenons qu’il est possible de demeurer fermes dans l’obéissance parce que Jésus est passé par là avant nous.

Ainsi, l’« obéissance » et la « marche commune » avec Christ sont indissociables. Après sa mort et sa résurrection, Jésus a promis : « Je suis avec vous tous les jours, jusqu’à la fin du monde » (Mt 28,20). Les disciples, d’abord endormis et effrayés à Gethsémané, sont devenus par la suite des témoins intrépides, allant même au martyre. Ils ont répondu à l’appel de Jésus : « Allons ensemble ! » Nous aussi, chaque fois que nous choisissons « non pas ce que nous voulons, mais ce que Dieu veut », nous entrons plus profondément dans la communion avec Christ.

Le pasteur David Jang, fort de sa longue expérience pastorale, partage souvent comment la méditation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l’a soutenu dans ses épreuves, grandes et petites. Au début, on prie : « Que cette coupe passe loin de moi », mais au fil du temps, on demande avant tout : « Montre-moi ta volonté, Père », et on découvre que s’y soumettre ouvre des chemins insoupçonnés et conduit à la vie et à l’espérance. Même si les problèmes ne se résolvent pas instantanément, notre perspective change : nous commençons à discerner ce que Dieu veut accomplir à travers cette situation.

Dès lors, l’obéissance n’est pas une résignation passive. Si Jésus a subi la crucifixion d’apparence « passivement », il a en réalité exprimé l’acte d’amour le plus fort qui soit, en se livrant de son plein gré. De la même manière, si nous nous engageons sur ses traces, la souffrance ne nous écrase plus ; au contraire, nous levons les yeux pour contempler le dessein divin. C’est la liberté et la délivrance procurées par la voie de l’obéissance et de la communion avec Christ. Celui qui s’avance ainsi sait qu’il marche sur un sentier que Jésus a déjà parcouru, et il entend dans les difficultés la voix du Maître qui dit : « Levez-vous, allons ensemble. »

Enfin, après la prière à Gethsémané, Jésus a suivi jusqu’au bout le chemin qui l’a conduit à la crucifixion. À l’époque romaine, la croix était synonyme d’infamie et de souffrance extrême, dépourvue de toute idée de gloire. Mais par la résurrection, il s’est révélé que ce chemin, bien que plein de honte et de douleur, était en réalité celui de la victoire et du salut. Aujourd’hui, beaucoup préfèrent ne retenir que la « gloire de la résurrection », négligeant la souffrance de la croix. Or, sans la préparation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il n’y aurait pas eu la croix, et sans la croix, pas de résurrection. David Jang aime à répéter : « Sans Gethsémané, pas de croix ; sans la croix, pas de résurrection. » La douleur, la solitude et l’obéissance absolue de Jésus ont donc été les prémices de la puissance de la résurrection.

Cette vérité se vérifie aussi dans la faillite et la restauration des disciples. Ils se sont lamentablement effondrés à Gethsémané, mais après la résurrection, Jésus les a relevés, et ils ont été renouvelés par l’Esprit. Leur passé de trahison, loin de les condamner, est devenu le tremplin d’une compréhension plus profonde de la grâce, faisant d’eux les piliers de l’Église naissante. Pierre, qui avait renié son Maître, se souvient de son échec et devient capable d’accueillir et de soutenir ceux qui tombent. Leur drame à Gethsémané se mue en signe du pardon que le Ressuscité leur accorde, et en symbole de la surabondance de la grâce.

À travers Gethsémané, nous découvrons combien il est facile à l’homme de choir, et combien la solitude de Jésus a été extrême. Mais nous comprenons aussi que, malgré tout, Jésus a entièrement fait confiance au Père et remporté la victoire, nous ouvrant ainsi la voie. Les auteurs évangéliques, en décrivant sans voile cette prière intense, ne cherchent pas seulement à relater la souffrance de Jésus, mais aussi à nous inviter sur ce chemin. Jésus, au bout de cette route, a obtenu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et les disciples, à leur tour, ont trouvé dans la foi en la résurrection la force de relever la tête et de bâtir l’Église, parvenant jusqu’à nous qui lisons l’Évangile aujourd’hui. À notre tour, méditer la prière de Gethsémané nous permet de traverser les épreuves de la vie en disant : « Abba, Père, non pas ma volonté, mais la tienne. »

Ce chemin de souffrance et de gloire n’est pas toujours facile. Nous pouvons traverser la vallée des larmes, être trahis et abandonnés, et tomber dans la honte en prenant conscience de nos faiblesses. Pourtant, c’est sur cette route que Jésus nous précède déjà, nous invitant inlassablement à le suivre : « Allons ensemble. » Et c’est précisément parce que ce sentier ne mène pas à la défaite finale, mais à la promesse de la résurrection et de la vie, qu’il est source de réconfort. Ainsi la « communion » se réalise. La prière de Gethsémané – l’obéissance et la marche avec Jésus – est donc la démonstration concrète de la « confiance totale en l’amour et la providence de Dieu », même au cœur des épreuves et des larmes.

Au bout du compte, la prière de Gethsémané devient le modèle le plus concret de notre parcours spirituel. Tout au long de la vie, nous rencontrons inévitablement des « Gethsémané » personnels. À ces moments-là, la question est de savoir si, à l’exemple de Jésus, nous pouvons clamer : « Père, écarte cette coupe, mais que ta volonté s’accomplisse, et non la mienne. » Jésus, tout en éprouvant la peur de la mort, a choisi de se soumettre et d’ouvrir ainsi la voie au salut de l’humanité. Quant aux disciples, ils ont échoué lamentablement, mais après la résurrection et dans la puissance de l’Esprit, ils ont surmonté leur honte pour proclamer l’Évangile.

Le pasteur David Jang affirme : « Quels que soient les souffrances ou les manquements que nous vivions, si nous prenons modèle sur la prière de Gethsémané, nous pourrons faire l’expérience concrète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 Celui qui ne perd pas de vue la prière de Gethsémané ne peut ignorer la profondeur de la croix ni la puissance de la résurrection. Même s’il tombe et pleure, Dieu l’amènera à la restauration et au service de sa volonté. Et c’est précisément cette route qu’on appelle « marcher avec Jésus ». Le Seigneur, qui est passé par là, promet d’y demeurer avec nous.

En guise de synthèse, nous avons d’abord examiné le contexte et la signification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puis mis en évidence la faiblesse des disciples et la solitude du Christ, avant d’aborder la fécondité spirituelle de l’obéissance vécue en communion avec lui. Certes, la croix était un instrument cruel et dégradant, mais par la prière de Gethsémané, Jésus s’y est préparé pour réaliser l’œuvre du salut. Les disciples, conscients de leur péché et de leur impuissance, ont ensuite été rétablis dans la foi grâce au Ressuscité, posant les fondations de l’Église. Ainsi, Gethsémané est devenu un « passage obligé » que toute personne croyante se doit de méditer.

Dans l’épreuve, nos propres limites se manifestent souvent au grand jour. Pourtant, Gethsémané démontre que tout ne finit pas là. Si nous crions « Abba, Père » et nous en remettons à lui, même l’ombre de la mort peut être traversée et déboucher sur la joie de la résurrection. Les disciples se sont endormis et ont fui, mais ils ont été pardonnés et sont devenus les témoins les plus ardents de Jésus. Aussi, quand nous trébuchons et montrons notre faiblesse, souvenons-nous qu’il nous appelle encore : « Allons ensemble. »

Au final, la prière de Gethsémané révèle le lien indissociable entre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et nous enseigne comment, en tant que disciples, nous devons imiter le Christ. Son chemin fut empli de souffrance et de solitude, mais il se révéla être en même temps la réalisation du plan divin de salut. À Gethsémané, Jésus a porté son obéissance à la perfection en choisissant la volonté du Père plutôt que la sienne, rendant possible la rédemption de toute l’humanité. Quant aux disciples, ils se sont effondrés, puis relevés par la grâce de la résurrection, et leur témoignage a fondé l’Église jusqu’à nous.

Le pasteur David Jang résume ainsi : « Sans Gethsémané, pas de croix ; sans la croix, pas de résurrection. » Il en va de même dans nos vies : à chaque « petit Gethsémané » que nous traversons, nous sommes appelés à nous souvenir de la prière de Jésus et à faire nôtre la même attitude. Lorsque nous devons faire face à une « croix » personnelle, il est naturel de prier d’abord pour qu’elle nous soit épargnée. Pourtant, l’exemple de Jésus nous montre que, si la volonté du Père l’exige, le chemin vers la plénitude passe par l’obéissance. Et au bout de ce chemin, non pas la mort, mais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nous attend. Tel est le cœur de l’Évangile, et c’est aussi le centre de la foi, que le pasteur David Jang ne cesse de proclamer.

客西马尼的孤独与顺服 -张大卫牧師


1. 客西告的背景

在客西马尼园的祷告情景,是耶稣基督在面对十字架死亡之前,所展现的最戏剧性且深邃的时刻之一。马太福音、马可福音、路加福音这三本被称为“对观福音”的经文,都共同记述了这件事件。透过它们,我们能够看见耶稣所经历的痛苦与孤独,以及祂如何通过祷告完全顺服上帝的旨意。相较之下,约翰福音中并未直接记载客西马尼祷告的场景。有一种解释认为,约翰在约翰福音第13章至16章的“告别讲论”中,已经充分展现耶稣早已决意走向十字架的道路,所以没有再记载客西马尼的片段。虽然各卷福音书对耶稣形象的着重点各有差异,但耶稣在面对十字架这一极端苦难时所献上的深层祷告,却在对观福音中都得到一致的强调。这个祷告所包含的属灵教训,至今仍是所有信徒都不可忽略的核心主题。

特别是在马可福音14章32至42节中,从耶稣进入客西马尼园的那一刻起,到与门徒简短的对话,再到祂独自祷告到“汗珠如大血点”般坠下的情形,最后祂宣告“起来,我们走吧”,决然迈向十字架的整个过程,都被简明而强烈地展现了出来。客西马尼园位于耶路撒冷圣殿以东的橄榄山脚下,园名意为“榨油坊”或“压榨橄榄油的地方”,象征着这里原本就是收割橄榄果实并压榨出油的地方。同时,“弥赛亚”(希伯来语)或“基督”(希腊语)本身就有“受膏者”之意。在这一点上,耶稣与这处地方之间,存在着深刻的属灵象征性联系。

张张大卫牧师在阐释客西马尼园的意义时,强调橄榄山向来象征“平安”与“永恒”。当人们期待耶稣以“和平之王”的姿态进入耶路撒冷并立刻解决各种问题时,耶稣所戴的却不是胜利的冠冕,而是苦难的荆棘冠。祂被钉十字架之前,最后停留的地方正是客西马尼园。本该是“受膏礼”似的地方,却成为耶稣用痛彻心扉的汗水与泪水祈祷的舞台,从而形成了强烈的对比。原本理当受王者尊崇的弥赛亚,却反被逼迫走向最卑贱、最痛苦的死亡之途,而客西马尼的场景使这一对比更加鲜明。

从另一个角度来看,耶稣和门徒在进客西马尼之前所渡过的汲沦溪(或基德龙溪),其背景也耐人寻味。在逾越节期间,耶路撒冷圣殿要一次性献上数十万只羔羊为祭,这些牺牲的血会沿着圣殿下方流入汲沦溪,染红整片山谷。耶稣很可能是在踏过这条染满牺牲羊血的溪流之际,想到自己即将成为“上帝的羔羊”,被献上流血舍命的命运。张张大卫牧师如此解释,耶稣早已感受到其中的重量,却并未躲避。那位要替世人的罪孽作挽回祭的羔羊,将独自承担这一幕尚未向门徒们揭示的救赎大戏。

回想客西马尼的祷告,我们可以更明确地看见,耶稣并非以超人的英雄气概,轻而易举地做出决断,而是真真实实地经历了如同我们一般的肉体苦痛与恐惧,祂是一位真正的“完全的人”。马可福音记载耶稣“惊恐,极其难过”(可14:33),希伯来书5章7节也提到耶稣“曾以大声哀哭和流泪,祈祷恳求”。这都暗示着,耶稣在客西马尼祷告中,向天父倾吐了对死亡的恐惧与担忧。“阿爸,父啊,凡事都能的,你把这杯撤去吧”(可14:36)这样的紧迫呼求,明显展现了耶稣面对无法回避的苦难时,所经历的极度挣扎与痛楚。

然而,祂的祷告最终归结于“不要照我的意思,只要照你的意思”(可14:36)。其中蕴含着“顺服至死”的强烈顺从。张张大卫牧师常将其称为“在看似不可能的境况中,相信上帝可能性的信心”。因为当耶稣以“阿爸,父啊”呼唤,并将自己完全托付时,正是基于对全能且美善之父的绝对信赖。即便是背负“拯救人类”这样崇高使命、与我们层次全然不同的耶稣,也曾向上帝呼求“挪去这杯”,可见祂所要承担的痛苦何等重大。然而,祂最终仍选择了天父的旨意,而不是自己的旨意,以行动印证了这份信心。

在这个过程里,我们要注意到,耶稣独自进行祷告挣扎时,门徒们却沉睡过去了。就在耶稣汗如血滴般地祈求的身旁,门徒们连一小时也无法警醒,充分展现了人性的软弱。孤独,无疑加深了耶稣走向十字架之路的残酷程度。到后来,耶稣被捉拿时,门徒四散逃离;甚至彼得在公会院子里三次不认主。这也证明了,耶稣的受难之途是任何人都无法分担的孤独之路。然而,当耶稣说出“起来,我们走吧”(可14:42)时,祂已借着祷告,超越了对死亡的恐惧,坚决地踏上十字架的道路。正是这份祷告的力量,使耶稣得以无所动摇地前行。

归根结底,客西马尼的祷告向每一位信徒提问:我们是否能够在诚实袒露自己人性软弱的同时,仍然全然相信上帝的良善并愿意顺服祂?即便苦难与惧怕不会立即消失,但在“阿爸,父啊”的亲密呼唤中,我们终能向天父的旨意降服。耶稣以身作则,让我们看见祂原也可以选择逃避十字架,但祂却在祷告中仍将天父的旨意置于首位。这使十字架不再只是被动的牺牲,而是基于爱与决心的自觉奉献。可以说,客西马尼这一幕是理解十字架的关键。耶稣不但没有逃避十字架,而且在痛苦与惧怕中,依旧将上帝的旨意置于至高无上。因而,十字架不仅不是懦弱的牺牲,反而成为意志坚定的爱的决定。客西马尼正是这一决定在现实中彰显的起点,同时也预示了随后的十字架与复活事件的性质。

张张大卫牧师多次在讲解与证道中提到,若不先认识客西马尼的祷告,就无法真正理解十字架的深意。耶稣虽是“理当受王者膏抹”之人,却在极度痛苦中呼求“挪去这杯”,足见十字架的选择并非轻率。而与此同时,十字架又与复活的荣耀紧密相连。苦难与荣耀、十字架与复活之间并无断裂;在耶稣的这场祷告中,正蕴含了超越痛苦的终极顺服力量。这一事实,也为当今信徒带来重要的属灵教训。


2. 徒的基督的孤

在客西马尼祷告的画面中,我们一方面见到耶稣的痛苦与祷告挣扎被推向前台,另一方面则显现了与之形成强烈对比的门徒软弱。马可福音14章26节之后记载,门徒们在最后的晚餐结束后“一同唱了诗,就出来往橄榄山去”。耶稣已经预见到自己即将面临的苦难,但门徒们似乎仍未能体会那种严峻感,而是怀着较为轻松的心情随主同行。彼得甚至信誓旦旦说:“众人虽然为你的缘故跌倒,我却永不跌倒。”但这一豪言在耶稣被捉时,很快就被击碎。

当耶稣登上橄榄山抵达客西马尼园后,门徒们等待祂祷告之际,很快就困倦入睡。马太福音、马可福音、路加福音都重复记载了他们无法保持警醒、接二连三地睡着的画面。耶稣质问他们难道连一个时辰也无法坚守吗,并嘱咐他们要“警醒祷告,免得入了迷惑”,但门徒仍因疲惫、无知或属灵麻木而深陷睡意。直到耶稣真正被捉拿时,他们才猛然惊慌失措地四散逃跑,连彼得也在大祭司该亚法的院子里三次否认主。对观福音都坦率地记载了门徒们这番失败,毫不加以掩饰。

尤其是马可福音14章51-52节中所提到的那位“只披着一块布跟随耶稣的青年”,更引人注目。经文说这青年在快要被人捉住时,丢下那块布赤身逃走。有人推测这个青年就是马可自己。张张大卫牧师由此指出,初代教会并未试图隐瞒这段尴尬经历,反而让我们看见:门徒的决心和意志是多么容易在巨大压力下崩溃。客西马尼事件并非某一人的单次失误,而是揭露“人在关键时刻可能多么脆弱”的赤裸事实。

更严重的例子是彼得的否认事件。“我愿意为你舍命”的彼得在审判庭院子里,被一个使女的追问就吓破胆,结结巴巴地说自己“根本不认识那个人”。在第三次否认主之后,鸡叫声响起,彼得忆起耶稣的话,痛哭失声。此刻,一向是门徒团体核心的彼得,跌到最深的失败之中,也验证了耶稣那句“击打牧人,羊就分散”的预言的确应验。

由此可见,耶稣的孤独感更显无比强烈。那些原本誓言毕生跟随、珍藏主教诲的人,在关键时刻全都离祂而去,甚至对侍女的指责都惶恐不已。耶稣在祂最爱的门徒面前,也无法获得任何依靠,只能独自面对被捕与审判。祂走的这条十字架道路,究竟是何等孤单!耶稣的这种孤独,一方面展现祂真实的人性,另一方面则凸显“一位无罪者独自扛起全人类罪债”的图景。张张大卫牧师解释说,耶稣的孤独在救赎史上具有必然性,因为祂所承担的罪债,无法与任何人分享。即使门徒能保持警醒,也无法替代耶稣走那条路。最终,这是一条只有耶稣自己才能独自背负的道路,而门徒们的无知与背叛,更加深了祂的孤立与痛苦。

然而,令人感到惊奇的是,复活之后,门徒们却完全变得不同。彼得在《使徒行传》中成为刚强传讲福音的领袖,其余门徒也不惜冒着迫害,将耶稣的教训传到世界各地。他们在客西马尼的失败,反而让他们在回转与省察后,更深地投入与主同行的生活。张张大卫牧师指出,门徒们的失败并非永久的落伍,而是重新出发的契机。同理,我们在信仰生活中,也会同样跌倒,但复活的耶稣与圣灵的同在却能使我们重新得力,让我们见证十字架与复活的福音。

因此,客西马尼园的祷告情景,既展现了耶稣的孤独,也赤裸地呈现了门徒的软弱,强调“人无法单凭自己站立”。我们可能口口声声说决不离弃主,但在现实的惧怕和试炼面前,却会轻易倒下,正如门徒亲身演绎的那样。圣经的讯息却并未止于此,而是进一步展示:耶稣复活后,饶恕并遮盖了门徒的失败与软弱,使他们得以再度走上服事的道路。从整体角度看,客西马尼园中门徒的表现,让我们明白“没有上帝,我们不能自立”。同时,也使我们更深体会到耶稣的孤独正是为拯救如此软弱的人类而必须走的道路。

张张大卫牧师常常在讲道时强调,客西马尼园的事件并非“主曾经苦难过的一幕”而已,而是在教会和信徒遭遇失败时,促使我们反思并重新回到主面前的榜样。门徒们的经历固然羞耻,但福音书毫无保留地记载它们,其原因在于:要向我们证明“没有不会失败的人”,同时“即便如此,上帝仍为我们预备了回转之路”。因此,客西马尼事件中门徒的软弱,正好凸显“若没有耶稣的牺牲,我们自身无法成就任何善”的真理;但随后复活所带来的胜利,又预示了那能胜过软弱的神圣能力在我们的生命中依然有效。


3. 同行之路

耶稣在客西马尼园所教导的核心,若要用一句话概括,便是对天父旨意的“绝对顺服”。在客西马尼的祷告中,耶稣因人性的软弱而真心祈求“把这杯撤去”。然而,与此同时,祂依旧高声呼喊:“然而不要照我的意思,只要照你的意思。”这是出于对父神的绝对信赖所做的主动抉择,并非消极或被动的无奈。

许多人可能会说:“那毕竟是耶稣才做得到。”但福音书清楚告诉我们,耶稣真实地历经了超过人所能想象的痛苦与恐惧。“汗如血点”是对极度精神压力和肉体痛苦的形象描述。即便如此,耶稣仍然在祷告中紧紧抓住父神的旨意,随后便无人能阻止祂走向十字架。当祂说“起来,我们走吧”时,实际上“祷告已经决定了一切”。张张大卫牧师形容:“在客西马尼祷告后,耶稣的内心再无丝毫动摇。”

这样的顺服最终结出了何种果实?那就是耶稣在十字架上舍命,为全人类打开救赎之路,并通往复活的荣耀。腓立比书第二章宣告,耶稣“顺服至死,因此上帝将祂升为至高”。也就是说,十字架不仅没有沦为羞辱,反而成为彰显上帝大爱与大能的场所。耶稣的顺服成就了这神圣的果实。张张大卫牧师解释说,“耶稣选择走上十字架本身,就已经为我们打开了救恩之门。”人们或许看到的是耶稣毫无抵抗地被捕,但那正是祂最能动、最主动地爱别人、为人牺牲的表现。

