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복음과 사랑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이 왜 ‘사랑’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왜 복음은 곧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장’이라 부르는 성경학자들의 말대로, 그 안에는 구원과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본질은 삶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 곧 우리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흥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그 실천적 내용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어떤 교리나 신앙 체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삶으로 보이신 복음은, 말 그대로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장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도바울이 도시인의 언어로 표현한 이 ‘사랑장(章)’은, 사랑의 속성을 매우 논리적이고 해설적으로 풀어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는 말씀(고전 13:4 이하)은, 세상 도처에서 언제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도덕적 가르침이나 예의범절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구절을 통해, 사랑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적 측면을 담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말씀은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 또한 주를 완전한 사랑으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가르치듯이, 복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시작되며, 그 대상은 모든 이, 심지어 세리와 창기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그 낮추심과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먼저 열리고,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때로는 먼저 지적으로 깨달음이 와서 마음이 열릴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이 먼저 열려서 지적인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과 이성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했듯이,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숙고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틀이나 습관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역사 속 사례 중 유명한 예로, 폼페이(Pompeii) 화산 폭발로 도시가 파묻혔을 때, 어미가 아이를 품고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의 본능적 희생이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성은 자기 보존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올 때, 서로 양보하기보다는 자신이 빛과 양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생존 경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자연적 본성과 달리, ‘자기 희생’을 통해 다른 생명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는 행동이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곧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최정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 없이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종종 설교나 강연에서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몸소 보여주신 행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지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은 가장 궁극적 형태이며,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특히 한자로 ‘희생(犧牲)’이라 쓸 때 ‘소’(牛)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도 해석하는데, 소가 평생 밭을 갈고, 자기 힘을 다해 주인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고기, 가죽, 뼈, 심지어 꼬리까지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가 생애를 다해 주인을 섬기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행사가 아닌, 정말 우리가 곁에서 직접 보는 낮은 자리에서의 헌신,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3:1).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배신이나 거부,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감싸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교훈이나 위안이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때,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저변에는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대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가 곧 ‘복음’인가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의 선언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 삶에서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직접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듯 ‘발 벗고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과 세리,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가르쳐온 바,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근거로, 실제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복음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감정과,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99라는 다수를 중시합니다. ‘하나보다 아흔아홉이 더 중요하다’는 이 세상의 평범한 계산식에 길들여져 있으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자원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들판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는 그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 세리와 죄인의 복음
누가복음 15장은 바로 이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란 단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이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류를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식사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익숙했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구별됨’을 강조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들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심지어 죄인들과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 한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낯선 접촉’을 통해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멀리서 “너희는 죄인이니 당장 회개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죄로 물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원 의지와, 회복된 후에 함께 기뻐하는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데서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5:7). 이는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창기는 당시 율법 체제에서 가장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폄하되었고, 창기는 성적인 죄로 가장 경멸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았던 만큼 용서를 받았을 때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그 감사가 결국 삶의 완전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처럼(롬 5:20), 회개한 큰 죄인이 느끼는 은혜와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풍조는 때때로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이런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여, 더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 더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방치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낮은 곳을 향한 관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올리벳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향한 구체적 관심과 사랑’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선교적 접근에서, 복음은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deed(행동)가 따라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복음 사역을 확장해나갈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자의 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고, 그들과 밥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애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바쁜 일상, 혹은 우리의 이기심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장벽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커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재정적인 자원이 풍성해질수록, 자칫하면 ‘잃어버린 자 한 명’보다 ‘이미 모인 많은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역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5장 5절, 6절을 보면,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그 양을 되찾았을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낍니다. 이는 그저 물건 한 점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생명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단지 도덕적 반성이나 형식적 죄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며, 그 속에는 자신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는 그 죄된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깁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의 심각성, 그리고 자신이 그 죄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을수록, 감사와 헌신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 사람은 복음의 힘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범할 것이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사랑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죄로 쓰러져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 사용하여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다른, 복음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가 당연한 질서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서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신뢰가 우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닫힌 집이 아니라, 늘 열려 있고, 새로운 기회를 제시해주며,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의 그늘진 곳, 가난하고 병든 자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이주민 등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세리와 죄인의 복음’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많은 재정과 자원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성공’을 인정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이웃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때로는, 조직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의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지에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역을 펼치며,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내년 교회 30주년을 맞아 가난한 나라에 300개의 학교를 지어주자”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목적이 단지 ‘건물 건립’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의 실제적 혜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교육받고, 질병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는 단순한 선교 프로젝트를 넘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복음’의 실천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세계입니다. 한 명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뒤로 남겨두는 세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세계, 죄인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말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은 단지 범죄자들이나 특정한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나는 의인이니,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된 ‘잃어버린 양’이었고, 주님은 바로 우리를 찾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가 던진 질문 중, “우리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 하나를 향한 목자의 마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찰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교회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늘리는 일, 교인 수나 헌금을 늘리는 일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일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사랑의 수고를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자기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즉,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 용서의 기쁨을 서로에게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세리와 죄인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 큰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받아 더 큰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혁명적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것처럼,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요청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을 깨우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사명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복음 공동체라면, 그들을 찾아다니며 보살펴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세리도, 사랑에 실패한 창기도, 삶에서 방황하는 청년도, 병실에서 고통받는 환자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영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며, 교회는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힘 있게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 감동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하늘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세리와 죄인의 복음’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시금 깊이 깨닫길 간절히 소망하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사회와 선교지 곳곳에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길 호소합니다. 도시와 농촌,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를 막론하고,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소명을 감당할 때, 결국 복음은 삶으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죄인들이 회개와 용서,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격하고, 함께 구원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듣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까지 품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이, 실은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할 사명의 핵심이며, ‘세리와 죄인의 복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헌신자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