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에 나타난 아볼로와 에베소 교회의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불완전함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요한의 세례’라는 형태로 상징되는 불완전한 신앙이 ‘성령의 세례’라는 온전한 신앙으로 옮겨지는 사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복음의 온전함을 체득해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장재형목사의 사역과 가르침, 더 나아가 그의 목회적 실천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볼 것이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아볼로가 가진 불완전한 신앙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더 정확한 길을 배우게 된 과정,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에서 머물러 있었던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성령의 세례’라는 새로운 국면이 어떻게 열렸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장재형목사의 목회 방향과 연결해 심도 깊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문에 나타난 인물들의 배경, 지역적·역사적 상황, 그리고 그들의 신앙적 성숙 과정을 따라가면서, 우리 또한 현재 우리의 신앙이 불완전함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다.
Ⅰ. 아볼로의 불완전한 신앙과 에베소 제자들의 요한의 세례: 회개에서 사랑으로, 지식에서 삶으로
사도행전 18장 24절 이하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율법과 예언, 곧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뛰어난 인물로 소개된다(행 18:24).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지적·학문적 분위기가 풍성한 곳으로 유명했으며, 이곳 출신인 아볼로가 매우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서 “성경에 능통한 자” 혹은 “학문이 많은 자”라는 표현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언하면서 열정적으로 가르쳤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지식과 언변 면에서 남달랐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5)라고 기록함으로써, 그의 지식과 열정이 가지는 한계 지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요한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의미한다. 이 세례의 핵심은 ‘돌이킴(metanoia)’으로, 죄에서 떠나 회개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음서가 증언하듯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실 것이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예언했다(마 3:11, 막 1:7-8, 눅 3:16, 요 1:26-27 참조). 즉 요한의 세례는 종국적 목적이 아닌 예비적이고 준비적인 차원이었다. 그런데 아볼로는 예수에 관해 열심히 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회개 이후의 세계’, 곧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와 역동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이는 그가 예수에 관한 지식은 풍부하게 가르쳤으나, 그리스도의 삶에 실제로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 혹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음을 암시한다.
이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이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사역하며 깊은 신앙을 배웠고, 에베소에 체류하던 중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행 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수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아볼로가 이미 구약에 대한 지식,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 그리고 회개와 돌이킴의 중요성 등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 그가 새로 배워야 할 가르침은 두말할 것도 없이“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깊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흔히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라는 문장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목회철학과 사역적 가르침이 어떻게 이 본문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회개와 지식적인 깨달음에만 그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실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섬기며, 함께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된 복음의 열매라고 역설한다. 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돕고 세우는 방식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즉, 단순히 ‘알지 못하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정한 전모”를 전달하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동행이라는 삶의 현장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아볼로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또 다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과 만나 이들이“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답하는 장면이 펼쳐진다(행 19:2). 바울이 이들을 보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으므로 정작 성령의 존재와 역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 예수의 존재와 회개에 대해서는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복음이란 궁극적으로 ‘성령의 내주’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변화를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그래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고,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에 머물렀음을 알게 되자, 곧바로“요한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분명히 선포했지 않느냐?” 하고 강조한다(행 19:4).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뒤, 이들에게 안수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들에게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고 성경은 기록한다(행19:5-6).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에게 임했던 성령 세례(행 2장, 행 8장, 행 10장 등)와 더불어 교회가 확장되는 중요한 이정표로 볼 수 있는데, “에베소의 성령 강림 사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빠져나가 고린도로 가 있는 동안, 바울이 뒤늦게 에베소에 들어와 요한의 세례에서 머문 제자들을 만나 그들을 ‘성령의 세례’로 이끈 것이다. 