进一步说,耶稣吩咐门徒:“若有人要跟从我,就当舍己,背起他的十字架来跟从我。”这就呼召我们同走“顺服之路”,与祂同行。有时有人误以为“信耶稣后,一切苦难都会消失”,但实际上,福音却警告“在世上你们有苦难”(约16:33)。然而,耶稣在客西马尼所经历的痛苦、孤独与祷告顺服,都证明那并非绝望的终局。当我们回想祂在客西马尼的情景,即便困境无法立刻移去,我们也能凭着对“父神最终要成就美好旨意”的信心继续前行。

可见,“顺服”与“同行”是密不可分的。当耶稣走完十字架的路,复活后向门徒应许:“我就常与你们同在,直到世界的末了”(太28:20),且通过圣灵持续在信徒中实现。初代门徒虽在客西马尼沉睡、逃跑,却在复活主的呼召下,后来勇敢传扬福音,甚至为主殉道。他们的改变,印证了“主呼唤我们:起来,一起去吧”这一真理。我们在日常生活中,每当面临抉择时,若能学会“不照我的意思,只要照父神的意思”,就能切实地与基督同行。

张张大卫牧师在他多年的牧会经历中,经常见证自己如何藉着默想客西马尼祷告,度过生命中大小考验。他的见证核心在于:在痛苦的问题面前,人总会先祈求“让我不必喝这苦杯”,但若能最终回到“主啊,求你指示我父神的旨意”,并顺服于此,就会发现一条先前从未想象到的道路在眼前展开,带来生命与盼望。问题本身可能不会立刻消失,但当我们开始用新的眼光看待苦难,并且用心思考“上帝借着这一过程想成就什么”,就会获得截然不同的视野。

这里所说的“顺服”,绝非消极的妥协。耶稣在十字架上看似“被动”受刑,实则是把自己交付出去的最积极的爱。我们若跟从这样的道路,即便在苦难中也不会陷于恐惧与绝望,反倒会张开属灵的眼睛,去窥探“上帝在此刻的带领”。这是顺服与同行之路所带来的自由与真正的释放。当人选择踏上这条路,就会领悟“这是耶稣早已走过的路”,在各种患难中也能听到主对我们说“起来,我们走吧”。

最后,客西马尼祷告之后,耶稣的确走向罗马帝国时代最残酷、最屈辱的刑罚——十字架。一般无人会将它视为“荣耀之路”,但由于耶稣的复活,这条受辱与痛苦之路反而成了胜利与救恩之路。在信仰生活中,我们往往只想享受“复活的荣耀”,却不愿正视耶稣在客西马尼园里所预备的受难之路。张张大卫牧师反复强调:“没有客西马尼,就没有十字架;没有十字架,也就没有复活。”正因耶稣的痛苦、孤独与绝对顺服,复活的能力才得以完全彰显。

这同样适用于门徒的失败与复兴。客西马尼园里彻底跌倒的门徒,正是那群在主复活后痛悔悔改,并完全更新自己的人。过去的背叛与羞耻,也成为他们在日后建立初代教会的重要资产。彼得正是因为曾三次否认耶稣,才更能在别人软弱时体谅、扶持对方。这意味着,客西马尼的眼泪与孤独,并非注定要以悲剧收场;相反,它在复活的生命中得以被转化为丰富的恩典。

因此,客西马尼园的情景,不仅让我们看见“人会多么轻易地倒下”,也使我们看见“耶稣曾有多么孤独”。但同时,我们也看到“即使如此,只要我们相信并顺服父神到底,就能如耶稣一般得胜”这一条真理。福音书作者没有隐藏耶稣在那场祷告中的痛苦,而是将之完整呈现出来,正是要告诉我们:我们同样被邀请走这条道路。耶稣在尽头得着复活的荣耀,门徒也因复活得以更新,并成为创建教会的坚实见证人。今天的我们,只要默想客西马尼的祷告,也能在各种试炼里发出“阿爸,父啊,不要照我的意思,只要照你的意思”的宣告。

当然,这条道路并非一路平坦,途中或许要走过流泪的幽谷,也可能遭遇背叛与冷漠,当我们看到自己的软弱与不足时,也难免羞愧。但最重要的是,耶稣已先行走过这条路,并在途中对我们呼喊“我们一起走吧”。这意味顺服并非指向痛苦的结局,而是通向复活与生命的应许。在这里,“同行”二字真正得以落实。客西马尼的祷告,所揭示的“顺服与同行之路”,正是一种能在眼泪与苦难中仍深信上帝之爱与带领,并具体实践在生活之中的信仰。

因此,在我们个人信仰的旅程中,客西马尼园的祷告可谓最贴近现实的典范。每个人在生命中,都难免会面临各式各样的“客西马尼时刻”。在那些时刻,我们是否能够像耶稣一样,向天父哭诉“请把这杯撤去”,却又同时说出“但不要照我的意思,只要照你的意思”呢?耶稣在死亡的阴影下仍然顺从,这顺从不仅带来了对全人类的救赎,也成就了复活的喜乐。门徒虽然当时失败地沉睡、逃走、否认主,但却在复活后,在圣灵的大能之下得着恢复,更大有能力地传扬福音。

张张大卫牧师在此基础上强调:“无论如今我们面对何种苦难与软弱,只要效法耶稣在客西马尼园的祷告,我们就能亲身体验十字架和复活的真实。”不忘客西马尼祷告的人,也不会错失十字架的深意与复活的大能;即便经历眼泪与失败,也会在神的恩典中被恢复并承担使命。这条路同时也是对耶稣“起来,我们走吧”之呼召的响应。耶稣已经先行走过,并承诺在我们走这路时与我们同在。

总而言之,第一小节我们探讨了客西马尼祷告的背景和意义;第二小节对比了门徒的软弱与基督的孤独;第三小节则讨论了耶稣的顺服,以及与祂同行所结出的属灵果效。十字架虽然残酷羞辱,但源自耶稣祷告的顺服之工,却经由复活而成为最强而有力的生命与拯救标志。门徒在此过程中虽深刻体会自己的罪性和无能,但也在复活的主里得到饶恕与重建,进而奠定教会传播福音的根基。客西马尼园就是这所有戏剧性事件的前奏场景,因此也一直是所有基督徒应当反复默想与研读的焦点。

时至今日,我们在苦难和试炼中,往往会看见自己的软弱被暴露无遗。然而,客西马尼的耶稣证明了,那并非终点。即使哭喊“阿爸,父啊”时充满绝望,只要相信并将一切托付给天父,最后我们也能经历连死亡都无法胜过的复活喜乐。门徒们虽曾沉睡、背叛,却因复活的耶稣而彻底翻转,成为史上最坚固的福音见证人。所以,无论我们如今面对怎样的失败与软弱,都要记得在那条通往十字架的路上,耶稣依旧向我们说“我们一起走吧”。

最终,客西马尼的祷告,清楚地告诉我们:十字架与复活不可分割。耶稣所走的路,交织着苦难与孤独,但同时也是实现上帝救恩计划的荣耀之路。在客西马尼的祷告中,耶稣将父神的旨意置于自己意愿之上,成就了顺服的极致,并使全人类得以靠近救赎之门。门徒虽在此时失败,却于复活的主里重新振作,奠定了今日我们能借教会之力听闻福音、接受信仰的根基。正如张张大卫牧师屡次强调:“若没有客西马尼,就没有十字架;若没有十字架,就没有复活。”在这一脉络下,我们也应当意识到,在个人生命中的种种“客西马尼”时刻,若能记得耶稣当时所做的祷告,并效法其态度,便是真正与基督同行。即便眼前的十字架是沉重且无法规避的,我们也可以像耶稣那样,先在痛苦中呼喊“请让我避过这苦杯”,但依旧宣告“若这是父神的旨意,我就甘愿走这条路”。唯有在这样的勇气与顺服中,我们才能步上耶稣所走的道路。那条道路的终点并非死亡,而是复活的荣耀。而这,正是客西马尼祷告所传达、以及张张大卫牧师反复强调的福音核心与信仰实质。

ゲッセマネの孤独と従順 – 張ダビデ牧師


1. ゲッセマネの祈りの背景と意味

ゲッセマネの園での祈りの場面は、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の死を目前にして示された、最も劇的でありながら深遠な瞬間の一つと評価される。福音書のうちマタイ、マルコ、ルカ(いわゆる共観福音書)はこの出来事を共通して伝えており、そこからイエスが経験された苦悩と孤独、そして祈りを通して神の御心に完全に従われる姿が、いかに生々しく描かれているかがわかる。一方、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はゲッセマネの祈りの場面が直接的に記録されていない。ヨハネ福音書では、すでに13章から16章にかけての別れの説教を通して、イエスが十字架への道を決意されたことを十分に示していると解釈できるからだ。福音書ごとにイエスに焦点を当てる視点は若干異なるが、イエスが十字架という極度の苦難に直面されたときに捧げられた祈りの深さは、共観福音書すべてに一貫して示されている。そしてその祈りに含まれる霊的教訓は、現代に至るまで信仰者が絶対に見落としてはならない中心的テーマとして残っている。

特に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32~42節は、イエスがゲッセマネの園に入られる瞬間から弟子たちと交わされた簡略な対話、ひとりで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なるほど祈られる姿、そして最後に「起きなさい、行きましょう」と宣言して十字架へと決断される場面までを凝縮して伝える。ゲッセマネの園はエルサレム神殿の東側、オリーブ山の麓に位置しており、その名前が「油を搾る場所」や「搾油所」を意味していることから、オリーブの実を実際に収穫して油を搾っていた場所であることがわかる。同時に、メシア(ヘブライ語)やキリスト(ギリシア語)という呼称が「油注がれた者」を意味する点から見ても、イエスとこの場所との間には深い霊的象徴が結びついている。

張ダビデ牧師は、このゲッセマネの園の意味を解説する中で、オリーブ山が「平和」と「永遠性」を象徴する山としてもよく知られている点に注目する。イエスが平和の王として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たとき、人々は即時の問題解決を期待したが、実際にイエスが身につけられたのは勝利の冠ではなく苦難の茨の冠であった。十字架につけられる直前、最後にとどまられた場所がまさにゲッセマネであり、この園は本来オリーブの油を搾る場所であったが、メシアであるイエスはここでいわゆる「公式の油注ぎ」を受ける代わりに、むしろ切実な汗と涙の祈りを捧げられたという点が、非常に対照的である。王となられるべきお方が、むしろ最も卑しい死の場所へ追いやられた事実が、この空間的背景を通して一層際立つのである。

さらに別の側面から見ると、ゲッセマネの園に入る直前にイエスと弟子たちが渡ったキデロンの谷もまた注目すべき背景となる。過越祭の時期、エルサレム神殿では何十万頭もの小羊が一斉に生贄として捧げられたと推定され、その血が神殿の下を通ってキデロンの谷に流れ込み、谷を赤く染めたと考えられる。イエスはまさにその血で染まったキデロンの谷を越えてゲッセマネへ行かれ、ご自身が「神の小羊」として血を流して死ぬ運命を想起された可能性が高い。張ダビデ牧師は、イエスはすでにその重みをご存じであり、避けられなかったと解釈する。人類の罪を贖うべき小羊となられるお方は、まだ弟子たちには隠されていた救いのドラマを、ただひとりで完全に担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いうのだ。

ゲッセマネの祈りを思い浮かべるとき、イエスがその決断を簡単に片付けた超人的英雄なのではなく、私たちと同じ肉体的苦痛と恐怖を生々しく経験された「真の人間」であったことが一層はっきりする。マルコによる福音書は、イエスが「ひどく恐れてもだえ始め」(マルコ14:33)と描写し、ヘブライ人への手紙5章7節では、イエスが「激しい叫びと涙をもって願いと祈りをささげた」と語る。これは、イエスがゲッセマネの祈りにおいて、実際に死への恐れと不安を吐露され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アッバ、父よ。あなたには何でもおできになります。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マルコ14:36)という切実な訴えが示すように、イエスは避けられない苦難を前にして、きわめて人間的な苦悩を味わわれたのだ。

しかしその祈りが「わたしの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のみこころの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という結末に至る点が決定的である。ここには「死に至るまで従順」である積極的な従順が含まれている。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不可能に見える状況の中でも神の可能性を信じる信仰」としばしば語る。なぜなら、イエスが父を「アッバ」と呼び、自分を完全に委ねるには、全能なる神が最終的に善なる道へ導かれるという絶対的信頼が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私たちが日常で経験する苦しみとは次元が異なる、人類救済という重大な使命を背負ったイエスですら「この杯を取りのけてください」と叫ばざるを得ないほど、その苦難は途方もなく大きかったことが推測できる。同時に、イエスはご自身の願いではなく、父のみこころを選ぶことで、その信仰を行動によって証明された。

ここで注目すべきは、イエスがひとり祈りの格闘をしておられる間、弟子たちは眠り込んでしまったという事実である。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なるほど祈られているイエスのそばで、一時間も目を覚ましていられなかった弟子たちの姿は、人間の弱さを映し出す鏡のように感じられる。孤独は十字架への道をさらに苛酷なものにする重要な要素であった。結局、イエスが捕えられるとき弟子たちは四散し、さらにはペトロが大祭司の中庭でイエスを三度も否認する。イエスの受難が誰とも分かち合えない孤独な道であることが証言されるのだ。その道においてイエスは「起きなさい、行きましょう」(マルコ14:42)と叫ばれ、すでに祈りによって死の恐怖を乗り越える決断を下されていた。その祈りの力がイエスをして十字架に向けて揺らぐことなく進ませたのである。

結局、ゲッセマネの祈りは信仰者に「人間的な弱さを正直にさらけ出しつつも、神の善なるご計画を全面的に信頼し、従うことができるか」を問う。苦難と恐れが消え去らなくても、「アッバ、父よ」と叫ぶ関係の中で、最終的に父のみこころに従順する瞬間を、イエスは直接示してくださった。そしてまさにこの場面が、十字架を理解するうえでの鍵となる。イエスが十字架を回避できたにもかかわらず、「この杯を取りのけてください」という願いを捧げつつも最終的に神のみこころを選ばれた点が決定的だからである。そうして十字架は無力な犠牲ではなく、意識的な愛の決断として完成する。ゲッセマネは、その決断が現実となる舞台であり、その後に起こる十字架と復活の出来事の性格をあらかじめ示す場面でもある。

張ダビデ牧師はさまざまな説教を通じて、ゲッセマネの祈りなくして十字架を十分に理解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語る。イエスが「王として油注がれて当然の方」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苦しみの中で「この杯を取りのけてください」と訴えるほど、十字架は軽々しく決断できる出来事ではなかった。しかし同時に、それは復活の栄光と結びつく道でもあった。苦難と栄光は切り離せず、十字架と復活も切り離せないゆえに、イエスのこの祈りには、苦しみを乗り越えた決定的従順の力が宿っている。そしてこの事実こそ、今日に生きる私たちにとっても重要な霊的教訓を示している。


2. 弟子たちの弱さとキリストの孤

ゲッセマネの祈りの場面では、イエスの苦悩と祈りの格闘が全面に浮き彫りになると同時に、その対比として強烈に描かれるのが弟子たちの弱さである。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26節以下を見ると、弟子たちは最後の晩餐を終えた後、「賛美の歌をうたってオリーブ山へ」向かう。イエスの心には迫り来る受難がすでに予見されていたであろうが、弟子たちはその深刻さを十分に実感せず、比較的軽い気持ちで師に付き従っていたように思われる。ペトロは「たとえみんながあなたを見捨てても、わたしは絶対に見捨てません」と豪語したが、この決意はイエスが捕えられるや否や粉々に砕け散る。

イエスがオリーブ山を上り、ゲッセマネの園に至ると、弟子たちはイエスが祈っておられる間、待っているうちに眠り込んでしまう。マタイ、マルコ、ルカはいずれも、弟子たちが目を覚ましていられずに眠ってしまう姿を繰り返し描く。イエスは「一時間でも目を覚ましていられないのか」と尋ね、「誘惑に陥らないよう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と勧められるが、弟子たちは疲れや無知、あるいは霊的無感覚にとらわれていた。その後、イエスが実際に捕えられると彼らは驚いて逃げ散り、ペトロまでもカヤパの中庭で三度イエスを否認する。共観福音書の記録は、このように弟子たちの失敗談を隠さずに曝け出している。

特に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51~52節に登場する匿名の若者の逸話は注目に値する。ある若者が裸の体に布切れ一枚だけ巻いて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が、捕まえられそうになると布を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と記されており、これがマルコ自身だったという説が伝えられている。張ダビデ牧師は、まさにこの箇所から、福音書が書かれた初期教会共同体の中にあった恥ずかしい失敗例さえも隠さなかった点に着目する。ゲッセマネの事件は、単に誰か一人がうっかりした失敗をし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人間の決心や意志がいかにあっけなく崩れてしまうかを赤裸々に示しているのだ。

さらに深刻なのはペトロの否認の場面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のために命を捨てる」と誓ったペトロが、裁判所の庭で女中の問いかけ一つに耐えきれず、「あんな人は知らない」と否定してしまう。聖書によれば、三度目の否認の直後に鶏が鳴き、ペトロはイエスの言葉を思い出して激しく泣いたという。これは弟子共同体の中心的人物とも言えるペトロの徹底した失敗であり、「牧者を打てば羊は散る」というイエスの予告がそのまま成就したことを示している。

この点において、イエスの孤独はいっそう際立って見える。イエスから学んだことを生涯忘れないと誓ったはずの側近たちでさえ、決定的な瞬間にはイエスを置き去りにしてしまい、むしろ下女の言葉にさえ怯えてしまう姿へと転落していく。イエスは最も愛した人々からさえも外面され、誰にも頼ることができないお立場に置かれた。イエスの十字架への道がどれほど徹底して孤独な道であったかが痛感される。

このような孤独はイエスの人性(人としての性質)を示すと同時に、「罪のない方」が全人類の罪を背負っていく道がいかなるものかを劇的に浮かび上がらせる。張ダビデ牧師は、イエスのこの孤独が人類救済の歴史の中で必然的だったと説く。というのも、イエスご自身が直接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罪の代価は、誰かが分かち合って代わりに負うことは不可能だったからである。弟子たちがどれほど目を覚まして祈ろうとも、イエスが歩まれる道を代わりに担うことはできなかった。結局イエスただおひとりが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道であり、ゲッセマネの園で露わになった弟子たちの無知や裏切りは、その道をさらに深く孤独なものにした。

しかし驚くべきことに、復活の後、弟子たちはまったく別人のように変えられる。ペトロは使徒言行録で福音を大胆に語るリーダーとなり、ほかの弟子たちも迫害をものともせず、イエスの教えを世界中に広める主要な証人となっていく。ゲッセマネで示された彼らの弱さは、むしろ悔い改めと自覚のきっかけとなり、その後本格的に主と共に歩む人生を歩み始めるのだ。張ダビデ牧師は、弟子たちの失敗が永遠の脱落ではなく、新たな出発点となったと語り、私たちも信仰生活の中で同じパターンを経験する可能性があると強調する。人間的な意志や力ではすぐに崩れ去ってしまうが、復活されたイエスとの再会と聖霊の働きを通して、ついには私たちもイエスの十字架と復活を証しする者として立てられるということである。

したがって、ゲッセマネの祈りの場面はイエスの孤独を示すと同時に、弟子たちの弱さをあらわにすることで「人間は自力では自分を守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現実を強調する。心の底では主を捨てないと言い張っても、いざ現実の恐怖と試練の前に、その決心がいかにあっさり壊れてしまうかを、弟子たちは身をもって示した。しかし聖書のメッセージはそこで終わらず、イエスが復活することによって彼らの失敗と弱さをも覆い、新たに使命を担う道へと導いてくださることを明らかにする。結局この一連の過程を総合してみると、ゲッセマネでの弟子たちの姿は「私たちも神なしには一人で立つことはできない存在」であることを痛感させる。そしてイエスの孤独は、まさにその弱い人類を救うために不可欠な犠牲の道であったことを一層浮き彫りにする。

張ダビデ牧師は、これらすべてを説教する際、ゲッセマネの園の出来事が単に「主が苦しみに遭われた一場面」ではなく、信仰共同体が失敗を経験するたびに自らを振り返り、改めて主のもとに立ち帰るべきことを想起させる手本だと述べる。弟子たちの体験はあまりにも恥ずかしいものではあったが、福音書がそれを包み隠さず記録している理由は、「倒れない人間はいない」という事実と、「それでもなお回復の道が備えられている」という真理を知らせるためだと解釈する。結局、ゲッセマネの出来事であからさまになった弟子たちの弱さは、イエスの犠牲がなければ私たちも何の善も成し得ない存在であることを鮮明に示す一方で、その後に続く復活の勝利は、その弱さが乗り越えられても余りある神の力を約束している。


3. 順と同行の道

イエスがゲッセマネの園で示された中心的な教えを一言でまとめるなら、父なる神のみこころに対する「絶対的従順」であると言える。イエスはゲッセマネの祈りにおいて「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と嘆願されるほど、人間的な弱さを隠されなかった。同時に、「しかし、わたしの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のみこころの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と祈ることで、死に直面しても神の摂理を疑わず、積極的に受け入れられた。これは強制や諦念ではなく、父を絶対に信頼する関係の中で可能となる能動的従順であった。

多くの人は「イエスだからできたのだろう」と言いやすい。しかし福音書は、イエスが私たちが感じる苦痛や恐れ以上に、内面的な葛藤を激しく経験されたことを非常に具体的に伝えている。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なったという表現は、それほどの極度の精神的・肉体的圧迫を象徴する。それでもイエスは祈りを通して父のみこころをつかみ、その後は十字架へ向かう足取りを、誰も止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起きなさい、行きましょう」と言われたとき、すでに祈りによって勝負は決していたのだ。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ゲッセマネの祈りの後、イエスの心には一片の揺るぎもなかった」と表現する。

この従順が最終的にどのような実を結んだかを考えるなら、十字架での死は人類の救いの道となり、それが復活の栄光へとつながったことがわかる。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2章は、イエスが「死に至るまで従順であられたゆえに、いと高く上げられた」と宣言する。つまり、十字架は屈辱ではなく、むしろ神の愛と力が万人に示される場であり、イエスの従順がその聖なる実を結んだ。張ダビデ牧師は「イエスが十字架を選ばれたという事実自体が、私たちに救いの門を開いたのだ」と説く。抵抗なく捕えられたイエスの行動こそ、最も能動的な愛の表現であったと気づかされる箇所でもある。

さらにイエス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その同じ従順の道へ私たちを招いておられる。これは「イエスと共に同行する道」がどういうものかをはっきり示す。しばしば信仰生活をする人の中には「イエスを信じれば苦難は消える」と期待する人もいるが、実際には福音はむしろ「あなたがたは世で苦難に遭うだろう」と予告する。それでもなお、イエスご自身が経験された苦難と孤独、そして従順の祈りは、私たちに「その道が決して絶望で終わらない」ことを確かに保証してくれる。ゲッセマネの園でのイエスを思い起こすとき、目の前の苦しみが今すぐ取り除かれなくても、「父のみこころが最終的に善を成し遂げる」という信仰をもって歩む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に「従順」と「同行」は切っても切れない関係にある。イエスが十字架への道を歩まれた後、復活して弟子たちに「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共にいる」(マタイ28:20)と約束されたことが、聖霊を通して信徒たちのうちに継続的に成就しているからだ。初期の弟子たちはゲッセマネで眠りこけ、恐れから逃げ去ったが、復活の主に出会った後は福音を大胆に宣べ伝え、ついには殉教の道へ進むまでになる。その変化は「一緒に行こう」と招くイエスの呼びかけに実際に応答した例である。私たちも日常の中で「私の思いどおりではなく、父のみこころどおり」を選ぶ瞬間に、キリストとの同行を体験することとなる。

張ダビデ牧師は長年の牧会の中で、ゲッセマネの祈りを噛みしめながら自らの人生に訪れた大小の試練を乗り越えた証しをたびたび語る。その内容の骨子は、苦しい問題の前で最初は「この杯がただ過ぎ去るように」と願いつつも、結局は「父のみこころが何であるか」を求め、そのみこころに従うとき、かつて想像もしなかった道が開かれ、その道が命と希望へとつながるということだ。苦しみ自体が即座に消え去らなくても、苦しみを見る視点が変わり、「神はこのプロセスを通して今何をされようとしているのか」を深く見つめるようになる。

ここでいう従順とは、決して受け身のあきらめではない。イエスが十字架刑を「受動的に」受けられたように見えるが、実はご自身を差し出す最も能動的な愛を示されたのだ。私たちがその道を辿るときも、苦難の中で恐れや絶望に流されるのではなく、むしろ霊の目を開いて「神の摂理」を見つめることが可能になる。これこそが従順と同行の道が与える自由であり、真の解放である。最終的にこの道を歩む者は、「イエスがすでに歩まれた道」であるという確信とともに、どんな試練の中でも「起きなさい、行きましょう」と呼びかける主のお声を聞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

最後に、ゲッセマネの祈りの後イエスが歩まれた道は、実際に十字架刑へと繋がっていく。当時のローマ帝国で最も残酷かつ侮辱的な刑罰であり、だれもその道を「栄光」とは呼ばなかった。しかしイエスの復活によって、その屈辱と苦痛の道がこそが勝利と救いの道であることが万人に示された。信仰生活でも私たちは「復活の栄光」だけを享受したいと思いがちだが、イエスがゲッセマネの園で祈りによって準備された苦難の道を無視しては、決して完全な喜びに至ることはできない。張ダビデ牧師は「ゲッセマネなくして十字架はなく、十字架なくして復活もない」と強調する。イエスの苦しみと孤独、そして絶対的従順があったからこそ、復活の力がはじめて完全に示されたということだ。

この事実は弟子たちの失敗と回復にも当てはまる。ゲッセマネで徹底的に崩れ去った弟子たちは、復活されたイエスに出会った後、自分たちの裏切りと恥ずかしさを率直に認め、悔い改めることでまったく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彼らの失敗は後に教会を築くうえで貴重な資産ともなった。ペトロは自らの恥ずべき否認事件を思い返しながら、他の人々がつまずいたとき、より温かく力強く支える指導者へと変えられていった。これはゲッセマネの孤独と涙が単なる悲劇で終わるのではなく、復活の命によってむしろあふれる恵みへと転換されていく道が開かれたことを象徴している。

したがって私たちはゲッセマネの場面で、「人間はどれほどあっけなく崩れうるのか」「イエスの孤独はいかに苛烈であったか」を確認すると同時に、「それでもなお父のみこころを最後まで信じ、従うことによって勝利されたイエスの道が私たちにも開かれている」という結論に至る。福音書の記者たちはこの劇的な祈りを隠すことなく記録することで、イエスの苦悩を伝えるだけでなく、私たちも同じ道へ招かれていることを強調している。そしてイエスはその道の果てに復活の栄光を得られ、弟子たちもまた復活の信仰によって新たに生まれ変わり、教会を建て上げる器とされたのである。今日の私たちもゲッセマネの祈りを黙想するとき、人生のさまざまな試練のただ中で「アッバ、父よ。私の思いどおりではなく、父のみこころどおりになさってください」と告白できる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に苦難と栄光が共存する道は、決して平坦とは限らない。涙の谷を通り、裏切りや外面を経験し、自分自身を見つめて恥じ入ることもある。しかしそこをすでにイエスが通っておられ、その道で「一緒に行こう」と私たちを呼んでおられることこそ最大の慰めである。これはすなわち、従順が苦痛に満ちた結末で終わる道ではなく、復活という命の約束へとつながる道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その瞬間に「同行」が成り立つ。イエスのゲッセマネの祈りが示す従順と同行の道とは、「涙と苦難の中でも神の愛と摂理を深く信頼する信仰」を具体的に実践する生き方にほかならない。

結局、ゲッセマネでイエスが捧げられた祈りは、私たちの信仰の歩みにおいて最も現実的な手本となる。人生を歩む中で、大なり小なり「ゲッセマネ」を迎えるときが必ずやってくる。そのたびに私たちはイエスのように「父よ、この杯を取りのけ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のみこころのままに」と叫び、自分を完全にゆだねられるかどうかを試される。ゲッセマネでのイエスは死の恐怖に苛まれながらも、ついには父への従順の道を選ばれ、その道が人類救済の道となった。弟子たちは惨めに失敗したが、復活後、聖霊の力によって立ち直り、いっそう力強く福音を伝える者へと変えられた。

張ダビデ牧師はこの事実に基づき、「私たちが今どんな苦難や弱さを経験していようと、イエスのゲッセマネの祈りに倣うなら、十字架と復活の現実を体験できる」と強調する。ゲッセマネの祈りを忘れない者は、十字架の深い意味と復活の力を見失わず、たとえ涙や失敗を味わったとしても神の与える回復と使命の道へと最終的に導かれる。その道こそ「一緒に行こう」と招かれるイエスの呼びかけに応答する同行の道でもある。イエスはすでに身をもって歩まれ、その道を進む人々とともにいてくださると約束されたからだ。

まとめると、第一の小見出しではゲッセマネの祈りの背景と意味を考察し、第二の小見出しでは弟子たちの弱さとキリストの孤独を対照的に眺めた。そして第三の小見出しではイエスの従順と、その従順に同行する道がどんな霊的結実をもたらすかを論じた。十字架は残酷で恥辱的な刑具であったが、イエスの祈りから始まるこの従順の働きは、復活によって最も力強い命と救いの徴となった。弟子たちはその過程で自らの罪深さと無力さを骨身に染みるほど思い知らされたが、同時に復活の主によって回復され、教会を建てあげる恵みを受けた。この一連のドラマの序章の舞台となったのがゲッセマネの園であり、ゆえに信仰者ならば必ず黙想すべき核心の場面なのである。

今日も試練や苦しみに直面すると、私たちの弱さが容赦なく露呈することがある。だが、ゲッセマネのイエスは、その道が終わりではないことを証明してくださった。「アッバ、父よ」と叫ぶほど切実でも、父にすべてをゆだねた人は、最終的に死さえも克服する復活の喜びを得ることができる。弟子たちもまた眠りこけ、裏切ったが、それでも回復されて歴史上最も力強い福音の証人となった。だからこそ私たちも、どんな失敗や弱さのただ中にあっても、その道でイエスが「一緒に行こう」と呼びかけておられ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結局、ゲッセマネの祈りは、十字架と復活が切り離せないことを示す決定的な出来事であり、私たちがキリストの弟子としてどのような姿勢をとるべきかを如実に教えている。すなわちイエスの歩まれた道は、苦難と孤独が入り混じる道であると同時に、神の救いの計画が成就する栄光の道でもある。ゲッセマネの祈りの中でイエスはご自身の望みよりも父のみこころを選び取ることで「従順の完成」を成し遂げられ、その従順によって人類は救いの入り口に立つことができた。弟子たちはそこで崩れ落ちたものの、復活のイエスによって再び立ち上がり、今日私たちが教会を通して福音を聞き、信仰生活を送る土台となったのである。

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指して、「ゲッセマネなくして十字架はなく、十字架なくして復活もない」と繰り返し強調する。そう考えると、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も「小さなゲッセマネ」に直面するときは、そのときイエスがどのような祈りを捧げられたかを思い起こし、同じ姿勢で歩むことこそが真の「キリストとの同行」である。誰も代わりに背負ってくれない十字架を自分の前に見るとき、「この杯を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と叫ぶ祈りをせずにはいられないが、それでも「父のみこころならどの道であっても行きます」と応答する勇気を奮い起こすとき、初めて私たちはイエスとともに歩む道の上に立つ。そしてその道の終着点には死ではなく復活の栄光が待っている。これこそゲッセマネの祈りが伝える、そして張ダビデ牧師が繰り返し強調する福音の核心であり、信仰の実体なのである。

The Solitude and Obedience of Gethsemane


1. The Background and Significance of the Gethsemane Prayer

The scene of Jesus praying in the Garden of Gethsemane, right before His crucifixion, is widely regarded as one of the most dramatic and profound moments in the life of Jesus Christ. It appears in the Synoptic Gospels—Matthew, Mark, and Luke—where each vividly conveys the agony, solitude, and wholehearted submission to God’s will that Jesus displayed through prayer. John’s Gospel, on the other hand, does not include a direct account of the Gethsemane prayer. One possible interpretation is that John believed he had already shown Jesus’ firm determination to go the way of the Cross in His farewell discourse (John 13–16). Each Gospel presents slightly different emphases on Jesus, yet all the Synoptic Gospels consistently portray the depth of Jesus’ prayer as He stood before the extreme suffering of the Cross. Even to this day, the spiritual lesson embedded in that prayer remains a vital subject that no person of faith should overlook.

In particular, Mark 14:32–42 offers a condensed depiction of Jesus entering the Garden of Gethsemane, engaging in a brief exchange with His disciples, praying alone until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and finally declaring, “Rise! Let us go!” as He sets forth decisively toward the Cross. Gethsemane is located on the slopes of the Mount of Olives east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its name means “oil press” or “oil mill,” indicating that olives were likely harvested and pressed for oil there. Additionally, the titles Messiah (Hebrew) or Christ (Greek) both mean “the Anointed One,” underscoring a profound spiritual symbolism that connects Jesus to this place.

In his explanation of the significance of the Garden of Gethsemane, Pastor David Jang notes that the Mount of Olives was known to symbolize “peace” and “eternity.” When people welcomed Jesus as the King of Peace upon His entry into Jerusalem, they hoped for immediate deliverance from their problems. Yet instead of a royal crown of triumph, Jesus wore the crown of thorns—the symbol of His suffering. The last place He stayed before being crucified was the Garden of Gethsemane. While this garden was originally an oil press, it became the site where the Messiah, who was worthy of a “formal anointing,” instead offered a wrenching prayer of sweat and tears. This stark contrast powerfully highlights that the One who was truly King was driven to the most degrading form of death.

Another significant backdrop is the Kidron Valley, which Jesus and the disciples crossed on their way into the Garden of Gethsemane. It is thought that during Passover, when hundreds of thousands of lambs were sacrificed in the Jerusalem Temple, the blood flowing from the altar would run down into the Kidron stream, staining the valley red. Jesus crossed that blood-stained brook, likely fully aware that He Himself was about to become the Lamb of God who would shed His blood for humanity. Pastor David Jang interprets this to mean that Jesus already grasped the weight of His mission and did not shrink back. As the Lamb who would atone for the sins of the world, He had to fully bear a redemptive drama still hidden from the disciples’ understanding.

Recalling the Gethsemane prayer reminds us that Jesus was not some superhuman hero who resolved His decision effortlessly. Rather, He was a “true man” who experienced physical pain and fear just as we do. Mark’s Gospel says that Jesus “began to be deeply distressed and troubled” (Mark 14:33), and Hebrews 5:7 says He “offered up prayers and petitions with loud cries and tears.” These descriptions suggest that in His Gethsemane prayer, Jesus truly expressed a terror of death. His desperate plea—“Abba, Father,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Mark 14:36)—shows the very human anguish He felt in the face of inevitable suffering.

Yet the decisive point is that His prayer concludes with the words,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In this, we see an act of “obedience unto death.” Pastor David Jang often refers to it as “faith that believes in God’s possibility even when the situation seems impossible,” because Jesus’ cry of “Abba, Father” and His total surrender are rooted in the absolute trust that the almighty Father would ultimately lead Him on a good path. If even Jesus, bearing the colossal mission of humanity’s salvation, cried out, “Take this cup away from Me,” we can glimpse how immense this agony must have been. At the same time, Jesus proved His trust by choosing His Father’s will over His own.

Another crucial fact here is that while Jesus wrestled in prayer alone, the disciples fell asleep. As Jesus prayed so intensely that His sweat was like drops of blood, not even one hour of vigilance was maintained by His closest followers. Their failure to watch with Him only deepened the loneliness on the path to the Cross. When the moment of His arrest came, they all scattered; further on, Peter denied Him three times in the courtyard of the High Priest. This underlines how the Passion of Christ was a lonely road that nobody else could share. In His statement, “Rise! Let us go!” (Mark 14:42), we see that Jesus had already overcome the fear of death through prayer and was now resolute in His decision. This prayer empowered Jesus to proceed unwaveringly toward the Cross.

Therefore, the Gethsemane prayer poses a question for believers: “Can you candidly acknowledge your human frailty, and still trust entirely in God’s goodness enough to submit to Him?” Even if suffering and fear remain, Jesus demonstrated in His relationship with the Father—by crying out “Abba, Father”—that it is ultimately possible to obey the Father’s will. This scene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Cross. Although Jesus could have avoided it, He finally chose God’s will over His own, even while praying “let this cup pass from Me.” For that reason, the Cross is not an act of helpless resignation; it is the conscious decision of love. Gethsemane is the stage where that decision is tangibly revealed and a foreshadowing of the nature of the Cross and Resurrection soon to follow.

Pastor David Jang, in multiple lectures and sermons, has stated that one cannot fully grasp the Cross without the Gethsemane prayer. Even though Jesus was “the One who deserved to be anointed as King,” He still pleaded in anguish, “Take this cup from Me,” indicating that the Cross was not some trivial decision. Yet it was, at the same time, the path leading to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Because suffering and glory are inseparable—likewise the Cross and Resurrection cannot be separated—Jesus’ prayer contains the decisive power of obedience that overcame the agony. This is the enduring spiritual lesson for us today.


2. The Weakness of the Disciples and the Solitude of Christ

While the anguish and prayerful struggle of Jesus take center stage in the Gethsemane narrative, it is starkly contrasted with the disciples’ frailty. In Mark 14:26 and the verses following, after the Last Supper, they “sang a hymn and went out to the Mount of Olives.” Jesus undoubtedly felt the weight of His impending Passion, yet the disciples appear not to have grasped its gravity, following Him in a relatively casual frame of mind. Peter declared, “Even if all fall away, I will not,” but that resolve would soon shatter when Jesus was arrested.

Upon ascending the Mount of Olives and reaching the Garden of Gethsemane, the disciples failed to keep watch; they eventually fell asleep while Jesus prayed. Matthew, Mark, and Luke all record these instances of their repeated slumber. Jesus asked if they could not watch even one hour, and implored them to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yet they were overwhelmed by weariness, ignorance, or spiritual numbness. Then, when He was actually seized, they fled; even Peter denied knowing Jesus three times in the courtyard of the High Priest. The Synoptic Gospels lay bare the disciples’ failure without minimizing it.

Among these failures, the anonymous incident in Mark 14:51–52 grabs attention. It speaks of a young man who followed Jesus wearing nothing but a linen cloth; when they tried to seize him, he ran off naked, leaving the cloth behind. Tradition has often suggested that this youth might have been Mark himself. Pastor David Jang points out that this detail shows how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did not hide even its most embarrassing failures. Gethsemane was not just one person’s mistake; it vividly illustrates how quickly human resolve and willpower can collapse.

Peter’s denial is an even more striking example. After boasting,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Peter buckled under a maidservant’s single question, insisting, “I don’t know Him at all!” According to Scripture, at the third denial, the rooster crowed, and Peter remembered Jesus’ words, breaking down in tears. This was a total failure by the disciple who had been a central figure in Jesus’ circle—fulfilling the prophecy, “Strike the Shepherd, and the sheep will be scattered.”

Against this backdrop, Jesus’ solitude stands out even more. The closest associates, who had promised to cherish His teachings for life, abandoned Him when it truly mattered, cowering before the words of a mere servant girl. Jesus was thus forsaken by those He loved most; He could lean on no one. The Passion of Christ thus emerges as a path of utter isolation.

This loneliness demonstrates both Jesus’ humanity and the requirement that the “Sinless One” bear the sins of humanity alone, amplifying the drama of redemption. Pastor David Jang explains that this solitude of Jesus was inevitable in the history of salvation because no one else could shoulder the cost of sin. Even if the disciples had remained awake and prayed, they still could not tread that path in Jesus’ place. In the end, He had to walk it alone. Their ignorance and betrayal in Gethsemane only served to intensify that reality.

Remarkably, however, after the Resurrection, the disciples were transformed into wholly different people. Peter became a bold preacher of the Gospel in the Acts of the Apostles, and the rest confronted persecution to spread Jesus’ teachings worldwide. The embarrassment of Gethsemane ultimately led them to repentance and a clearer understanding, launching them into a deeper life of companionship with their Risen Lord. Pastor David Jang notes that their failure was not the end, but a turning point. The same is true in our own faith journeys. We cannot remain steadfast by human will and strength alone. Yet in reuniting with the Risen Christ and throug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we can become witnesses to the Cross and Resurrection.

Hence, the Gethsemane narrative reveals Jesus’ solitude but also lays bare the disciples’ frailty, reminding us that “without God, we cannot stand.” We may declare from our hearts that we will never abandon the Lord, but we see how easily such vows crumble when faced with real fear and trial. The Gospels highlight the disciples’ failings, but do not end there: they show how the Risen Lord covered their failures and weaknesses, guiding them back onto the path of mission. Summarizing these events, it becomes evident that the disciples’ conduct in Gethsemane illustrates how we, too, cannot stand firm on our own. And the solitude of Jesus in that moment underscores that He had to walk the path of sacrifice alone to save frail humanity.

When Pastor David Jang preaches on these themes, he emphasizes that the Gethsemane incident is not merely “a scene in which our Lord suffered,” but a paradigm for the faith community whenever it undergoes failure and returns to the Lord. Though the disciples’ experience was humiliating, the Gospels relay it unembellished to teach us two truths: first, no human is unbreakable; second, there is nonetheless a way of restoration. The disciples’ weakness at Gethsemane shows clearly that without the sacrifice of Jesus, we cannot achieve any righteousness on our own. Meanwhile, the Resurrection assures us that our frailty can be more than overcome by God’s power.


3. The Path of Obedience and Walking Together

The central teaching that Jesus demonstrates in the Garden of Gethsemane can be summed up as “absolute obedience to the Father’s will.” He openly disclosed His human weakness in the Gethsemane prayer—pleading, “Take this cup from Me”—yet He still declared,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This was not resigned fatalism; it was a proactive submission grounded in His unwavering trust in the Father.

Many might be quick to say, “That was possible only because He was Jesus.” However, the Gospels carefully show how fiercely Jesus wrestled in mind and body. The mention that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points to severe emotional and physical pressure. Even so, through prayer, He firmly embraced the Father’s will, and from that point forward, nothing could deter Him from the Cross. When He said, “Rise! Let us go!” there was not the slightest hint of hesitation—precisely because the decisive battle had been won in prayer. Pastor David Jang characterizes this phenomenon as “after the Gethsemane prayer, there was not an ounce of uncertainty in Jesus’ heart.”

We see the fruit of His obedience in the Cross, which then opened the path of salvation for humankind and led to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Philippians 2 declares that Jesus “became obedient to death” and was “exalted to the highest place.” Thus, the Cross—though it was a place of torment and disgrace—actually revealed God’s love and power to all creation. It was Jesus’ obedience that ushered in the glorious outcome. Pastor David Jang explains that “the very fact that Jesus chose the Cross opened the door of salvation for us.” Though it appeared that He was passively arrested and crucified, in reality He was implementing the most active form of love in laying down His own life.

Moreover, Jesus extended an invitation for us to share in this same path of obedience, saying, “Whoever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and follow Me.” In other words, He shows us what it means to “walk with Him.” Sometimes Christians assume that believing in Jesus will remove all suffering. Yet in fact, the Gospel explicitly states,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Nonetheless, by reflecting on the suffering, solitude, and prayerful submission of Jesus, we see that such suffering does not end in despair. Remembering Jesus in Gethsemane allows us to move forward in trust that “the Father’s will ultimately works all things for good,” even if our immediate circumstances do not change.