즉, “아볼로는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그를 통해 에베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졌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바울이 그 미흡함을 채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하는 분파가 생길 정도로 그의 가르침은 탁월하고 역동적이었다(고전 1:12). 그러나 그 시작은 “요한의 세례만 알던 불완전한 상태”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이어 바울을 통해, 점차 더욱 온전한 복음의 의미로 나아갔음을 우리는 본문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 우리 시대에도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시사점을 준다. 신앙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 지식도 풍부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무를 수 있다. 즉, 지식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세례가 주는 깊은 능력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머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교회의 실제 상황에 대입해 보면, 많은 지체가 신앙적인 열심과 교리적인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에서 성령의 역동성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거나, 형제를 향한 섬김과 헌신, 나아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한다. 이는 “첫사랑을 버렸다”라고 책망받은 에베소 교회(계 2장)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에베소 교회가 바울이 3년 동안이나 직접 가르칠 정도로 신학적·교리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즉, “수준이 높아도 사랑이 식을 수 있다”는 단면을 보여 준다. 결국 교리적 지식에 만족하거나, 한때의 회개 체험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재확인하며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본질적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본질이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교회란 단지 예배당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교리를 배우는 데 그치는 곳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오히려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 주며,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지고 가는 실제적인 ‘동행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한의 세례적 차원, 즉 회개와 구원의 확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고 서로에게 나누는 삶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직접 “데려다가 가르쳤다”라는 행동도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아볼로가 자칫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의 열정을 칭찬하며 동시에 ‘더 온전한 복음’을 전해 주려는 사랑과 배려,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볼로는 이를 겸손히 받아들여, 이후 고린도 교회 등에서 바울·베드로와 함께 어깨를 견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아볼로는 과거 “요한의 세례만” 알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주의 도를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받았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세례가 임한 에베소의 제자들 역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면서, 그 지역 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7)라는 구절은 상징적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시작하셨던 새로운 공동체의 운동이, 이제는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두 사람을 중심으로 에베소 교회가 형성되고, 점차 아시아 전역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발판이 되었다. 오늘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성령 안에서의 성장’ 역시, 바로 이런 성경적 모형을 근거로 “회개”에서 멈추지 말고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삶”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진 이들이 결국 세상 가운데 적극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이 보여 주는 핵심은 “요한의 세례에서 머무르는 불완전한 상태를 뛰어넘어, 온전한 복음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역동성을 경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본문의 인물들은 실제 삶에 동참함으로써, 성령의 세례가 가져오는 능력과 사랑을 삶 전체에서 누리게 되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더 성숙한 이들이나 목회자들은 아직 완전치 않은 신앙인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그들에게 성령 안에서 성숙해지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이야기해 온 ‘동반자적 제자도’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함께 고난을 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성령 체험의 장으로 이끄는 제자 양육을 의미한다.
실천적으로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지식적으로는 성경을 잘 알고,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내지만, 그의 삶이 여전히 성령의 열매(갈 5:22-23)로 채워지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향한 사랑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어느 정도“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잔소리나 정죄가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는 실제적인 가르침과 돌봄, 그리고 기도로 함께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다.