Thus, “obedience” and “walking together” are inseparable. After treading the way of the Cross, Jesus rose again and promised the disciples,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Matt. 28:20), and this promise continues to be fulfilled in believers through the Holy Spirit. Initially, the disciples dozed off in Gethsemane and fled in terror. But once they encountered the Risen Christ, they boldly proclaimed the Gospel, eventually facing martyrdom. Their transformation is a prime example of responding to Jesus’ invitation to “rise and go with Him.” In our own daily lives, we experience the presence of Christ whenever we choose to follow the Father’s will over our own—truly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Pastor David Jang often shares personal testimonies from his years in ministry, explaining how he overcame trials both large and small by meditating on the Gethsemane prayer. His point is that we initially plead, “Please let this cup pass,” but ultimately we begin to seek “What is the Father’s will?” and yield to that will. Then a path opens up, offering life and hope beyond our former imagination. Even if the suffering itself is not immediately removed, our perspective on it changes. We start to earnestly ask, “What is God doing through this?” rather than being consumed by the pain.

This obedience is never mere passivity. Although it might look like Jesus was “passively” subjected to the punishment of the Cross, He was in fact exercising the most proactive love in giving Himself. We follow that same path by refusing to succumb to fear and despair in the midst of suffering. Instead, we look upward with spiritual eyes to perceive God’s providence. This is the freedom and true liberation found in the way of obedience and walking together with Christ. Those on this path realize, “Our Lord has already walked this road,” and can hear Him beckon, “Rise! Let us go!” even in dire circumstances.

Finally, the path Jesus took after His Gethsemane prayer led Him to be crucified. Under Roman rule, crucifixion was the cruelest and most shameful punishment. No one would have associated it with “glory.” However, the Resurrection made it known to all that this road of shame and suffering was actually the road to victory and salvation. In our spiritual journey, we often long only for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but without first facing the suffering path that Jesus prepared for in Gethsemane, we cannot truly grasp the fullness of that joy. Pastor David Jang repeatedly stresses, “Without Gethsemane, there is no Cross; without the Cross, there is no Resurrection.” Jesus’ agony, solitude, and absolute obedience revealed the Resurrection power in its entirety.

We see this reflected in the disciples’ failure and subsequent restoration as well. They fell catastrophically in Gethsemane, but after meeting the Risen Lord, they acknowledged and repented of their betrayal and shame, and were completely transformed. In fact, their past failures became invaluable assets in building the early church. Peter’s recollection of his own humiliating denial enabled him to become a more compassionate and bold leader, supporting others who stumbled. This indicates that the solitude and tears of Gethsemane did not remain a mere tragedy but were instead turned into “overflowing grace” in the life and power of the Resurrection.

Hence, the Gethsemane story reveals how easily humans can fail, and just how painful Jesus’ solitude was. Yet, it also shows that “those who trust the Father’s will to the end will be victorious”—a reality confirmed by Jesus’ path. By recording that intensely personal prayer, the Gospel writers do more than narrate Jesus’ suffering; they underscore that we are invited to join Him in this path. Jesus attained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at the end of His journey, and the disciples were reborn through their Easter faith, becoming the foundations of the church we know today. In our own walk of faith, contemplating the Gethsemane prayer helps us face life’s trials with the heart-cry, “Abba, Father,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Though the path that weaves together suffering and glory is far from smooth—we may pass through valleys of tears, encounter betrayal and rejection, and see our own weaknesses—Jesus has already traveled it. And He is there calling, “Let us go together,” which is our greatest comfort. This ensures that obedience does not end in a sorrowful finality but culminates in the promise of the Resurrection life. That is where we find true “walking together.” The Gethsemane prayer thus demonstrates a life of “trusting God’s love and providence even in tears and pain,” and putting that faith into action.

Consequently, Jesus’ prayer in Gethsemane serves as the most realistic example for our spiritual pilgrimage. Everyone will face a “Gethsemane” moment, big or small, at some point in life. In those moments, we can pray as Jesus did: “Father, if it is possible, may this cup be taken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Our faith is tested to see if we can fully yield to God. At Gethsemane, Jesus chose the path of obedience to the Father even while terrified by death, and His choice became the path of salvation for humanity. The disciples’ failure was grave, yet they were restored by the power of the Spirit after the Resurrection, eventually proclaiming the Gospel more boldly than ever.

Based on these truths, Pastor David Jang emphasizes that no matter what suffering or weakness we endure, if we follow the example of Jesus’ Gethsemane prayer, we, too, can experience the reality of both the Cross and the Resurrection. Those who do not forget the Gethsemane prayer will not lose sight of the profound meaning of the Cross nor the power of the Resurrection. Even if tears and failure are part of the journey, God will lead them to restoration and mission. That path is the “walk together” that Jesus calls us to—He walked it first and promises to be with us along the way.

In summary, the first section examined the background and meaning of the Gethsemane prayer. The second section contrasted the disciples’ weakness with Christ’s solitude. The third section showed how Jesus’ obedience—and our participation in that obedience—bears spiritual fruit. Although the Cross was a brutal instrument of shame, it became, through Jesus’ prayer and obedient service, the strongest sign of life and salvation via the Resurrection. The disciples recognized their own sinfulness and helplessness in the process, but by meeting the Risen Lord, they were restored and equipped for their God-given task. Thus, the Garden of Gethsemane is a pivotal scene for every believer’s meditation.

Even today, our weaknesses are often laid bare when we encounter suffering and temptation. Yet Jesus in Gethsemane proved that such times need not be our end. However desperate our situation or prayers—“Abba, Father”—if we entrust ourselves to God, we will eventually know the joy of triumphing over even death. Although the disciples slept and deserted Jesus, they were reconciled and empowered to become the most potent witnesses of His Resurrection. Likewise, we must remember that in our own times of failure or frailty, the Lord is still calling, “Let us go together.”

In the end, the Gethsemane prayer testifies that the Cross and Resurrection cannot be separated. The path Jesus walked was fraught with suffering and isolation, but it also brought God’s plan of salvation to fulfillment, culminating in glory. Within that prayer, Jesus completed the “perfect obedience,” choosing the Father’s will over His own. Through this obedience, all humanity has been ushered to the doorway of salvation. Though the disciples crumbled there, the Risen Christ raised them up and founded His Church through them, enabling us even today to hear the Gospel and live by faith.

Pastor David Jang reiterates, “Without Gethsemane, there is no Cross, and without the Cross, there is no Resurrection.” From this viewpoint, whenever we confront “smaller Gethsemanes” in our personal lives, it is in remembering Jesus’ prayer that we truly walk alongside Him. When a cross stands before us—one we cannot pass off to anyone else—our first cry will be, “Let this cup be taken from me,” yet we can still summon the courage to say, “If this is the Father’s will, I will go.” At that moment, we truly stand on the road Jesus walked, and at the end of that road lies not death but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This is precisely the heart of the Gospel and the core of our faith, as seen in the Gethsemane prayer and as repeatedly stressed by Pastor David Jang.

La soledad y la obediencia en Getsemaní


1. El trasfondo y el significado de la oración en Getsemaní

La escena de la oración en el huerto de Getsemaní es considerada uno de los momentos más dramáticos y profundos que Jesús mostró antes de enfrentar la muerte en la cruz. Los Evangelios sinópticos —Mateo, Marcos y Lucas— transmiten este suceso de forma común, revelando vívidamente la agonía y soledad que Jesús experimentó, así como la obediencia total a la voluntad de Dios que Él manifestó en la oración. Por otro lado, en el Evangelio de Juan no aparece un relato directo de la oración en Getsemaní, posiblemente porque Juan percibió que en los capítulos 13 al 16 de su Evangelio ya se presenta suficientemente la decisión de Jesús de encaminarse hacia la cruz. Aunque cada Evangelio enfatiza distintos aspectos de la persona de Jesús, todos coinciden en la profundidad de la oración que Él elevó ante la terrible prueba de la cruz. Y la enseñanza espiritual contenida en esa oración sigue siendo un tema central que los creyentes no pueden pasar por alto.

En particular, Marcos 14:32-42 describe de forma resumida el momento en que Jesús entra en el huerto de Getsemaní, el breve diálogo con los discípulos, su oración en soledad hasta sudar “como gruesas gotas de sangre”, y finalmente la escena en la que declara: “¡Levantaos, vamos!”, reafirmando su determinación de dirigirse a la cruz. El huerto de Getsemaní se ubicaba en la ladera del Monte de los Olivos, al este del templo de Jerusalén. Su nombre significa “prensa de aceite” o “lugar de extracción de aceite”, lo que indica que allí se cosechaban aceitunas para producir aceite. Al mismo tiempo, existe una profunda conexión simbólica entre este lugar y el título de “Mesías” (en hebreo) o “Cristo” (en griego), que significa “el Ungido”.

El pastor David Jang, al explicar el significado de Getsemaní, señala que el Monte de los Olivos también es conocido por simbolizar “paz” y “eternidad”. Cuando Jesús, el Rey de la paz, entró en Jerusalén, la gente esperaba una liberación inmediata de sus problemas, pero en realidad el Señor no llevó una corona de victoria, sino una corona de espinas. Precisamente, el lugar donde Él se detuvo por última vez antes de ser crucificado fue Getsemaní: un lugar dedicado originalmente a la extracción de aceite, donde el Mesías —quien merecía ser ungido como Rey— en vez de recibir una unción oficial, elevó una intensa oración con sudor y lágrimas. El contraste es dramático: aquel que estaba destinado a ser Rey es, paradójicamente, empujado a la muerte más humillante. Así, el trasfondo espacial realza la ironía y la intensidad de la escena.

Por otra parte, el arroyo de Cedrón (o torrente de Cedrón) que Jesús y los discípulos cruzaron justo antes de llegar a Getsemaní también reviste un profundo significado. Durante la Pascua, se sacrificaban en el templo de Jerusalén cientos de miles de corderos, y se estima que la sangre de los animales corría hacia el valle, tiñendo de rojo el arroyo de Cedrón. Jesús, al atravesar esas aguas teñidas de sangre, sin duda se vio a Sí mismo como el Cordero de Dios que pronto derramaría Su sangre para la expiación de la humanidad. Según la interpretación de David Jang, el Señor era plenamente consciente de la carga que llevaba y no la evadió. El Cordero de Dios que debía redimir el pecado de la humanidad debía enfrentar, en soledad, todo el drama de la salvación todavía oculto a los ojos de los discípulos.

Recordar la oración en Getsemaní nos ayuda a ver claramente que Jesús no fue un héroe sobrehumano que tomó una decisión a la ligera, sino alguien que, siendo verdadero hombre, padeció el mismo dolor y temor que experimentamos nosotros en nuestra carne. El Evangelio de Marcos describe que Jesús “comenzó a sentir temor y a angustiarse” (Marcos 14:33), y Hebreos 5:7 afirma que “con gran clamor y lágrimas ofreció ruegos y súplicas”. Estos textos sugieren que Jesús, de hecho, expresó terror y angustia ante la muerte. Su petición: “Abba, Padre, todas las cosas son posibles para ti; aparta de mí esta copa” (Marcos 14:36) revela la agonía humana que experimentó ante un sufrimiento inevitable.

Sin embargo, lo decisivo es que Su oración concluye con “no sea lo que yo quiero, sino lo que tú quieras”. Aquí encontramos la obediencia total “hasta la muerte”. David Jang explica este punto diciendo que se trata de “confiar en la posibilidad de Dios, aun en situaciones que parecen imposibles”. Y es que, al dirigirse a Dios como “Abba” y encomendarse plenamente a Él, Jesús lo hizo sustentado en una absoluta confianza en que el Dios Todopoderoso lo guiaría finalmente por un camino de bien. Cargando sobre Sí la responsabilidad de salvar a la humanidad —una misión de una dimensión totalmente diferente a los sufrimientos que solemos enfrentar—, hasta Él clamó que se le retirase esta copa, mostrándonos lo inmenso de Su aflicción. Pero también manifestó Su fe al someter Su voluntad a la del Padre.

Es importante notar que, mientras Jesús lidiaba en solitario con aquella intensa batalla en oración, los discípulos sucumbieron al sueño. Al permanecer dormidos, sin lograr velar ni una hora, evidenciaron la fragilidad humana. Esa soledad contribuyó a que el camino de la cruz fuera aún más duro. Al final, cuando los hombres apresan a Jesús, los discípulos se dispersan y, posteriormente, Pedro lo niega tres veces en el patio del sumo sacerdote. Ello demuestra que el sufrimiento de Jesús era un camino de soledad que no podía compartirse. Tras su intensa oración, Jesús declara: “¡Levantaos, vamos!” (Marcos 14:42), reflejando la decisión que había tomado en oración de vencer el temor a la muerte y avanzar inquebrantable hacia la cruz. Aquella fortaleza la recibió de la misma oración.

En definitiva, la oración de Getsemaní interpela al creyente: ¿seremos capaces de reconocer nuestra debilidad y, a la vez, de confiar por completo en la bondad de Dios y obedecerle? Aunque el dolor y el temor no desaparezcan de inmediato, Jesús nos mostró cómo, al clamar “Abba, Padre”, podemos finalmente someternos a la voluntad del Padre. Este momento en Getsemaní se convierte en la clave para entender la cruz: Jesús tenía la opción de eludirla, y aun así, a pesar de rogar “que pase de mí esta copa”, eligió la voluntad de Dios. De este modo, la cruz deja de ser un simple acto de debilidad, para convertirse en un sacrificio de amor plenamente consciente. Getsemaní pone de manifiesto esa determinación y prefigura tanto la cruz como la resurrección que habrían de venir.

David Jang enseña en varias predicaciones que sin la oración de Getsemaní, no podemos comprender a cabalidad la cruz. Aunque Jesús merecía ser ungido como Rey, suplicó “aparta de mí esta copa” con gran aflicción, dejando claro que la cruz no fue una decisión ligera. Pero, al mismo tiempo, la cruz está directamente conectada con la gloria de la resurrección. El sufrimiento y la gloria no pueden separarse, así como la cruz y la resurrección van juntas. En la oración de Getsemaní se manifiesta la fuerza de la obediencia decisiva que, tras padecer el dolor, conduce a la victoria. Y precisamente este hecho encierra una enseñanza espiritual de suma relevancia para nosotros en la actualidad.


2. La debilidad de los discípulos y la soledad de Cristo

En la escena de la oración en Getsemaní, la intensa agonía y el forcejeo en oración de Jesús resaltan fuertemente, a la par que se contraponen con la débil reacción de los discípulos. Marcos 14:26 y siguientes relatan que, después de la Última Cena, los discípulos, “cuando hubieron cantado el himno”, fueron con Jesús al Monte de los Olivos. Aunque el Señor presintiera su inminente padecimiento, los discípulos probablemente lo siguieron con un ánimo más ligero, sin comprender del todo la gravedad de la situación. Pedro incluso proclamó: “Aunque todos te abandonen, yo no lo haré”, pero aquella determinación se desintegró en el instante en que apresaron a Jesús.

Al llegar al huerto de Getsemaní en el Monte de los Olivos, los discípulos, que debían velar mientras Jesús oraba, se durmieron. Mateo, Marcos y Lucas reflejan repetidamente que los discípulos no resistieron el sueño. Jesús les recriminó que no fueran capaces de velar ni una hora y los exhortó: “Velad y orad para que no entréis en tentación”. Pero ellos, vencidos por el cansancio, la ignorancia o la insensibilidad espiritual, no supieron reaccionar. Al ver a Jesús apresado, huyeron en pánico, y hasta Pedro, en el patio de Caifás, lo negó tres veces. Los Evangelios sinópticos registran sin tapujos estos fracasos de los discípulos.

Uno de los episodios más llamativos es el de aquel joven anónimo de Marcos 14:51-52, quien seguía a Jesús cubierto apenas con una sábana, pero huyó dejando la sábana atrás cuando quisieron arrestarlo. Se especula que ese joven pudo haber sido el propio Marcos. Según explica David Jang, este pasaje demuestra que la comunidad cristiana primitiva no ocultó sus episodios de fracaso. El evento de Getsemaní no fue un mero desliz, sino una demostración cruda de lo fácil que es que la decisión y la determinación humana se desmoronen ante la adversidad.

Un ejemplo más serio es la negación de Pedro. Aquél que decía: “Estoy dispuesto a morir por Ti” cayó al ser confrontado por una sirvienta, negando con firmeza: “No conozco a ese hombre”. Después del tercer rechazo, el gallo cantó, y Pedro recordó las palabras de Jesús, quebrantándose en llanto. Este fracaso de Pedro, considerado uno de los líderes del grupo, cumple la profecía de Jesús: “Heriré al pastor, y se dispersarán las ovejas”.

En este punto, la soledad de Jesús se intensifica. Sus seguidores más cercanos, quienes prometieron atesorar Su enseñanza de por vida, lo abandonan en el momento decisivo. Se acobardan incluso ante una simple sirvienta, demostrando su cobardía. Jesús se ve abandonado por aquellos a quienes más amaba y, así, no puede apoyarse en nadie. El camino de la cruz se revela como un sendero profundamente solitario.

Tal soledad refleja la humanidad de Jesús —quien carecía de culpa— y, al mismo tiempo, realza la dimensión de Su misión: llevar el pecado del mundo entero. David Jang explica que esta soledad era inevitable en la historia de la salvación de la humanidad. Nadie más podía compartir el pago del pecado que Jesús debía asumir. Por mucho que los discípulos hubieran velado con Jesús, no podrían sustituirlo en ese camino. El Señor debía recorrerlo en absoluta soledad, y la ignorancia y la traición de los discípulos, mostradas en Getsemaní, acrecentaron la carga.

La sorpresa llega tras la resurrección: los discípulos se transforman por completo. Pedro se convierte en un líder que predica valientemente el Evangelio en el libro de Hechos, y los demás discípulos arriesgan la vida para difundir las enseñanzas de Jesús por todo el mundo. Su debilidad, exhibida en Getsemaní, los llevó al arrepentimiento y a la comprensión de su propia fragilidad, abriendo paso a un genuino caminar con el Señor. David Jang explica que el fracaso de los discípulos no fue su perdición definitiva, sino el punto de partida para un nuevo comienzo. Lo mismo puede ocurrirnos hoy: no podemos sostenernos con nuestras propias fuerzas, pero al reencontrarnos con el Cristo resucitado y experimentar la obra del Espíritu Santo, podemos convertirnos también en testigos que proclamen la cruz y la resurrección de Jesús.

Así, en la escena de la oración de Getsemaní, se destaca la soledad de Jesús y, a la par, la debilidad de los discípulos, enfatizando la imposibilidad humana de valerse por sí misma. Por más que sus corazones anhelen no abandonar al Señor, la realidad es que nuestras convicciones pueden quebrantarse con facilidad ante el temor y la prueba. Sin embargo, el mensaje de la Biblia no concluye ahí. La resurrección de Jesús cubre los fracasos y debilidades de los discípulos, guiándolos a asumir nuevamente el compromiso de su misión. Al conjugarse estos relatos, comprendemos que el modo en que los discípulos se comportaron en Getsemaní refleja nuestra propia imposibilidad de pararnos firmes sin la gracia de Dios. Y la soledad de Jesús demuestra que, para salvar a la humanidad débil, Él debía entregarse totalmente.

En sus predicaciones, David Jang recalca que Getsemaní no fue meramente un “momento de sufrimiento del Señor”, sino el modelo que debe revisitar la comunidad cristiana cada vez que padece fracasos. Aunque el suceso fuera bochornoso para los discípulos, los Evangelios lo narran sin censura porque desean mostrarnos la verdad de que “nadie es inmune a la caída” y, a la vez, que “existe un camino de restauración”. La debilidad de los discípulos, expuesta en Getsemaní, evidencia que, sin el sacrificio de Cristo, no podemos producir ningún bien. Pero la victoria de la resurrección promete el poder de Dios, capaz de superar con creces nuestras debilidades.


3. El camino de la obediencia y la comunión

Podemos sintetizar la enseñanza principal que Jesús deja en Getsemaní como la “obediencia absoluta a la voluntad del Padre”. En esa oración, Jesús pide: “aparta de mí esta copa”, dejando claro Su sufrimiento humano. Pero añade: “no sea lo que yo quiero, sino lo que tú quieras”. Así, incluso ante la muerte, no duda de la voluntad de Dios, sino que la acoge plenamente. No se trata de una sumisión forzada ni de un acto de resignación, sino de una obediencia voluntaria basada en la absoluta confianza de un Hijo hacia Su Padre.

Mucha gente puede pensar: “Jesús lo logró porque era el Hijo de Dios”. Sin embargo, los Evangelios describen con detalle la intensidad de Su lucha interna y Su dolor físico y psicológico, al punto de sudar “como gotas de sangre”. Aun así, Jesús, al orar, se aferró a la voluntad de Su Padre, y desde entonces nadie pudo detenerlo en Su camino hacia la cruz. “¡Levantaos, vamos!” fue Su mandato, resultado de la victoria espiritual lograda en la oración. David Jang expresa que, “tras la oración de Getsemaní, el corazón de Jesús no titubeó ni un ápice”.

¿Cuál fue el fruto de esta obediencia? La muerte en la cruz se convirtió en el camino de salvación para la humanidad y desembocó en la gloria de la resurrección. Filipenses 2 declara que, por haber obedecido “hasta la muerte”, Dios lo exaltó hasta lo sumo. Es decir, la cruz no es un lugar de vergüenza, sino la manifestación suprema del amor y del poder de Dios ante el mundo. La obediencia de Jesús produce este glorioso fruto. David Jang comenta: “El hecho de que Jesús eligiera la cruz abrió para nosotros la puerta de la salvación”. El aparente sometimiento pasivo ante el arresto revela la manifestación más activa y decisiva de Su amor.

A su vez, Jesús invita a Sus discípulos a seguir el mismo sendero: “niéguese a sí mismo, tome su cruz y sígame”. Es decir, nos convoca a caminar con Él, en Su misma obediencia. En ocasiones, algunos creyentes suponen que, por la fe, sus aflicciones se desvanecerán, pero el Evangelio más bien anuncia que “en el mundo tendréis aflicción”. Sin embargo, el sufrimiento, la soledad y la obediencia que Jesús mostró en Getsemaní nos garantizan que ese sendero no termina en la desesperanza. Al contemplar a Jesús en el huerto, podemos avanzar en fe, convencidos de que “la voluntad del Padre” resultará finalmente en bien, aunque el dolor no desaparezca de inmediato.

Así, “obediencia” y “comunión” están intrínsecamente unidas. Después de ir a la cruz y resucitar, Jesús prometió a Sus discípulos: “Yo estoy con vosotros todos los días, hasta el fin del mundo” (Mateo 28:20), y esa promesa se cumple mediante el Espíritu Santo en los creyentes. Al principio, los discípulos se durmieron en Getsemaní y huyeron por miedo, pero tras el encuentro con el Señor resucitado, predicaron el Evangelio con valentía, incluso entregando sus vidas. Dicho cambio refleja su respuesta efectiva a la invitación “vamos juntos”. De igual modo, cada día que elegimos “no mi voluntad, sino la del Padre” experimentamos la comunión con Cristo.

David Jang comparte a menudo experiencias de su vida pastoral en las que la meditación en la oración de Getsemaní lo ayudó a superar situaciones difíciles. En resumen, al enfrentar circunstancias dolorosas, primero rogaba: “Que esta copa pase de mí”, pero progresivamente cambiaba el foco a: “¿Cuál es la voluntad del Padre?”, sometiéndose a ella. Entonces, veía abrirse caminos antes inimaginables, caminos que llevan a la vida y la esperanza. Aun si la dificultad no se disipa de inmediato, cambia la perspectiva: busca descubrir lo que Dios quiere realizar a través de ese proceso.

De esta manera, la obediencia no equivale a resignación pasiva. Aunque Jesús padeció la cruz de forma “pasiva” —en apariencia—, en realidad, entregar Su vida fue un acto extremadamente activo y amoroso. Cuando seguimos esa senda, incluso en la aflicción, no sucumbimos al pánico ni a la desesperanza, sino que nuestros ojos espirituales se abren para contemplar la providencia de Dios. Esta es la libertad y la verdadera liberación que aporta el camino de la “obediencia y comunión”. Una persona que ingresa a este sendero sabe que es “el camino que Jesús ya recorrió”, y puede escuchar la voz del Señor que dice: “¡Levántate, vamos juntos!”, en medio de cualquier adversidad.

Finalmente, tras la oración en Getsemaní, Jesús fue conducido a la crucifixión. Esta era la pena más cruel y humillante del Imperio romano, y nadie la consideraba un “honor”. Pero con la resurrección, ese camino de humillación y sufrimiento se transformó en el sendero de victoria y salvación para la humanidad. En nuestra vida de fe, solemos desear solo la “gloria de la resurrección” sin afrontar el camino doloroso que preparó esa gloria en Getsemaní. David Jang insiste: “No hay cruz sin Getsemaní, y no hay resurrección sin cruz”. El sufrimiento y la soledad de Cristo, así como Su obediencia absoluta, hicieron posible que la potencia de la resurrección se revelara.

Lo mismo puede aplicarse al fracaso y la restauración de los discípulos. En Getsemaní cayeron rotundamente, pero al encontrarse con el Señor resucitado, reconocieron su traición y vergüenza, se arrepintieron y fueron renovados por completo. Incluso, sus fracasos pasados acabaron siendo un valioso recurso para fundar la comunidad de fe, la Iglesia. Pedro, al recordar haber negado al Señor, desarrolló un corazón más compasivo y fortalecido para sostener a otros cuando tropezaban. Ello simboliza que la soledad y las lágrimas de Getsemaní no culminan en tragedia, sino que se transforman en gracia abundante en la vida del creyente que participa de la resurrección.

Por consiguiente, en Getsemaní observamos simultáneamente cuán frágiles somos los seres humanos y cuán honda fue la soledad que padeció Jesús, pero también descubrimos que, “aun así, la obediencia a la voluntad del Padre hasta el fin” es un camino abierto para nosotros. Los escritores de los Evangelios, al registrar esta oración de manera tan detallada, no pretenden solo informar sobre el padecimiento de Jesús, sino destacar la invitación para nosotros de andar por esa misma senda. Y Jesús, habiendo llegado a la cruz, conquistó la gloria de la resurrección. Los discípulos, tras su caída, fueron restaurados por el Señor resucitado y se convirtieron en instrumentos claves para la difusión del Evangelio. Hoy, cuando contemplamos la oración de Getsemaní, reconocemos que en nuestras tribulaciones diarias podemos suplicar: “Abba, Padre, no se haga mi voluntad, sino la tuya”.

Así, aunque ese camino de sufrimiento y gloria no siempre sea llano, y debamos atravesar valles de lágrimas, traiciones y momentos de vergüenza personal, el mayor consuelo es saber que Jesús ya pasó por allí y nos llama diciendo: “¡Vamos juntos!”. Con ello, comprobamos que la obediencia no desemboca en un desenlace trágico, sino en la promesa de la vida que se revela en la resurrección. Aquí es donde cobra sentido la “comunión”: el camino de la obediencia y la comunión que Jesús inauguró en Getsemaní consiste en vivir confiando profundamente en el amor y en los designios de Dios, aun en medio de las pruebas.

En conclusión, la oración de Jesús en Getsemaní es un modelo sumamente realista para nuestro propio peregrinaje de fe. A lo largo de la vida, todos encontraremos pequeños o grandes “Getsemaníes”. En esos momentos, seremos confrontados con la misma pregunta: ¿oraremos como Jesús: “Padre, pasa de mí esta copa, pero no se haga mi voluntad, sino la tuya”? Aun en medio de la angustia frente a la muerte, Jesús eligió someterse al Padre, y con ello abrió la vía para la salvación de la humanidad. Los discípulos fracasaron de forma vergonzosa, pero tras la resurrección y la obra del Espíritu Santo, se levantaron y proclamaron el Evangelio con valentía.

Basado en estos hechos, David Jang enfatiza que “sea cual sea la prueba o debilidad que estemos experimentando, si imitamos la oración de Getsemaní, viviremos la realidad de la cruz y de la resurrección”. Quien no olvida la oración de Getsemaní no pierde el sentido profundo de la cruz ni el poder de la resurrección. Y aunque atravesemos lágrimas y caídas, siempre hallaremos el camino del restablecimiento y la misión que Dios tiene preparado para nosotros. Ese sendero es también la ruta de la “comunión”, porque Jesús, que ya lo recorrió, nos acompaña en él.

Para resumir, en el primer apartado examinamos el trasfondo y el significado de la oración de Getsemaní; en el segundo, vimos la debilidad de los discípulos en contraste con la soledad de Cristo; y en el tercero, hablamos de la obediencia de Jesús y del fruto espiritual que surge cuando andamos ese camino junto a Él. Si bien la cruz era un instrumento cruel y vergonzoso, la obediencia manifestada en esa tarea, iniciada en la oración de Jesús, se convirtió en la señal más poderosa de vida y salvación con la resurrección. Los discípulos, tras su colapso en Getsemaní, redescubrieron su pecado y su incapacidad, pero a través del Señor resucitado, fueron cubiertos de gracia y equipados para fundar la Iglesia. Todo este drama tuvo su prólogo en el huerto de Getsemaní, lugar fundamental de reflexión para todo creyente.

Incluso hoy, al enfrentar dolores y tentaciones, se expone nuestra debilidad. Pero Jesús en Getsemaní nos muestra que ese no es el fin. Aun en la aflicción más profunda, quien clama “Abba, Padre” y se somete al Padre hallará la dicha de la resurrección que supera la muerte. Los discípulos se durmieron y traicionaron al Señor, pero fueron restaurados para llegar a ser testigos poderosos del Evangelio. Por tanto, sin importar cuánto nos sintamos frágiles, recordemos que Jesús nos invita: “¡Vamos juntos!”.

La escena de Getsemaní evidencia que la cruz y la resurrección son inseparables, y nos enseña cómo debemos seguir a Cristo como discípulos. El camino de Jesús se componía de dolor y soledad, pero a la vez cumplía el plan de salvación de Dios y desembocaba en la gloria. En la oración de Getsemaní, Jesús puso la voluntad del Padre por encima de la suya, alcanzando la “obediencia perfecta” que condujo a la humanidad a las puertas de la salvación. Los discípulos cayeron, pero se levantaron gracias al Cristo resucitado, y fueron la base para la transmisión del Evangelio a través de la Iglesia.

David Jang subraya: “No hay cruz sin Getsemaní, ni resurrección sin cruz”. Por ello, cada uno de los “pequeños Getsemaníes” que aparezcan en nuestra vida representa una oportunidad para recordar cómo oró Jesús y adoptar la misma actitud. Cuando tengamos nuestro propio “cáliz” de sufrimiento enfrente y clamemos: “Padre, aparta de mí esta copa”, podremos también añadir con valentía: “Mas no se haga mi voluntad, sino la tuya”. Sólo entonces estaremos verdaderamente caminando con Jesús. Y al final de ese camino nos espera la gloria de la resurrección, no la muerte. Este es el meollo del Evangelio, el corazón mismo de la fe, y precisamente lo que David Jang enfatiza una y otra vez al hablar de la oración en Getsemaní.

겟세마네의 고독과 순종

1. 겟세마네 기도의 배경과 의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보여주신 가장 극적이면서도 심오한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된다. 복음서 중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 이른바 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뇌와 고독,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드러나는지를 알려 준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미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에 이르는 고별 설교에서 십자가의 길을 결심하셨음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고 보았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별로 예수님이 강조되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난 앞에 서셨을 때 드린 기도의 깊이는 공관복음 모두에 일관되게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담긴 영적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신앙인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핵심 주제로 남아 있다.

특히 마가복음 14장 32-42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는 순간부터 제자들과 주고받은 간략한 대화, 홀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선포하시며 십자가를 향해 결단하시는 장면까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위치한 감람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기름을 짜는 틀’ 혹은 ‘채유소’를 뜻한다는 점에서, 감람나무 열매를 실제로 수확해 기름을 짜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메시아(히브리어)나 그리스도(헬라어)라는 호칭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이 장소 사이에는 깊은 영적 상징이 연결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겟세마네 동산의 의미를 해설하며, 감람산이 ‘평화’와 ‘영원성’을 상징하는 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기대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쓰신 것은 승리의 왕관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관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이 바로 겟세마네이며, 이 동산은 본래 기름을 짜는 곳이었으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여기서 어떤 ‘공식적 기름 부음’ 대신 처절한 땀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점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왕이 되실 분이 도리어 가장 비천한 죽음의 자리에 내몰리신 사실이, 이 공간적 배경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예수님과 제자들이 건너온 기드론 시내 역시 유의미한 배경이 된다. 유월절 시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어린 양들이 한꺼번에 제물로 바쳐졌는데, 그 피가 성전 아래를 지나 기드론 시내로 흘러나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 피로 물든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로 가셨고, 그 장면에서 곧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피 흘려 죽으실 운명을 떠올리셨을 가능성이 높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이미 그 무게감을 아셨고 피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 할 어린 양이 되실 분은, 아직 제자들에게는 감춰진 구원의 드라마를 혼자서 온전히 감당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면, 예수님이 그 결단을 아주 간단히 해치우신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적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히 겪으신 ‘참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고 표현하고,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실제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셨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아빠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는 간절한 호소가 보여 주듯, 예수님은 피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를 겪으셨다.

하지만 그 기도가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귀결된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여기에는 ‘죽기까지 복종’하는 적극적 순종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는 믿음”이라고 자주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짖고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절대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인류 구원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조차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을 정도였다면, 그 고난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그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혼자서 기도의 씨름을 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 옆에서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 주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고독은 십자가의 길을 더욱 혹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아가 베드로는 공회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이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독한 길임을 증언한다. 그 길을 통해 예수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2)라고 외치시며, 이미 기도로서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결단을 내리신 상태가 되었다. 그 기도의 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게 한 것이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는 신앙인에게 ‘인간적 약함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고난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는 관계 속에서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게 되는 순간을 예수님은 직접 보여 주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십자가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으나,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를 드리면서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다는 점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력한 희생이 아닌, 의식적인 사랑의 결단으로 완성된다. 겟세마네는 그 결단이 현실로 드러나는 무대이자, 앞으로 벌어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성격을 예표하는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설과 설교를 통해, 겟세마네 기도가 없이는 십자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아 마땅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실 만큼, 십자가는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부활의 영광과 연결되는 길이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될 수 없고, 십자가와 부활도 분리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이 기도 안에는 고통을 극복한 결정적 순종의 힘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곧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영적 교훈을 제시한다.

2.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고독

겟세마네 기도 장면에서 예수님의 고뇌와 기도의 씨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동시에, 그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이 제자들의 연약함이다. 마가복음 14장 26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간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곧닥칠 수난이 예견되어 있었겠지만, 제자들은 그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스승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으나, 이 결의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순간에 산산이 부서진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올라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자, 제자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곧 잠에 빠진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모두 이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드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예수님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물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시지만, 제자들은 피곤과 무지, 혹은 영적 무감각에 사로잡혀 허덕인다. 그러다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자 놀라 달아나고, 베드로조차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이처럼 제자들의 실패담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특히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등장하는 익명의 청년 일화는 눈길을 끈다. 이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 하나만 두른 채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붙잡히려 하자 이불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기록되는데, 이것이 마가 자신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을 통해, 복음서가 쓰인 초기 공동체 내부의 부끄러운 실패 사례조차 감추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겟세마네 사건은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이 실수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결심과 의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더욱 심각한 예는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다. “나는 주를 위해 생명도 버리겠다”고 자신하던 베드로가, 재판정 마당에서 계집종의 질문 한 번에 무너져 “나는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해 버린다. 성경은 세 번째 부인 직후 닭이 울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것은 제자 공동체의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철저한 실패이며,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독이 한층 더 두드러지는 것을 본다.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을 평생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던 측근들조차 결정적 순간에는 그를 떠나 버렸고, 오히려 미약한 계집종의 말 앞에서도 겁을 내는 모습으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던 이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자리에 서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 얼마나 철저히 고독한 길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고독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드러내는 동시에, ‘죄 없는 자’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이 고독이 인류 구원 역사에서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셔야 할 죄 값은 그 누구도 함께 나누어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아무리 깨어서 기도했더라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대신 감당해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예수님 혼자서 걸어가야 할 길이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무지와 배신은 그 길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부활 이후 제자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리더가 되고, 다른 제자들도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 세계로 퍼뜨리는 핵심 증인들이 된다.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그들의 연약함이 오히려 회개와 자각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살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제자들의 실패가 영원한 낙오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같은 패턴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 의지와 힘으로는 결코 버텨 낼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재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결국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예수님의 고독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지닌 연약함을 투명하게 밝힘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음으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막상 현실의 두려움과 시련 앞에서 그 결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제자들은 몸소 증명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의 실패와 연약함마저 덮어 주시고 다시 사명감당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점을 드러낸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해 보면,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역시 하나님 없이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독은 바로 그 연약한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필연적 희생의 길이었음을 더욱 부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내용을 설교할 때,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이 단순히 “주님께서 고생하셨던 한 장면”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주는 표본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의 체험은 너무나 부끄러웠으나, 복음서가 이를 가감 없이 전하는 이유는 바로 ‘무너지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길이 예비되어 있다’는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결국 겟세마네 사건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연약함은, 예수님의 희생이 없이는 우리 역시 어떤 선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선명히 보여 주는 반면, 그 뒤를 잇는 부활의 승리는 연약함이 극복되고도 남는 하나님의 능력을 약속한다.

3. 복종과 동행의 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 주신 핵심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탄원하실 정도로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숨기지 않으셨다.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셨다. 이는 억지나 체념이 아닌, 아버지를 절대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가능한 능동적 순종이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 이상으로 마음속에서 치열한 씨름을 하셨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전한다.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표현은 그만큼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압박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고, 이후에는 십자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기도에서 승부가 결판났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겟세마네 기도 후 예수님 마음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복종이 결국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고, 그것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므로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고 선언한다. 즉,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자리였고, 예수님의 복종이 그 거룩한 열매를 맺게 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선택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었다”고 설명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체포되신 예수님의 행보가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아가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동일한 복종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이는‘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보여 준다. 간혹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 믿으면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도 하지만, 실상 복음은 오히려 “너희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직접 겪으셨던 고난과 고독, 그리고 복종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을 떠올리면, 당장 눈앞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 결국 선을 이루리라’는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복종’과 ‘동행’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신 후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이, 성령을 통해 성도들 안에 계속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잠이 들고, 두려워 도망쳤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순교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변화는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실제로 응답한 사례다. 우리 역시 매일 일상 속에서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를 선택하며 사는 순간에,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오랜 목회 경험 속에서, 겟세마네 기도를 곱씹으며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크고 작은 시련들을 이겨 낸 간증 사례를 자주 나눈다. 그 경험담의 요지는 고통스러운 문제 앞에서 처음에는 “이 잔이 그냥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그 뜻에 복종할 때,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길이 열리고, 그 길은 생명과 소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 자체가 즉시 없어지지 않을 수 있어도,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여기서 복종이란 결코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을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내어주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을 펼치신 것이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르게 될 때, 고난 중에도 두려움과 절망에 휩쓸리지 않고,오히려 영적인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복종과 동행의 길이 주는 자유이자 참된 해방이다. 결국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은 “예수님이 이미 걸으신 길”이라는 확신과 함께, 어떤 시련에서도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기도 이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실제로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졌다. 이 처형은 로마 제국 당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고, 누구도 그 길을 ‘영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그 수치와 고통의 길이 곧 승리와 구원의 길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준비하신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는 결코 온전한 기쁨에 이를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가 없이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고통과 고독, 그리고 그분의 절대적 복종이 있었기에 부활의 능력이 비로소 온전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제자들의 실패와 회복에도 적용된다. 겟세마네에서 철저히 무너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자기들의 배신과 부끄러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심지어 그들의 실패가 훗날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러운 부인 사건을 떠올리며, 다른 이들이 넘어졌을 때 더욱 따뜻하고 힘 있게 붙들어 주는 지도자로 변화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겟세마네의 고독과 눈물이 한낱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 안에서 오히려 넘치는 은혜로 전환되는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우리는 겟세마네 장면에서 ‘인간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예수님의 고독은 얼마나 처절했는가’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믿고 복종함으로써 승리하신 예수님의 길이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극적인 기도를 숨기지 않고 기록함으로써, 단지 예수님의 고통을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 길로 초대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 끝에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으며, 제자들 역시 부활 신앙으로 새롭게 거듭나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할 때, 인생의 다양한 시련 속에서 “아바 아버지,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고난과 영광이 함께하는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수 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수 있고, 배신과 외면을 당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때 부끄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을 이미 예수님이 지나가셨고, 그 길에서 “함께 가자”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이야말로 최대의 위로다. 이는 곧 복종이 고통스러운 결말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생명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의미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동행’이 성립한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보여 주는 복종과 동행의 길이란, ‘눈물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깊이 신뢰하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는 우리의 신앙적 여정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가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맞닥뜨리게 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닌 아버지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라고 부르짖으며, 스스로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지 시험받는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도 결국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셨고, 그 길이 곧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다. 제자들은 비참하게 실패했으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되어 더욱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기초해, “우리가 지금 어떤 고난이나 연약함을 경험하든지, 그 속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본받는다면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겟세마네 기도를 잊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의 깊은 의미와 부활의 능력을 놓치지 않게 되며, 비록 눈물과 실패를 겪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사명의 길로 결국 인도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곧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동행의 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먼저 몸소 걸으셨고,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첫째 소주제에서는 겟세마네 기도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았고, 둘째 소주제에서는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고독을 대조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셋째 소주제에서는 예수님의 복종과, 그 복종에 동행하는 길이 어떤 영적 결실을 맺는지 이야기했다. 십자가는 잔혹하고 치욕적인 형틀이었으나, 예수님의 기도로부터 시작된 이 순종의 사역은 부활을 통해 가장 강력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죄성과 무능함을 처절하게 깨달았으나,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회복되고 세워지는 은혜를 입었다. 이 모든 드라마의 전초 무대가 된 겟세마네 동산은,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묵상해야 할 핵심 장면이다.

오늘날에도 고통과 시험을 만나면 우리 안의 연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그 길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 “아빠 아버지”라고 울부짖을 만큼 절박해도,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결국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제자들도 비록 잠이 들고 배신했지만, 회복되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복음 증인으로 쓰임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떤 실패와 약함 가운데 있더라도, 그 길에서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부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건이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생히 가르쳐 준다. 즉,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고난과 고독이 뒤섞인 길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는 영광의 길이었다. 겟세마네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복종의 완성’을 이루셨고, 그 복종으로 인해 인류는 구원의 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제자들은 거기서 무너졌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일어섰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겟세마네 없이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누차 역설한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인생에서도 ‘작은 겟세마네들’을 마주칠 때마다,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지를 기억하며 동일한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다. 아무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십자가를 내 앞에 마주했을 때,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떤 길이든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가 전해 주는,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복음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실체다.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 Pasteur David Jang

1. L’amour de Jésus jusqu’au bout et la signification de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

Le pasteur David Jang médite profondément l’épisode du lavement des pieds de Jésus relaté dans l’Évangile de Jean (13.2-11), et il souligne l’importance majeure du message que cette scène apporte à la vie chrétienne et à la communauté ecclésiale. Ce passage se situe au moment du dernier repas, où l’on apprend que le diable avait déjà inspiré à Judas Iscariot l’idée de trahir Jésus, annonçant ainsi une tension extrême et un drame imminent. Pourtant, bien que conscient de sa mort proche, le Seigneur aime jusqu’au bout et manifeste un amour qui espère même le retour de ses ennemis. Notamment, la parole :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n’a besoin que de se laver les pieds, car il est entièrement pur » (Jean 13.10) illustre la tension entre le croyant régénéré (né de nouveau) et le besoin d’une repentance quotidienne.