에베소 교회가 사도행전 이후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울의 긴 사역 거점이 된 것, 그리고 나중에는 요한 사도까지 사역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성령 체험’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묘사된 “에베소의 성령 강림”은, 바울이 세웠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를 특별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계시록 2장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의 첫사랑 상실” 사건은, 아무리 한때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며 그 열정과 사랑을 식혀 버릴 수 있다는 경고의 사례가 된다. 한 번의 뜨거운 체험이나, 지적인 깨달음으로 영원히 완성되는 신앙은 없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교인들에게 “지속적인 성령 충만”과 “끊임없는 말씀 묵상 및 적용,” 그리고 “희생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성경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성령 체험”과 “지속적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이 초기에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기에 회개와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충만했을지 몰라도, 아직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새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채워 주었을 때, 이들은 강력한 복음의 사역자로, 또는 열두 명의 주축 멤버로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꾼으로 세워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회개와 교리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며, 성령 안에서의 실제적 경험과 사랑의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본문이 증언하고 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실제적 동행”과 “성령 체험을 통한 교회 공동체의 성장”이라는 메시지는, 이 사도행전 본문의 핵심을 현대 교회에 적용하는 매우 실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Ⅱ. 성령 세례와 온전한 복음의 현실화: 공동체적 사랑과 장재형목사의 현대적 적용
앞서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의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신앙은 단 한 번의 결단이나 지식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지속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세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때 성령 세례란 단순히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삶을 실제로 살아내게 하는 영적 능력”을 의미한다. 아볼로가“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움으로써, 이후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세우는 강력한 동역자가 되었듯이, 성령 세례를 경험한 신자는 ‘회개와 예수 지식’만 갖춘 단계에서 한층 더 나아가, 험난한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성령에 대해 말하되, 때로는 과도하게 은사적인 표징에만 치중하거나, 혹은 반대로 모든 성령의 역사를 신학적·지적 측면으로만 해석해 버려 실제 삶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양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사도행전 본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진정한 성령 체험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한 죄 사함”을 바탕으로, “성령의 능력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의 연합”으로 이어진다. 회개가 개인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예수의 구원에 참여시키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충만한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는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사역은 이 점에서 현대 교회가 참고할 만한 특징을 지닌다. 그는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이 성령 체험을 단지“은사적 현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진정한 회심과 지속적 제자도의 여정”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것을 개인적 자랑으로 삼거나 ‘나는 특별하다’는 우월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를 세우고 다른 이를 겸손히 섬기는 사랑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3장, 즉 사랑장이 말해 주는 핵심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고전 13:1)는 경고를 교회 공동체가 실질적으로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사실 신앙이 머리로만 습득된 지식이나 일시적인 은사 체험으로 그쳐 버리면, 결국 곧바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는 교회를 양산해 낼 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대 교회 현장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실제 교회 생활에서는, 신앙 지식이나 은사 체험이 많은 이들이 더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보다, 오히려 교만해지거나 다른 지체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이는 곧바로 본문이 말하는 “요한의 세례에 머문 불완전한 신앙”을 보여 주는 사례다. 겉으로는 큰 열심과 지식을 뽐내지만, 실제로는 성령이 가져오는 “십자가적 사랑, 자기 비움, 형제를 존중하고 교회를 세우는 겸손”이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들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또는 바울처럼 누군가가 다가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는” 돌봄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에서 이런 섬세한 돌봄, 인격적·영적 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분란이 생기거나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강조하는 ‘공동체성’은, 앞에서 언급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돌봄 방식과도 결을 같이한다. 즉,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라, “함께 고난 받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자라나는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몸의 비유’를 통해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고전 12:26)라고 말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하라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연결될 때, 성령의 은사는 서로를 분열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고 연합케 하며, 세상에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원으로 변모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분열하는 원인을, 상당 부분 “성령 충만이 지식 혹은 개인적 체험 수준에서 머물러, 실제적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도행전 18~19장이 보여 주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아볼로나 에베소의 제자들은 ‘열심’과 ‘회개’가 분명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복음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단계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이나 브리스길라·아굴라가 방문해 ‘더 정확한 복음’을 전달하고, 성령 세례를 통해 이들의 삶을 근본부터 뒤바꾸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 안에서도, ‘알긴 아는데 실천이 없는’ 지식 위주의 신앙이나, ‘체험하긴 했는데 사랑이 결핍된’ 은사 중심의 신앙이 성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을 “통합”하고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보살핌과 가르침이다.