David Jang souligne d’abord que l’expression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 renvoie à l’expérience fondamentale de la nouvelle naissance (la régénération) dans la foi chrétienne. Autrement dit, par la foi en Jésus-Christ, la personne est libérée du péché et transférée dans une vie nouvelle : c’est le changement fondamental de condition. Pour reprendre l’image d’une fête : être « déjà baigné » équivaut à s’être correctement préparé pour entrer dignement dans la salle du banquet, signifiant qu’on en a désormais le droit d’accès. Mais, durant le chemin, les pieds se salissent inévitablement avec la poussière et la boue ; avant de participer pleinement à la fête, on doit donc se laver les pieds à nouveau. De même, pour ceux qui ont déjà la foi, leurs « pieds » restent prompts à tomber dans le péché, d’où la nécessité de se repentir et d’être lavés chaque jour.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donc sur le fait que la régénération est le point de départ et l’élément essentiel de la foi. Sans ce « bain » initial, participer même activement à la vie d’Église – culte, service, etc. – peut demeurer sans rapport réel avec le Seigneur. C’est exactement ce qui arriva à Judas Iscariot : il était physiquement proche de Jésus, mais ne comprit jamais vraiment l’amour du Christ et choisit finalement la voie de la trahison. Cela ne signifie pas pour autant que ceux qui sont déjà régénérés deviennent parfaits et sans péché. Même une fois « baigné », on peut se salir les pieds au quotidien ; d’où la nécessité de « se laver les pieds » chaque jour, c’est-à-dire de traiter les péchés que nous commettons constamment et de mener, dans le Saint-Esprit, un combat spirituel contre la nature pécheresse persistante.

Dans Jean 13, l’acte de Jésus semble inverser la hiérarchie traditionnelle entre maître et disciple. À l’époque, il était normal qu’un maître se fasse laver les pieds par ses disciples ou par des serviteurs, non l’inverse. Or Jésus, au lieu de se faire servir, lave lui-même les pieds de ses disciples. David Jang explique cette démarche comme « l’extrême abaissement de Jésus dans son service d’amour ». Le Seigneur démontre par là que la véritable autorité et la vraie gloire viennent du service, principe paradoxal du Royaume de Dieu.

Pierre, en voyant cela, réagit vivement : « Toi, Seigneur, tu me laves les pieds ? » (Jean 13.6, paraphrasé). Il ne comprend pas la raison d’un geste si humble. Mais Jésus répond fermement : « Si je ne te lave pas, tu n’as point de part avec moi » (Jean 13.8). David Jang en déduit que, malgré notre sentiment d’indignité ou de bassesse, refuser l’amour et la grâce du Seigneur nous coupe radicalement de Lui. Notre orgueil le plus grand, ironiquement, peut être de croire que l’on n’a pas besoin de cette grâce ou qu’on n’est pas digne de la recevoir, alors même que Jésus nous offre son pardon et veut nous purifier.

À l’exclamation de Pierre – « Seigneur, non seulement les pieds, mais encore les mains et la tête » (Jean 13.9) –, Jésus rétorque :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n’a besoin que de se laver les pieds ». Cela montre que pour celui qui est né de nouveau dans la foi, il ne s’agit plus de renier ou de répéter sans cesse l’acte fondateur de la nouvelle naissance, mais de se laver chaque jour des péchés quotidiens. David Jang relie aussi ce verset au sens du baptême d’eau : ce sacrement exprime publiquement la réalité de la régénération intérieure opérée par l’Esprit-Saint. Selon la tradition ecclésiale, on accorde une grande valeur au baptême, mais ce rite en lui-même ne garantit pas la nouvelle naissance ; il faut que l’Esprit de Dieu ait réellement agi dans la personne pour la détourner du péché et la faire entrer dans la vie nouvelle.

Mais l’histoire ne s’arrête pas là.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 doit malgré tout « se laver les pieds ». David Jang rappelle que la chair et la nature humaine restent exposées au péché. Même en étant chrétien régénéré, on vit dans le monde et l’on affronte constamment la convoitise, la jalousie, la haine, la luxure, l’orgueil, etc. C’est pourquoi il est crucial de se laver les pieds en continu, c’est-à-dire de se repentir chaque jour. Sinon, avertit David Jang, on peut se retrouver à nouveau éloigné du Seigneur.

Pour lui, c’est là un point capital de la condition chrétienne. En Jésus-Christ, nous avons reçu un salut parfait et sommes devenus enfants de Dieu. Mais, sur cette terre, nous sommes encore susceptibles de faillir, de préférer les convoitises de la chair plutôt que la voix de l’Esprit. L’apôtre Paul évoque d’ailleurs cette propension à courir vers le péché : « Leurs pieds sont prompts à verser le sang » (Romains 3.15). Il suffit de peu pour que nos « pieds » se dirigent vers le mal. La solution ? Se précipiter vers Jésus et supplier : « Seigneur, lave-moi à nouveau les pieds », en recherchant la sainteté.

Ainsi, dans Jean 13, l’expression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 revêt deux sens majeurs. D’une part, le croyant régénéré a acquis une nouvelle identité, légitime pour participer au « banquet » de Dieu. D’autre part, il demeure indispensable de garder le lien avec Jésus en se faisant laver les pieds régulièrement, c’est-à-dire en demeurant dans la repentance quotidienne. David Jang appelle cela la tension entre « l’audace face à la grâce » (ne jamais douter de la grandeur de l’amour de Christ) et la « vigilance dans la grâce » (ne jamais prendre cette grâce à la légère). L’Église et les chrétiens ne doivent jamais relâcher leur vigilance dans cette tension.

Par ailleurs, cette pratique du lavement des pieds ne concerne pas seulement la vie spirituelle individuelle, mais touche aussi l’essence même de la communauté ecclésiale. Être « déjà baigné », puis continuer à se laver les pieds, implique de s’entraider dans ce processus. Dans l’Église, « se laver mutuellement les pieds » symbolise le soin, la prière, l’accompagnement fraternel lorsqu’on détecte le péché chez soi ou chez autrui. Au lieu de condamner et d’éloigner la personne fautive, on cherche à la restaurer, à la laver, comme Jésus le fit. Sans une telle culture de service et de pardon, l’Église risque de n’être qu’un champ de disputes et de conflits. Comme l’évangile de Luc (22.24) le décrit : même lors de la dernière Cène, les disciples se querellaient pour savoir qui d’entre eux était le plus grand, révélant ainsi la force de l’orgueil humain.

En somme, selon David Jang, la parole de Jésus : « Celui qui est déjà baigné n’a besoin que de se laver les pieds » est une invitation à mettre en pratique l’exemple du Christ dans toute la vie de l’Église. Nous sommes déjà admis au festin, mais nos pieds ont encore besoin d’être lavés pour être « propres ». Jésus lui-même, par amour, se baisse pour nous laver les pieds ; nous devons donc recevoir humblement cette grâce et, à notre tour, la transmettre en servant nos frères. C’est ainsi que la vie spirituelle progresse dans une dynamique de sainteté et d’amour partagé.

En conclusion de ce premier point, David Jang insiste sur la nécessité, pour tous les chrétiens, de ne pas se contenter d’une assurance de salut personnelle, mais de veiller chaque jour à ne pas faire de compromis avec le péché, en recherchant la sanctification. Et il rappelle que ce « lavement des pieds » n’est pas une œuvre humaine autonome, mais une réponse à l’amour et au service de Jésus. Quand l’Église vit cette réalité, elle se renouvelle et reflète véritablement la gloire de Dieu.

2. Judas Iscariot, l’insensibilité des disciples et le Seigneur qui aime jusqu’à la fin

David Jang attire ensuite notre attention sur Jean 13.2 : « Le diable avait déjà mis dans le cœur de Judas Iscariot, fils de Simon, la pensée de livrer Jésus », qu’il considère comme une scène très grave et tragique. Le fait que l’ennemi se tienne à la même table lors du dernier repas illustre la confrontation extrême entre la nature pécheresse de l’homme et la grâce divine. Malgré tout l’amour dont Jésus témoigne à son égard, Judas, au bout du compte, n’a pas retourné son cœur et a choisi le chemin de la trahison.

Selon David Jang, le diable cherche avant tout à « séparer le Seigneur et ses disciples ». S’il parvient à susciter en l’un d’eux un acte de trahison et de rébellion, c’est pour lui une victoire considérable. Cette réalité met en lumière la dangerosité des divisions, du ressentiment et de la trahison au sein même de l’Église. Pourtant, Jésus et Judas ont partagé le même pain ; Jésus a tenté de retenir Judas par son amour, allant jusqu’à lui laver les pieds. Mais « la pensée que le diable avait mise dans son cœur » avait déjà pris racine et dominait désormais son esprit.

David Jang souligne un fait frappant : lorsque Judas entreprend de livrer Jésus, les autres disciples ne se doutent de rien. Dans Jean 13.27 et suivants, Jésus dit à Judas : « Ce que tu fais, fais-le promptement », mais les disciples croient simplement que Judas est chargé d’acheter des provisions ou de donner quelque chose aux pauvres. Personne ne réalise qu’il sort pour le trahir. Cette insensibilité, cette indifférence à l’état spirituel d’un frère, a laissé la voie libre au projet funeste de Judas.

Le pasteur Jang y voit un avertissement à l’Église d’aujourd’hui. Même si nous partageons la même table, le même culte, la même communion, il peut arriver que quelqu’un nourrisse en secret des pensées de trahison ou des péchés graves. Quand l’amour fraternel est déficient et que personne ne s’intéresse vraiment à la condition intérieure de l’autre, le diable profite de cette brèche pour semer la discorde et faire tomber la communauté. C’est pourquoi la vigilance, la prière mutuelle et une attention sincère aux souffrances et tentations de chacun s’avèrent indispensables.

Ce qui est encore plus surprenant, c’est que Jésus, sachant tout ce qui se trame, offre à Judas un ultime geste d’amour. David Jang appelle cela « la dernière main tendue au traître ». Bien que Judas ait partagé le repas et même reçu le lavement de pieds, il finit par s’en aller, ignorant l’invitation finale de Jésus. L’Évangile de Jean (13.30) dépeint la scène ainsi : « Aussitôt que Judas eut pris le morceau, il sortit. Il était nuit. » Cette mention de la nuit symbolise la plongée irrémédiable de Judas dans les ténèbres, indiquant qu’il a définitivement tourné le dos à la lumière du Christ.

David Jang souligne ici la terrible portée du verbe « abandonner » ou « livrer » : à force de rejeter et de mépriser constamment l’amour de Dieu, un individu peut en arriver au point où Dieu le « laisse aller » (cf. Romains 1.24 et 1.26 : « Dieu les a livrés… »). Dans ce sens, la tragédie de Judas n’est pas due à la froideur ou à l’injustice divine, mais à sa propre décision d’épouser la pensée du diable, au lieu de répondre à l’appel insistant du Christ.

David Jang nous met ainsi en garde : chacun de nous peut, potentiellement, devenir un « Judas », un traître, si nous nous laissons gagner par le péché et la séduction de l’ennemi. Même au sein de l’Église, la trahison peut surgir. L’essentiel est de comprendre que, malgré la gravité de la situation, l’amour de Jésus reste offert jusqu’au bout. On peut, comme Judas, le rejeter ; ou l’on peut se repentir et être relevé.

Le pasteur revient aussi sur l’insensibilité des disciples. Alors même que Jésus s’apprêtait à laver leurs pieds, ils se disputaient pour savoir qui était le plus grand (Luc 22.24). Dans un tel climat de compétition et d’orgueil, on ne perçoit ni la détresse spirituelle d’autrui ni le drame qui se prépare dans l’ombre. David Jang invite alors la communauté ecclésiale à s’interroger : avons-nous le souci réel de « laver les pieds » les uns des autres ? Accueillons-nous nos frères en détresse, comme Jésus a accueilli Judas jusqu’au dernier instant ? Ou restons-nous enfermés dans l’indifférence, l’orgueil ou la rivalité ?

Enfin, David Jang donne un sens très symbolique au verset : « Judas sortit aussitôt, il faisait nuit » (Jean 13.30). Cela ne décrit pas seulement un moment du jour, mais la réalité spirituelle d’une âme basculant dans les ténèbres. Quiconque s’éloigne de l’amour du Christ et de sa lumière retombe inévitablement dans l’obscurité. Ainsi, cet épisode souligne le contraste entre la fidélité et la lumière de Jésus, d’une part, et l’endurcissement et l’ombre du péché, d’autre part.

En somme, la scène met en relief trois éléments :

Judas, l’archétype du traître dominé par ses convoitises,

les disciples, insensibles et inconscients du drame en train de se jouer,

et Jésus, qui aime jusqu’au bout et tend la main au pécheur jusqu’au moment ultime.

David Jang insiste sur le fait que le récit ne se résume pas à dire « Judas fut un mauvais disciple », mais qu’il doit nous interpeller : nous aussi, nous pouvons devenir Judas ; nous pouvons également être aussi insensibles que les disciples. Et pourtant, Jésus demeure plein d’amour, prêt à nous secourir, pour peu que nous ouvrions notre cœur. Cette histoire est donc, à la fois, un sérieux avertissement et une réconfortante promesse pour ceux qui se tournent vers Lui.

3. Jésus qui lave les pieds et l’ordre : « Lavez-vous les pieds les uns aux autres »

David Jang commente enfin Jean 13.4-5, où Jésus se lève de table, dépose son manteau, s’entoure d’un linge, verse de l’eau dans une cuvette, puis lave les pieds de ses disciples et les essuie avec le linge. Il y voit une démonstration du véritable sens de l’autorité dans le Royaume de Dieu. À l’époque, c’était la tâche d’un serviteur ou d’un esclave de laver les pieds des visiteurs ou des maîtres. Dans la relation rabbin-disciple, le disciple pouvait laver les pieds du maître, mais l’inverse était inimaginable. Pourtant, Jésus, Maître et Seigneur, accomplit ce geste humble et bouleversant.

Pour David Jang, cet acte montre « le Roi des rois faisant le service d’un esclave », non par simple représentation, mais en s’abaissant vraiment par amour. Jésus dira ensuite aux disciples : « Si donc je vous ai lavé les pieds, moi, le Seigneur et le Maître, vous devez aussi vous laver les pieds les uns aux autres » (Jean 13.14). Ce principe fondateur doit guider la communauté chrétienne : le service mutuel et l’amour humble en sont la base.

Le problème vient du fait que, même en ce moment, les disciples sont occupés à débattre de leur rang. David Jang voit dans leur comportement le reflet de notre nature pécheresse universelle. Nous sommes enclins à nous comparer, à chercher qui est « le plus grand », qui a la plus haute fonction, le plus d’influence, etc. Mais Jésus, au milieu de ces disputes, adopte l’attitude inverse : il prend la place du serviteur. Ce geste est l’exemple suprême de ce que Paul décrit dans Philippiens 2.6-8 : le Christ, « existant en forme de Dieu », s’est anéanti lui-même en prenant la condition d’esclave et en se rendant obéissant jusqu’à la mort sur la croix.

David Jang appelle cela « la liberté du serviteur par amour ». Jésus, qui détient toute autorité et toute puissance, choisit d’exercer son autorité non par la domination, mais par le service et l’humilité. C’est là la vraie liberté : se libérer de l’orgueil, du désir de dominer, pour aimer et servir. Cette logique, très différente des valeurs du monde, est au cœur du message évangélique.

Comment, dès lors, appliquer cette scène du lavement des pieds à notre vie chrétienne ? David Jang propose deux axes principaux :

Sur le plan personnel, accepter de prendre sa propre croix et d’apprendre l’abnégation et l’humilité. Le fait de reconnaître que nos « pieds » se salissent aisément nous rappelle que nous devons quitter nos désirs d’honneur et de prestige pour servir ceux qui nous entourent. Sans la croix du Christ vécue dans notre cœur, nous retombons vite dans l’orgueil et l’égoïsme, même au sein de l’Église. Comme le souligne David Jang, « sans la croix, l’Église n’est qu’un rassemblement d’orgueilleux ».

Sur le plan communautaire, instaurer une véritable culture du lavement des pieds. Cela inclut, bien sûr, le soin matériel et concret des besoins d’autrui, mais aussi l’accompagnement spirituel : quand un frère ou une sœur tombe dans le péché, au lieu de l’accabler ou de l’exclure, nous sommes appelés à le relever, à le purifier, à prier pour lui. Une Église qui vit réellement le lavement des pieds est marquée par la guérison, la réconciliation et l’amour, sans jugement ni honte inutile. David Jang emploie l’image suivante : chaque croyant doit « porter dans son cœur la bassine et la serviette » afin de pouvoir laver les pieds de ceux qui sont autour de lui.

En plus de cela, on ne doit pas oublier la parole : « Si je ne te lave pas, tu n’as pas de part avec moi » (Jean 13.8). Autrement dit, nous ne pouvons pas nous laver les pieds nous-mêmes ; il nous faut nécessairement l’intervention de Jésus, sa grâce. Même si nous sommes déjà « baignés » (régénérés), nous avons besoin de venir régulièrement à Lui pour qu’Il nous purifie de nos fautes quotidiennes. Dans le même temps, « laver les pieds » des autres ne veut pas dire « remplacer » Jésus, mais plutôt devenir canal de son amour pour mes frères et sœurs.

David Jang souligne la pertinence de ce passage pour surmonter les conflits dans l’Église. La plupart des querelles naissent de l’orgueil, de la comparaison et de la volonté de prouver qui est le plus grand ou le plus compétent. Mais Jésus, dans cette situation même, indique un chemin diamétralement opposé en lavant les pieds de ses disciples. Nous aussi, plutôt que de nous disputer pour notre place, devons apprendre à prendre la serviette et la bassine.

Il remarque par ailleurs que la culture environnante exalte toujours le succès, le pouvoir, l’influence, la domination. À contre-courant, « laver les pieds » paraît absurde et non rentable. Pourtant, explique-t-il, c’est dans ce renversement des valeurs que réside la véritable puissance de l’Évangile : quand nous choisissons d’aimer, de servir, de nous abaisser, la vie et la liberté de Dieu se manifestent.

En lien avec le temps de Pâques, David Jang rappelle que le sens du lavement des pieds devient encore plus fort au cours de la période du Carême et mène jusqu’à la célébration de la Résurrection. Le Carême est un temps de méditation sur la souffrance et la croix de Jésus, de même qu’un exercice spirituel pour marcher à Sa suite dans l’humilité et le renoncement. Dans ce contexte, « Lavez-vous les pieds les uns aux autres » n’est pas un simple rite, mais un appel concret à la conversion, à la réconciliation et au partage fraternel. Et Pâques vient montrer que le chemin de l’humiliation et de la croix n’est pas un échec : Jésus est ressuscité, prouvant que l’amour et le service humbles mènent à la victoire. David Jang insiste ainsi sur l’idée que même un acte modeste comme « laver les pieds » peut participer à la révélation du règne de Dieu dans ce monde.

Pour conclure, en synthèse de Jean 13.2-11, David Jang souligne que cet épisode du lavement des pieds est capital à trois niveaux :

Il révèle la nécessité, pour ceux qui sont sauvés, de maintenir la repentance quotidienne (se laver les pieds), même après avoir été régénérés (déjà baignés).

Il dénonce la possibilité très réelle de la trahison au sein même de la communauté, comme l’illustre Judas, et la dangerosité de l’indifférence et de l’orgueil des autres disciples.

Il montre enfin que l’autorité et la gloire véritables se trouvent dans le service humble, dans l’amour qui se fait « esclave » selon l’exemple de Jésus.

David Jang adresse alors une question directe : pouvons-nous laver les pieds de ceux que nous considérons comme des ennemis, ou des personnes qu’il nous est très difficile de servir ? Jésus a lavé les pieds de Judas, sachant déjà sa future trahison. Et nous, dont lavons-nous les pieds aujourd’hui ? Nos paroles et professions de foi sur « l’amour » se concrétisent-elles dans des actes d’humilité ? Cette question, selon lui, est cruciale pour déterminer ce qui fait la véritable Église et le vrai disciple du Christ.

En définitive, le commandement « Lavez-vous les pieds les uns aux autres » est, certes, exigeant, mais recèle une merveilleuse grâce. Puisque Jésus nous a d’abord lavés et s’est offert à nous, nous avons la possibilité et la force de faire de même pour les autres. C’est dans ce mouvement de réciprocité que se trouve la mission concrète de l’Église et la raison même de son existence.

Ainsi, le sens profond de ce chapitre de l’Évangile de Jean, selon l’interprétation de David Jang, se résume dans la « régénération » (celui qui est baigné), la « repentance continue » (laver ses pieds chaque jour), la « vigilance face à la trahison » (le drame de Judas), et la « dynamique d’amour et de service » (se laver mutuellement les pieds). Telle est la voie du Christ, la voie de la grâce et de la vérité, qui appelle chaque croyant et chaque Église à s’aligner sur l’exemple du Maître. C’est ainsi que nous pouvons expérimenter la joie et la profondeur du salut et vivre, ensemble, la réalité du Royaume de Dieu.

已经沐浴之人 —— 张大卫牧师

1. 耶稣的“爱到底”与“已经沐浴之人”的含义

张大卫牧师在默想约翰福音13章2-11节中耶稣为门徒洗脚的事件时,强调这是对基督徒生活和教会共同体具有极其重要意义的一段经文。此段经文描述了在最后的晚餐时,魔鬼已经将出卖耶稣的念头放在加略人犹大的心里,由此暗示出极度紧张与悲剧的预兆。即便如此,主在明知自己即将受死的时刻,仍爱门徒到底,甚至盼望连仇敌也能回转。这份爱在经文中特别体现在“已经沐浴的人,除了脚以外并用不着洗,身子是干净的”(参约13:10)这句话中。此话提示了重生之人(中生)与每日悔改的必要性这两者间的紧张关系。

张大卫牧师首先强调,“已经沐浴之人”这一表达指向信仰的根本——即重生(中生)的经历。藉着相信耶稣基督,人从罪中得释放,进入新的生命,这是一种根本性的转变。若用比喻来说,为了参加宴席,理应先行沐浴,表示自己具备进入宴席的资格;然而人在路途中,脚却难免会被尘土和泥泞弄脏,所以在正式进入宴席之前,还需再洗脚。对有信仰的人而言,这象征着即便已经接受了真理与得救的信心,但在日常生活里依然会有“犯罪迅速的脚”,因此必须不断悔改、不断得洁净。

张大卫牧师再三强调,重生经历才是信仰的起点与不可或缺的要素。如果有尚未“沐浴”(未重生)的人,纵然表面上也参与了教会的礼拜和事奉,但在真实意义上仍与主无关。正如加略人犹大虽与主同在,却并未真正领会基督的爱,最终走上了背叛的道路。然而,这并不意味着凡是经历过重生的人就不再犯罪,成为了完美无暇的存在。“已经沐浴之人”在日常生活里也会因行走在尘世而“脚被玷污”,因此每天都需要洗脚。洗脚的过程乃是对“自犯罪”的对付,是对人即便得救之后仍存留的罪性(罪性)所进行的日常属灵争战的体现。

约翰福音13章里,耶稣的行为似乎颠覆了当时师生或尊卑的传统:当时一般是地位高的人或老师让门徒或仆人给自己洗脚,但耶稣却反过来,亲自为门徒洗脚。张大卫牧师将其解释为“成为爱之仆”的耶稣甘愿极度谦卑的表现。祂亲身示范了在神国度中,真正的权柄与荣耀来自服事与谦卑的神圣悖论。

当西门彼得看到耶稣要为他洗脚时,心生反对:“主啊,你竟给我洗脚吗?”(参约13:6)他不明白耶稣为何要采用如此谦卑的行动。耶稣却坚定地说:“我若不洗你,你就与我无分了。”(参约13:8)对此,张大卫牧师强调,无论我们觉得自己多么不配或卑微,如果拒绝了主的恩典和爱,我们就无法与主联合。对于一个罪人而言,拒绝主的恩典才是最大的骄傲。

当彼得听到这句话后大惊,便说:“不但我的脚,连手和头也要洗。”(参约13:9)耶稣答道:“已经沐浴的人,除了脚以外,并用不着洗,身子是干净的。”(参约13:10)这显示出,对于已经在信心里重生之人,需要的并不是否定自己已经得到的重生、或一再重复“重生仪式”,而是在每日的生活里对所犯的罪进行悔改与洗净。张大卫牧师亦将此与洗礼的意义联系起来:用水进行的洗礼只是对内在已经发生的圣灵洗礼的一种外在公开见证。虽然教会传统中极为重视洗礼的仪式,但仪式本身并不必然保证重生。真正关键的是藉着圣灵的工作,个人能否真心离弃罪,并在基督里获得新的生命。

然而,这并不是终点:已经“沐浴”的人也仍须洗脚。张大卫牧师指出,人性与肉体依然暴露在罪的环境里。即使信了耶稣、经历了重生的基督徒,也可能在世上遭遇贪心、嫉妒、恨恶、淫乱、骄傲等各样罪的诱惑,甚至屈服于其中。所以必须不断地洗脚,即每日悔改、每日回转。若不如此,便可能与主失去关联。张大卫牧师郑重警告说,这是基督徒在现实中切实要面对的处境。

他称这为对基督徒“真实存在状态”的宝贵洞见:一方面,我们在耶稣里已经得着了完全的救恩,被神的恩典称为儿女;另一方面,在世上生活时,我们又常常不顺从圣灵、却顺从肉体的情欲。引用保罗在罗马书3章15节的描绘——“他们的脚飞跑行恶”,人总是很容易奔向罪。我们唯一能做的就是赶紧回到耶稣面前,说:“主啊,求你洗净我的脚”,并在这过程中不断追求圣洁。

在约翰福音13章里出现的“已经沐浴之人”具有两层意义:其一,表示已经得救,可以参加“神的筵席”的身份;其二,仍需透过洗脚,随时更新与主的关系。张大卫牧师将这归纳为“对恩典的大胆仰赖”和“在恩典中的警醒”这两大要点:一方面,要深切默想我们这样不配的罪人却被耶稣爱到底、完全接纳;另一方面,则要不断自我省察,不轻忽这恩典,也不将它当作理所当然。唯有谨守这两方面的平衡,基督的教会和圣徒才能在这张力中稳步向前。

“已经沐浴之人”珍视此身份,并通过每日洗脚、每日悔改而持续来到主面前。这不仅是个人灵修或敬虔生活的层面,也与教会共同体的本质相连。教会若能学习耶稣那样彼此洗脚——即彼此在爱里谦卑服事,当看到彼此的罪和软弱时,不是定罪或疏离,而是如同洗脚般为对方祈祷并劝勉,才是教会应有的文化。若缺乏这种文化,教会必容易陷入人与人之间的争吵和纷争。正如路加福音22章所见,在最后晚餐的席间,门徒中也曾为“谁为大”而争执不断,这揭示了人性中偏好支配和区分尊卑的本能是何其强大。

最终,张大卫牧师将“已经沐浴之人,只有洗脚就够了”这句耶稣的话,解读为对所有教会内外之人的邀请:顺从并效法耶稣的爱与服事。我们已藉着重生受到邀请进入天国的筵席,却仍需要每天洗脚,以维持心灵的洁净。而那位亲手为门徒洗脚的耶稣,呼唤我们定睛于祂的爱——祂用爱俯身洁净我们,我们要不断地紧紧依靠这恩典,并用同样的爱彼此服事,从而在基督的门徒道路上渐渐成长。

所以,在小主题“1. 耶稣的‘爱到底’与‘已经沐浴之人’”的探讨中,可以清楚看到:根本性的重生与每日悔改之间的平衡何等重要。张大卫牧师藉此提醒所有基督徒,不要只停留在“已经得救”的确信上,而要天天洗脚,不与罪妥协,以活出圣洁与敬虔的生命。更重要的是,这一切“洗脚”的过程并非由人自己完成,而是靠耶稣的爱与服事;我们若以此恩典为根基并彼此共享,教会共同体就能不断被更新。

2. 加略人犹大与门徒的无情,以及“爱到底”的主

在解读约翰福音13章2节——“魔鬼已将卖耶稣的意念放在西门的儿子加略人犹大心里”时,张大卫牧师指出,这是极其严肃且悲剧性的一幕。最后晚餐之中,仇敌竟与其他门徒同席,充分反映了人性的罪和神的恩典在此处激烈碰撞。犹大在经历过主的大爱后,仍然不肯回转,选择了背叛。

首先,张大卫牧师提到,魔鬼的“最大目标”就是离间主与门徒。若能让门徒中有人叛变,便是魔鬼的最大胜利。这提醒我们,教会内部发生的背叛、分裂、猜忌和仇恨是何其危险。耶稣与犹大可谓同桌共席,耶稣努力抓住他直到最后,但犹大却始终拒绝了主的爱之呼唤。“魔鬼放进他心里的意念”最终主导了他。

在这一点上,张大卫牧师强调了一个令人警醒的事实:当犹大动了要出卖耶稣的念头时,其余门徒似乎对其严重性毫无察觉。根据约翰福音13章27节及下文所示,耶稣对犹大说“你所做的,快做吧”时,其他门徒却还以为犹大是要去购买什么或施舍穷人。竟无人看出他要离席背叛主。这种对同伴属灵状态的冷漠和迟钝,以及彼此间爱的匮乏,恰恰让魔鬼有机可乘。

张大卫牧师指出,这恰是对今日教会现况的一个反照。就像我们如今在教会或信仰群体中,表面看似一同敬拜、一起享用餐点,但可能有人内心深处已酝酿对神和对教会的背叛或离弃,而我们因缺乏属灵的敏锐和关怀,以至于完全没有察觉。教会若缺乏彼此的代祷和警惕,无法对伤痛和软弱予以爱心关注,魔鬼就会趁虚而入,挑起分裂并毁坏群体。

更令人惊叹的是,耶稣虽完全知晓犹大将背叛自己,却仍爱他到底。张大卫牧师称其为“主为背叛者所预备的最后爱的触动”。犹大与主一同吃饭,甚至被洗脚后仍选择离开,这是人类角度无法理解的彻底背叛。“犹大受了那点饼,立刻就出去。那时候是夜间了。”(约13:30)这节经文以“夜”来描绘最终的悲剧性结局:犹大主动走进黑暗里,做出不可逆转的选择。

在此,张大卫牧师谈到被“撇弃”的可怕——或说当神“任凭他们”的可怕(参罗1:24, 26)。当一个人不断拒绝神的爱与呼唤,最终就会深陷无法回头的深渊。犹大因为自己的贪念和叛逆,不肯收回心意,也漠视主屡次以爱所发出的劝诫,最终就成为了“被撇下的那一位”。然而,这并非上帝冷酷无情,而是因为人在先拒绝了上帝的手,转而亲近魔鬼所播下的虚假种子。

接着,张大卫牧师藉犹大的例子提醒我们:任何人都可能堕入罪与试探,甚至走上无法回头之路。教会里也可能出现像犹大那样的背叛者,而我们自己也可能在某些情况下做出“犹大式”的选择。关键在于:主的爱已经赐下,但若我们拒绝或滥用这爱,就可能陷入信仰的黑暗中。

除此之外,他还尖锐地剖析了其他门徒的迟钝。在最后晚餐前,门徒之间已经在争论谁更伟大(参路22:24)。在这种自私心态或争名夺利的气氛中,自然无人能留意到同伴灵魂的挣扎与异动,甚至没有一个人为犹大的人生选择痛心或尝试挽回。

张大卫牧师强调,这对教会共同体是一种严峻的提醒:我们是愿意成为那个愿意为同伴“洗脚”的人,还是只会忙于“谁更大”的争吵、对彼此的灵命冷漠无情?当教会内部出现矛盾冲突,或者有人在属灵生命中严重摇摆时,我们能否如耶稣一样,竭力以爱相待,坚持到底?还是像门徒那样,认为“这与我无关”,对身边人步入毁灭视而不见?

此外,张大卫牧师对约翰福音13章30节——“犹大就立刻出去。那时候是夜间了。”进行了象征性的诠释:这里的“夜”不仅指当时天色已晚,更暗示了罪和绝望的灵性黑暗。离开耶稣的筵席,就再也无法处在光明之中,只剩下被黑暗吞噬的可悲结局。

结果,整段经文里出现了三个强烈对比:背叛者犹大、无情迟钝的门徒,以及“爱到底”的耶稣。张大卫牧师指出,此景象里既看到了神爱之浩大,也目睹了人性之顽固。主甚至为仇敌洗脚并给予最后劝诫,但犹大仍拒绝了这爱;其他门徒亦缺乏足以阻止悲剧发生的成熟爱心和警醒。

教会里经常也会重演这些冲突和背叛的场景:我们表面一同敬拜、同工,内里却可能存在彼此妒忌、争吵、背叛的种子。倘若真是这样,那耶稣在这种情形下会怎么做?张大卫牧师的回答是:主仍然在此,仍旧将爱到底,但选择在我们自己手中——我们或可走向犹大所走的道路,也可以借主的恩典含泪回转得痊愈。

因此,小主题“2. 加略人犹大与门徒的无情,以及‘爱到底’的主”告诉我们:教会共同体和个人都要谨慎提防罪与背叛,也要记取耶稣如何仍然深爱背叛者并为其洗脚。张大卫牧师强调,这段经文并非简单告诉我们“犹大是坏门徒”,而是提醒我们“我们随时可能成为犹大,但主依旧爱我们到底”。这既是警示,也是安慰。

3. 洗脚的耶稣与“你们也应彼此洗脚”的命令

张大卫牧师在解读约翰福音13章4-5节(耶稣脱下外衣,拿一条手巾束腰,倒水在盆里,给门徒洗脚,并用所束的手巾擦干)时,指出这是向我们展示天国真正权威的极具震撼力的事件。在当时,洗脚通常是仆人或地位卑下者的工作;或在师徒关系中,徒弟可以为老师洗脚,但老师为徒弟洗脚则不可思议。

然而,耶稣却系上手巾,一个个地为门徒洗脚。张大卫牧师将其称为“万王之王却甘愿成为万仆之仆”。这并非作秀,而是耶稣真正“倒空自己”的体现。祂随后命令门徒:“我是主、是夫子,尚且洗你们的脚,你们也当彼此洗脚。”(参约13:14)这为教会共同体指明了最根本的态度——彼此相爱、谦卑服事的榜样。

问题在于,当时的门徒们却依然在争论谁的地位更高(参路22:24)。张大卫牧师指出,这反映了人性的普遍罪性:即使在信仰群体里,也会有无休止的相互比较和竞争,关心“谁更被看重”、“谁更有影响力”。耶稣却在这样的争执中,以“成为仆人”的方式示范了真正的爱和真正的权柄。

张大卫牧师称之为“爱之仆的自由”:耶稣是万有之上的那一位,但祂使用权柄的方式并非统治或高高在上,而是透过爱的服事,“成为仆人”。正是在这种成为“爱之仆”的状态下,人反倒能享受到完全的自由,不再被各种要掌控、要炫耀的欲望所束缚。这与腓立比书2章6-8节保罗所描述的耶稣“倒空自己,取了奴仆的形象”相呼应。

对于身处当代的基督徒而言,该如何在生活中落实耶稣的这一行动?张大卫牧师从两个层面进行阐释:

第一,个人层面上,需背起自己的十字架,学习自我倒空与谦卑。我们的脚随时会因罪而玷污,想要作那洗脚服事他人的人,就必须先放下自己的骄傲与私欲。十字架正是这种“自我否定”的场所。如果在教会、家庭或个人心中,没有“十字架”居首,我们很容易又陷入以自我为中心、追求支配与利益的模式。张大卫牧师语气强烈地指出:“若无十字架,教会最终也不过是骄傲之人的聚集。”

第二,在教会共同体层面,需要形成“彼此洗脚”的文化。这不仅限于实际照顾或供应对方物质所需,更包括在属灵层面上,用爱遮盖并帮助彼此从罪和过犯中恢复,并在悔改的道路上彼此带祷。若教会真能践行“洗脚”的精神,就不会有一味的论断或羞辱,而是充满医治与和好。张大卫牧师形象地说,信徒要常常随身“携带洗脚用的盆和手巾”,随时预备好服事别人。

与此相呼应的是耶稣那句“我若不洗你,你就与我无分”(参约13:8)所带来的严肃性。这里表明,我们并非靠自己就能洗净自己的脚,本质上仍需要耶稣亲自的洗涤。即便已重生的信徒在属世道路上继续前行时,一旦脚再次沾染尘垢,也必须回到耶稣面前得洁净。而我们彼此洗脚,则是愿意成为耶稣爱的管道,将耶稣的医治与洁净传递给对方。

张大卫牧师建议,当教会遭遇争执与冲突时,应当回想约翰福音13章中耶稣“洗脚”这一幕。大多冲突来自彼此的比较、谁对谁错、谁功劳更多等。耶稣却在此刻拿起毛巾、倒水、洗脚,将与世俗“谁做王、谁掌权”截然相反的道路明确呈现。祂作为师长和主宰,都甘心俯身成为仆人,正宣示了我们也当走相同的道路。

在这个追求“为王掌权”的世界里,成功、支配、影响力是人们所看重的。然而,“彼此洗脚”的生活模式在世人眼中可能显得荒谬甚至无效,但张大卫牧师强调,正是这“悖论”当中蕴含着真正的生命和自由。我们为别人洗脚时,那洗脚的行动本身就让耶稣的爱活现于当下。

另外,张大卫牧师认为,“洗脚”的信息在教会历法中的四旬期(预备受难节和复活节)尤为重要。四旬期是默想耶稣受难与十字架的时节,我们随主同走卑微与顺服之路;若此时能重温耶稣“你们也当彼此洗脚”的吩咐,就能促使我们的信仰不仅停留在教堂的礼仪层面,更在日常生活中落实悔改、服事与分享。

至于复活节,则见证了主的谦卑与牺牲并非失败或挫败,而是藉着复活而转为荣耀。张大卫牧师认为,我们彼此洗脚的这个小小行为,也终将通往复活的荣美之路。纵然世人看来毫无功利意义,但其间蕴含的却是真正的自由与喜乐。

总之,在张大卫牧师的阐释下,约翰福音13章2-11节里耶稣洗脚的事件,既关乎教会的本质,也关乎基督徒的身份。

“已经沐浴之人”——重生的确据,却也须天天洗脚、天天悔改,务必留心脚上的污秽。

加略人犹大的背叛与其他门徒的迟钝——警醒我们在教会里同样可能隐藏罪的危机和彼此疏离。

耶稣亲自洗脚的行动——显明唯有当教会学会跟随这位“爱之仆”、让洗脚的爱充满其间,才能完成真合一与福音的喜乐。

最后,张大卫牧师提出一个质问:今天我们能为那些我们视为“仇敌”或在教会里最难服事的人洗脚吗?耶稣尚且愿意为加略人犹大洗脚,我们又愿意为谁洗脚?我们的信仰是否只在口头上倡导“彼此相爱”,却从不实际在卑微的姿态中服务人?在这个发问面前,我们能否诚实面对自己,进而被主的爱更新?这一切正是教会之所以为教会、基督徒之所以为基督徒的关键。

因此,“洗脚”的命令对我们来说既是高标准,也是何等大的恩典:主知道我们无力彼此洗脚,便先来为我们洗脚;当我们每日在尘世生活里再度弄脏时,祂仍然俯身为我们擦洗。得着如此爱的人,也就被呼召去为他人洗脚,在这过程中将基督的馨香之气散播开来。这便是教会使命与存在的真实目标。

综上所述,小主题“3. 洗脚的耶稣与‘彼此洗脚’的命令”展现了“洗脚”在属灵与实际行动层面的深远意义。张大卫牧师认为,耶稣“你们也当彼此洗脚”的教导,正是教会恢复弟兄之爱、并向世界见证基督真爱的途径;这条道路同时也是我们从四旬期走向复活晨曦的朝圣之路。唯有实际效法耶稣的谦卑与牺牲,纵然洗脚看似微小,却包含着使神国度临到的伟大力量。

若综合张大卫牧师的整体阐释,可以看出,约翰福音13章里洗脚的核心信息包括:

已得救之人的不断悔改;

对教会内部背叛可能性的警惕;

效法耶稣这位“爱之仆”,彼此谦卑相爱。

唯有行走在这条耶稣指示的道路上,我们才能真正进入恩典、真理与爱得以完全成就的生命里。愿所有“已经沐浴之人”更加深刻体会救恩的丰富,并在彼此服事的教会群体里持续成长。阿们。

すでに身を洗った者 – 張ダビデ牧師

1. イエス様の最後までの愛と「すでに身を洗った者」の意味

張ダビデ牧師は、ヨハネの福音書13章2~11節に記されたイエス様の足を洗う場面を深く黙想し、この場面がクリスチャンの生活や教会共同体にもたらすメッセージを非常に重要なものとして扱っています。この本文では、最後の晩餐の席でサタンがすでに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心に裏切りの思いを入れていた点から、極度の緊張感と悲劇が予告されます。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主はご自身の死が近いことをご存じでありながらも最後まで愛し、敵ですら悔い改めることを望むほどの愛を示されました。特に「すでに身を洗った者は足だけ洗えばよい。全身は清いのだから」(ヨハネ13:10)というイエス様の言葉は、再生(重生)した者と日々の悔い改めが必要な者の間にある緊張関係をよく示しています。

張ダビデ牧師はまず、「すでに身を洗った者」という表現が、信仰の根本をなす再生(重生)体験を意味すると強調します。これ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罪から解放され、新しい命へと移される根本的な変化です。たとえるならば、祝宴に招かれて入るためには、あらかじめ体を洗っておくことが礼儀であり、その宴に参加する資格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道を歩むうちに足はどうしてもほこりや泥で汚れてしまうため、宴に本格的に加わる前には足を改めて洗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れは、信仰をもった者も日々の生活の中で「罪を犯しやすい足」を持っているがゆえに、絶えず悔い改めと清めを必要としていることを象徴しています。

張ダビデ牧師は、再生(重生)体験こそが信仰生活の出発点であり必須要素であることを重ねて強調します。もしまだ「身を洗う」(再生)体験をしていない人がいるなら、その人はたとえ教会の礼拝や奉仕に参加していても、真の意味では主と関係を結んでいないことになると語ります。これ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主のそばにいながらも、ついにキリストの愛を悟ることなく裏切りの道へと進んでしまったのと同じだというのです。しかし、それだからといって、一度再生した人がまったく罪を犯さない完全無欠な存在とな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すでに身を洗った者」であっても、日々の生活の中で足が汚れ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絶えず自分の足を洗う過程が必要です。この「足を洗う」過程は「自発的に犯した罪(自犯罪)」に対処することであり、救いを得た後にも残る罪の性質(罪性)と毎日戦わなければならない霊的戦闘を意味します。

ヨハネ13章に描かれたイエス様の行為は、当時の師弟関係の伝統的な上下関係を覆すものでした。師や身分が高い者が、弟子や召使いに足を洗わせるのが一般的でしたが、イエス様は逆に弟子たちの足を自ら洗われたのです。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愛のしもべ」となられたイエス様の極端なへりくだりだと説明します。イエス様は、真の権威と栄光は仕えることから来るという神の国の逆説を自らの姿で教えられました。

この行動を見たシモン・ペテロは反発します。「主よ、主が私の足を洗われるのですか?」という驚きは、なぜイエス様がそのような謙遜な行為をされるのか理解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しかしイエス様は、「もしわたしがあなたを洗わないなら、あなたはわたしと何の関わりもないことになる」(ヨハネ13:8)と断固たる口調でおっしゃいます。ここで張ダビデ牧師は、私たちがいかに自分には資格がないと思い、自分を卑しい存在だと見なそうとも、主の恵みと愛による洗いを受けなければ、決して主と結びつくことはできないのだと力説します。罪人である私たち自身が、主の恵みを拒むことこそ最大の高慢だというのです。

ペテロがこれに驚き、「足だけでなく、手も頭も洗ってください」と言うと、イエス様は「すでに身を洗った者は足だけ洗えばよい」とお答えになります。これは、信仰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者に必要なのは「日々の罪の清め」であって、再びその存在自体を否定したり、新たに再生の儀式を繰り返すことではないという点を示唆します。張ダビデ牧師は洗礼の意味もこれと関連づけて解説します。水による洗礼は、すでに内面で起こった聖霊の洗礼を公に表す外的な標識にすぎないのであって、その儀式自体が再生を保証す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本当には聖霊の働きを通じて個人が罪から立ち返り、キリストのうちに新しい命を得る根本的な体験が必要なのだと、張ダビデ牧師は強調します。

しかし、ここで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一度「身を洗った」人であっても、足は洗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張ダビデ牧師は、人間の肉体と本性が依然として罪にさらされていることを指摘します。たとえイエス様を信じて再生したクリスチャンであっても、世の中で生きるうちに貪欲、憎しみ、ねたみ、淫乱、高慢などあらゆる罪の要素に触れ、ときにそれに屈してしまう危険があるのです。だからこそ、絶えず足を洗う、つまり日々悔い改めて立ち返る過程が必要になります。そうしなければ、主と関わりのない者へと堕ちる恐れがあると張ダビデ牧師は警告します。

張ダビデ牧師は、これこそがクリスチャンの実存的な立場への貴重な洞察だと言います。私たちはすでにイエス様のうちに完全な救いを得ており、その恵みによって神の子どもとされました。しかし同時に、この地上で生きている間は、しばしば聖霊に従わず、肉の欲望に足を引っ張られてしまいます。使徒パウロの言葉を借りるならば「彼らの足は血を流すほうに速い」(ローマ3:15)のです。私たちの「足」は、あまりにも簡単に罪へと走り出す傾向があります。そのとき私たちがすべきことは、ただちにイエス様のもとへ行き、「主よ、私の足を洗ってください」と告白し、聖なる生き方を追い求めることです。

ヨハネ13章に登場する「すでに身を洗った者」は、こうした2つの大きな意味を持っています。1つは、すでに救われた存在として神の祝宴に参加できる身分が与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り、もう1つは、足を洗うことで主との関係を常に新しく保つ必要があるという点です。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恵みに対する無謀さ」と「恵みの中での目覚め」という2つのキーワードで解き明かします。一方では、まったく資格のない罪人を最後まで愛し、包み、受け入れてくださるイエス様の恵みがいかに大きいかを深く黙想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他方では、その恵みをないがしろにしたり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自らを常に点検し、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キリストの教会と信徒たちは、この緊張関係を失わないように強く求められるのです。

この「すでに身を洗った者」という身分を大切にし、足を洗う日々の悔い改めによって絶えず主のもとへ進むことは、単なる個人的な敬虔生活にとどまりません。まさに教会共同体の本質ともつながっています。教会の中で互いの足を洗い合う奉仕は、イエス様ご自身が示されたへりくだりと愛の実践をそのまま踏襲するものです。互いの罪や過ちを見出したとき、ただ裁いたり距離を置いたりするのではなく、むしろ足を洗う心でケアし、祈り、勧め合う文化が求められます。そうした文化がなければ、教会はすぐに人間的な争いや対立に埋もれてしまうでしょう。最後の晩餐の席でも、弟子たちは誰が一番偉いかで争っていたことを(ルカ22章)見てもわかるように、仕えるよりも支配や上下関係を先に立てようとする人間の本能がいかに強いかが暴露されています。

結局のところ、張ダビデ牧師は「すでに身を洗った者は足だけ洗えばよい」というイエス様の言葉を、教会の内外すべての生活においてイエス様の仕えと愛に倣って生きるよう招いていると解釈します。私たちはすでに再生によって祝宴に招かれましたが、日々足を洗わなければ清さを保つことができません。だからこそ、イエス様が自ら進んで足を洗ってくださるその愛を深く悟り、その恵みにすが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過程を通して、私たちは真のキリストの弟子として成長していきます。

このように、小主題1で扱った「すでに身を洗った者」の意味は、根本的な再生(重生)と日々の悔い改めが緊張関係の中でバランスを保た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ま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真理を通してすべてのクリスチャンが個人的な救いの確信にとどまらず、絶えず自らの足を洗うべきであると強調し、罪と妥協しない聖さと潔さの生活へと進むよう呼びかけます。そして、このすべての「足の洗い」の過程は、自分で洗うのではなく、イエス様の愛と仕えによって行われ、私たちがその恵みに応答し、また互いにも分かち合うときに、教会共同体が新たにされるのだと語るのです。

2. イスカリオテのユダと弟子たちの無関心、そして最後まで愛される主

張ダビデ牧師は、ヨハネ13章2節、すなわち「夕食の間、悪魔はすでにシモンの子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心に、イエスを売ろうという思いを入れていた」という部分を、きわめて深刻で悲劇的な場面として解釈します。最後の晩餐の席に敵がともに座っていたという事実自体が、人間の罪性と神の恵みがどれほど劇的に衝突するかを示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ユダはイエス様からあれほど愛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ついにその心を翻さず、裏切りの道に入ってしまいました。

まず、張ダビデ牧師はサタンが「主と弟子を引き離すこと」を最大の目標としていると語ります。弟子のうちのひとりを選んで主に対し反逆や裏切りを起こさせることは、サタンにとって最高の成功だからです。これは、教会内部で起こる裏切りや分裂、不信や憎しみがいかに危険であるかを警告します。ユダとイエス様は確かに同じ食卓でパンを割き、イエス様はそれほどまでに彼を最後までつなぎとめようとされました。ところがユダはその愛の招きを自ら振り払ってしまうのです。イエス様が足を洗ってくださり、最後まで愛とチャンスを与えても、「サタンが入れた思い」という偽りの種が、すでにユダの心を支配していました。

ここで張ダビデ牧師は、もう一つ重要な点を指摘します。それ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イエスを売る考えを抱き始めたとき、ほかの弟子たちはその深刻さにまったく気づかなかったという事実です。ヨハネ13章27節以降を見ると、イエス様がユダに「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すぐにしなさい」と言っても、弟子たちはユダが施しのための買い物に行くのだろう程度にしか考えていませんでした。誰も彼が裏切ろうとして出て行くことを知りませんでした。彼らの無関心と鈍感、そして他人の霊的状態を深く気遣わない態度こそが、結果的に共同体内部で大きな裏切りが起こりうる土壌を提供した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れは現代の教会の姿にも当てはめて振り返る必要があると語ります。教会や信仰共同体でも、表向きはともに礼拝や食卓を囲んでいても、誰かが心の奥で裏切りの種を育て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もし私たちが愛に鈍感で、お互いの魂に無関心であるならば、いつかサタンはその隙を狙って共同体を崩壊させようとするでしょう。だからこそ教会共同体は互いのために祈り、霊的に警戒し合いながら、同時にお互いの傷や痛みを見つめていく必要があるのです。

それにもかかわらずさらに驚くべきことは、イエス様はユダの裏切りをすでにご存じであったのに、彼を最後まで引き留めようとなさったという点で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場面を「主が裏切り者に注がれる最後の愛の手」と呼びます。ユダは晩餐を共にし、しかも足まで洗われた状態で出て行ってしまいましたが、これは人間の観点からすれば到底理解できないほど大きな裏切りです。「ユダが出て行った。それは夜であった」(ヨハネ13:30)という聖書の言葉は、この悲劇の頂点を示します。闇の中へと消えていったユダの姿は、結局彼自身の意思でその取り返しのつかない道を選んだことを表してい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の箇所から「神に放置される」ということ、つまり神が私たちを「そのままにしておかれる」ことの恐ろしさについて語ります。ローマ1章24節と26節で「それゆえ神は彼らを放っておかれた」という表現が出てきますが、これは神の愛と招きを持続的に拒み続ける者が、ついに自分で戻れなくなる深淵へと落ちていくことを指しています。ユダは貪欲と裏切りの思いを自ら取り下げることなく、主の重ねての愛の勧めを退けてしまいました。結果として彼は「放置される者」となったのです。しかし、この放置は神が冷酷で無情だからということではなく、人がまず神の御手を拒み、背を向け、サタンの思いを受け入れたからにほかなりません。

張ダビデ牧師は、ユダの例を通して私たちもいつでも罪と誘惑に陥り、取り返しのつかない道を行く可能性があることを思い起こさせます。教会共同体の中にもユダのような裏切り者が現れるかもしれないし、もしかすると私自身がそのユダになるかもしれないのです。大切なのは、主の愛がすでに注がれているのに、それを拒んだり悪用したりしてしまい、ついには信仰の暗闇に堕ちてしまわないよう、常に目を覚ましていることです。

また、ほかの弟子たちの鈍感さについても、張ダビデ牧師は鋭く指摘します。最後の晩餐の直前、弟子たちは誰が偉いのかをめぐって争っていました(ルカ22:24)。こうした心の状態では、決して他者の内面的葛藤や罪の渦を察知できません。むしろ自分自身の欲や席争いに没頭しているため、すぐ近くの兄弟が裏切り者へと堕ちていく過程を愛ある眼差しで見守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教会共同体が深く受け止めるべき教訓だと語ります。私たちは互いに「相手の足を洗う人」になっているでしょうか。それとも、「誰が偉いか」を争い合い、お互いに無関心でいるのでしょうか。教会の中に対立や分裂が生じるとき、あるいは誰かが霊的に大きく揺れ動いているとき、私たちはイエス様がなさったように真心から最後までつなぎとめる愛を示しているでしょうか。それとも「まさか自分じゃあるまいし」と考え、何の関心も払わず隣人の破滅を放置しているでしょうか。

さらに張ダビデ牧師は、ユダがついに席を蹴って「夜」の中へと出て行った(ヨハネ13:30)という描写を非常に象徴的に捉えます。ここで「夜」とは単に日没後の時間だけでなく、霊的な暗闇、罪と絶望の場を意味します。ユダが主の晩餐を離れてその闇へと入っていったように、誰でもイエス・キリストの愛から離れてしまえば、もはや光のうちにとどまれず暗闇に捕らえられてしまうのです。

結局、このすべての場面は、裏切り者ユダと無関心な弟子たち、そして最後まで愛を注がれるイエス様という対照的な姿を映し出していま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対比の中で神の愛がいかに大いなるものであり、人間の罪性がいかに頑固であるかをあわせ見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ります。主は敵に対してさえも愛を示し、足を洗い、最後の勧めの手を伸ばされましたが、ユダはその愛を退けました。しかし他の弟子たちも、その裏切りの過程を阻止するほどに成熟した愛と関心を示し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

私たちが教会の中でしばしば出会う対立や裏切りは、この場面が繰り返される小さな縮図と言えるでしょう。いっけん同じように賛美し、奉仕し、食卓を囲んでいても、内面では互いをねたみ、憎み、競い合い、ときには裏切りと分裂の種を心に秘めていることもあるのです。では、イエス様はそのすべての状況の中でいったい何をなさるのでしょうか。張ダビデ牧師によれば、主は今もその場所にとどまり、最後まで愛の手を差し伸べてくださると言います。しかし最終的な選択は私たち自身に委ねられています。ユダのようにその手を振りほどくこともできるし、主の恵みによって涙ながらに立ち返り回復され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

このように、小主題2で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と弟子たちの姿を通し、教会共同体と個々の信仰者が警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罪と裏切りの可能性を示しています。そして同時に、イエス様が示された最後までの愛がいかに偉大で不思議なものであるかを私たちに教えていま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本文が単なる「ユダは悪い弟子だった」という話で終わるのではなく、「私たちもいくらでもユダになりうる。しかし主は今も私たちをつかんでくださる」という警告であり、慰めでもあると解釈しているのです。

3. 足を洗われるイエス様と「互いの足を洗い合いなさい」という命令

張ダビデ牧師は、ヨハネの福音書13章4~5節でイエス様が実際に上着を脱ぎ、腰に手ぬぐいをまとい、たらいに水を汲んで弟子たちの足を洗い、その手ぬぐいで拭かれた場面を、神の国における真の権威が何かを示す劇的な出来事として理解しています。当時、足を洗う行為は普通、下僕やしもべの役割でした。あるいはラビと弟子の関係でも弟子がラビの足を洗うことはあっても、ラビが弟子の足を洗うことは想像さえできませんで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イエス様は腰に手ぬぐいを巻いて、一人ひとりの足を洗われます。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万王の王がしもべの中のしもべとなられた」という表現で、これは単なる見せかけのパフォーマンスではなく、真の“へりくだり”の本質を伴う行為なのだと解説します。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だから、あなたがたも互いの足を洗うべきである」(ヨハネ13:14)と命じられます。これは教会共同体が持つべき根本的な態度、すなわち互いへの仕えと愛の手本となるのです。

問題は、弟子たちがその状況下でも誰が一番偉いかを争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ルカ22:24)。張ダビデ牧師は、この弟子たちの姿こそ人間の普遍的な罪の性質を表していると見ています。私たちがしばしば信仰共同体の中でも際限なく比較し合い、競争し合い、誰がより評価されるか、誰がより影響力を持つかを計算する姿と何ら変わりはないというのです。ところがイエス様は、その争いや競い合いの真っ只中にあって、自らしもべの姿を取ることによって、真の仕えとは何か、愛のもたらす真の権威とは何かを示されました。

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愛のしもべとなる自由」と呼びます。すなわちイエス様は万物の上におられ、あらゆる権威を持たれる方ですが、その権威の行使の仕方は支配や君臨ではなく、「愛によって仕えるしもべ」としての姿でした。「愛のしもべ」となるとき、そこにこそ真の自由が訪れるのです。自分を捨ててへりくだる生き方によって、むしろどのような抑圧も恐れもない自由を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ます。これは、ピリピ2章6~8節でパウロが語る、イエス様が「ご自分を無にしてしもべの形を取り、自ら低くされた」という出来事と完全につながっています。

では、今日を生きるクリスチャンたちはどうすればイエス様のこの行為を実践できるのでしょうか。張ダビデ牧師は主に2つの次元で説明しています。

1つ目は個人の次元です。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自己を捨て、へりくだりを学ぶ必要があります。私たちの足はいつでも罪によって汚れる可能性があります。また、他者の足を洗うような生き方を選ぶには、どうしても自分の欲望や高慢を下ろ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十字架こそが、この「自己否定」の場です。もし十字架が教会や家庭、あるいは自分の心の中に打ち立てられていなければ、私たちは他者に仕えるどころか、支配や利益追求の態度へと立ち返ってしまいやすいのです。張ダビデ牧師は「十字架がなければ教会は高慢な人間の集まりになってしまう」と断言します。

2つ目は共同体の次元です。互いの足を洗い合う文化が必要だ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文字通り相手の身体的な必要に目を向けてケアする物理的な次元もあれば、もっと広い霊的な次元として、兄弟姉妹の罪や過ちを赦し、回復へと導き、ともに悔い改められるように祈る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教会が真に「足を洗う」ことの意味を実践するならば、そこには断罪や恥辱ではなく、回復と和解と愛があふれるはずです。張ダビデ牧師は、すべての信徒が「他人の足を洗うためのたらいと手ぬぐいを心に携え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比喩的に語っています。

これとあわせて重視されるのが、「もしわたしがあなたを洗わないなら、あなたはわたしと関係がないことになる」というイエス様の言葉の深刻さです。これは、私たちが自分の力で自分の足を洗うのではなく、本質的にはイエス様の御手が必要だ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ます。再生によってすでに身を洗った者でも、人生を歩むうちに再び足が汚れてしまうときには、イエス様のもとへ行って洗っていただ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同時に互いの足を洗うことは、私がすべての人の代わりにイエス様になるというのではなく、イエス様の愛を伝える通路となるという意味です。

張ダビデ牧師は、教会の中で争いや対立が起こるたびに、ヨハネ13章に描かれた「足を洗う」出来事を思い起こすべきだと勧めます。なぜなら、争いの大半は「誰が偉いか」「誰が正しいか」「誰がどれだけ貢献したか」という比較意識や自己主張のぶつかり合いで起こるからです。ところがイエス様は、その瞬間に弟子たちの足を洗うことで、まったく逆の道を提示されました。師であり主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みずからへりくだってしもべとな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そ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この世はいまだに「王となって支配しよう」とする思いにあふれています。成功や支配、影響力を追い求める文化のただ中で、互いの足を洗い合う生き方は逆説的で効率が悪いように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ところが張ダビデ牧師は、この逆説の中にこそ真の命と自由、そして神の国が展開すると語ります。私たちが他者の足を洗うとき、その行為はイエス様の愛を再び生かす力となるのです。

特に、張ダビデ牧師はこの足を洗うメッセージが四旬節と復活祭の時期にいっそう深い意味を帯びると説明します。四旬節はイエス様の受難と十字架を黙想する期間であり、イエス様のへりくだりと犠牲、従順の道を共に歩む霊的訓練のときです。この期間に「互いの足を洗い合いなさい」というイエス様の命令を改めて思い起こすとき、私たちの信仰は単に礼拝堂に集まって式を行うだけでなく、実際の生活において悔い改めと仕え、分かち合いへとつながっていくでしょう。

さらに復活祭は、十字架の死を乗り越えたイエス様の勝利を記念する日です。イエス様の自己卑下と犠牲は決して失敗や敗北では終わらず、復活によって栄光の勝利となって現れました。張ダビデ牧師は、私たちが互いの足を洗い合うという小さな仕えの実践も、最終的には復活の栄光へと続く道だと説きます。世が見るときには愚かしく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道にこそ真の自由と喜びが湧き上がってくるのです。

総括すると、ヨハネ13章2~11節に描かれたイエス様の足を洗う出来事は、張ダビデ牧師によれば教会の本質であり、クリスチャン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象徴する重要な場面です。第一に、「すでに身を洗った者」は再生(重生)した存在でありながら、日々自分の足を洗う悔い改めの必要を忘れてはならないこと。第二に、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裏切りと弟子たちの鈍感さは、教会の内にもいまだ潜む恐ろしい罪や不信、無関心を思い出させること。そして第三に、イエス様ご自身が足を洗われた行為は、愛こそがしもべとなって仕えることであり、その道こそが真の共同体と救いの喜びを完成させる方法だ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最後に、今の私たちが「敵」のように感じる人、あるいは共同体の中でいちばん仕えづらいと感じる人の足を洗うことができるかを自問してみるよう提案します。イエス様でさえ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足を洗われたのですから、私たちはいったい誰の足を洗いながら生きているのか。私たちの信仰告白は、口先だけで「愛」を唱えているのか、それとも実際にへりくだって兄弟姉妹に仕える生き方へと結びついているのか。その問いに正直に向き合うことこそが、教会を教会たらしめ、クリスチャンをクリスチャンたらしめるのだと語ります。

結局、「足を洗いなさい」というイエス様の命令は、私たちにとって非常に高い基準であると同時に、非常に驚くべき恵みでもあります。主は私たちが互いの足を洗う力のないことをご存じであるがゆえ、まず先に私たちを洗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日々汚れていく私たちの足をいとわず洗ってくださり、新たにしてくださいます。その愛をいただいた私たちは、今度は他者の足を洗うことでキリストのかぐわしさを伝え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ここにこそ教会の具体的な使命と存在目的があると言えます。

このように、小主題3では「愛の実践」としての「足を洗う」ことに秘められた霊的・実践的な意味を考察しました。張ダビデ牧師は「互いの足を洗い合いなさい」というイエス様の教えこそが、教会共同体において兄弟愛を回復し、さらに世に向かってキリストの真実の愛を証しする道であると強調します。そしてその道は、四旬節を経て復活の朝へと至る巡礼者の道でもあります。イエス様が示されたへりくだりと犠牲の模範に本当に倣っていくならば、たとえ足を洗う行為は小さく目立たないことに見えても、それこそが大いなる神の国を現実へと築いていく奇跡なのだと忘れないようにとメッセージを送ってい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の一連の解説を総合すると、ヨハネ13章に込められた足を洗う本質は、救われた者たちの絶えざる悔い改め、教会内に潜む裏切りの可能性への警戒、そしてしもべとなられたイエス様に倣う互いへの仕えに集約されます。イエス様が示されたこの道こそ、恵みと真理、愛の完成であり、私たちは日々これを黙想しつつ実践していくべきです。そうすることで「すでに身を洗った者」として与えられた救いの豊かさを、ますます深く味わい、同時に互いに仕え合う教会共同体へと成長していけ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