이렇게 완전해진 복음은 결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에베소의 열두 제자처럼 지역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아볼로처럼 고린도 교회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분열보다는 연합과 성장을 가져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때 교회 성장이라 함은 단지 수적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한다”(엡4:13)는 차원의 ‘내면적·영적 성장’을 가리킨다. 교회의 양적 부흥은 그 결과로 따라올 수 있지만, 성령 충만을 통해 나타나는 사랑의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본문이 보여 주는 핵심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강조하면서도, 그 근본은 “성령의 역사와 성도 간 사랑의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사도행전의 정신을 그대로 현대 교회에 적용하는 시도라 할 수 있는데, 목회의 모든 현장에서 “성령에 의지하되, 그 결과물은 반드시 형제 사랑과 공동체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사람들은 종종 교회 내 봉사나 사역을‘의무’나 ‘책임’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하기도 하는데, 성령 충만 가운데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그 봉사를 기쁨으로 여기고,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봉사의 손길을 자발적으로 내민다. 이는 “요한의 세례”라는 준거점을 이미 넘어선 상태, 즉“성령의 세례”가 임하여 생기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과거에는 단지 ‘죄책감’에서 시작한 회개로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때, 그가 성령의 세례로 진정한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섬기는 자리까지 이르려면, 그 사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멘토의 돌봄과 바울과 같은 목회적 양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교회의 책임이자 사명이다. 교회가 이런 영적·인격적 돌봄에 실패하면, 그 성도는 요한의 세례적 차원에 머물며 회개를 반복하기만 하다 지치거나, 지식적·형식적 신앙에 불과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영혼을 살리고 키우는 목회”를 강조하는 배경에는 이런 뼈아픈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즉, 교회가 단지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 급급하거나, 건물을 크게 짓는 데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하고, 이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언급된 “에베소의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7)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적은 수라 할지라도 온전한 복음을 깨달은 이들이 모이면, 곧 그곳이 교회이고, 거기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열두 명이라는 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등을 연상시키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에베소가 이후 소아시아 복음화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는 점, 또 그곳이 바울 사역의 가장 중심축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열두 사람의 성령 체험은 단지 개인적 회심 사건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지역 교회가 시작될 때, 혹은 새로운 부흥이나 개척을 준비할 때, 큰 물리적 자원이나 많은 인원이 없어도, “성령으로 충만한 소수”가 있다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거기서 출발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어떤 사역을 개척할 때마다, 규모나 화려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성령 체험과 십자가적 사랑’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진정 하나님의 비전을 붙드는 소수”가 존재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고 한다. 이는 곧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회 개척과 성장의 원리와 부합한다.
정리하자면,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의 사건은 “요한의 세례”로 상징되는 불완전함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동력이 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볼로라는 걸출한 인물조차“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회개와 구약 예언 지식 수준에 머물렀으며, 에베소의 열두 제자도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기에” 회개만 반복하며 살아가던 상태였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도움 아래 이들은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과 예언 등 은사를 통해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일꾼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에베소 교회의 역사,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성장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현대 교회로 시선을 옮겨 보면, 우리 역시 성경 지식이나 열심, 혹은 회개 경험만을 강조하면서 실제 성령의 능력과 십자가적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본질을 놓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성령 안에서의 자발적 헌신,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적 사랑”을 교회의 핵심 가치로 제시하며, 목회의 모든 측면에서 이를 구현하려 애써 왔다. 이는 단지 “성령 받아라” 혹은“회개하라”는 구호 차원을 넘어,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고난을 함께 지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삶”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교회는 비로소 에베소 교회가 받았던 성령 강림의 은혜를 재현할 수 있고, 아볼로처럼 불완전함을 넘어 온전함으로 전환된 성도들을 많이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분명 놀라운 성령 체험으로 부흥했고, 바울이 3년간 사역을 펼친 만큼 영적 수준이 높았지만, 요한 사도가 반모 섬에서 보낸 편지(계시록 2장)에 보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다. 이는 “한때 경험한 성령 세례나 강력한 은사 체험”이 영원히 신앙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낮추고, 공동체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새롭게 받아야 한다.
따라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에 영적 돌봄이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 어느 한두 사람만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겸손히 세워 주고, “요한의 세례”에 머무르지 않도록, “더 정확한 복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며 실천하는 모습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의 목회 사례는 이러한 영적 돌봄이 실제로 작동할 때, 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건강한 영적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을 통해 ‘불완전한 신앙이 온전해지는 과정’이 곧 ‘회개에서 시작되어 성령의 세례로 완성되는 길’임을 확인했다. 열정과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단계에서만 머무른다면, 그 신앙은 아직 완전한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때,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돌보게 될 때, 그 신앙은 새롭게 태어나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해 온 “성령 안에서의 공동체 형성, 그리고 십자가적 사랑의 실천”은 바로 이 사도행전적 원리를 오늘 우리의 교회 현장에 펼쳐 놓는 구체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아볼로가 처음엔 요한의 세례만 알았으나,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워 능력 있는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개인 신앙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나는 회개했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줄 안다. 하지만 혹시 그 선에서 멈춰 버린 것은 아닌가?’ ‘지금 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실제로 체험하며 형제·자매를 섬기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헌신하며, 다른 지체들의 필요를 채우려 노력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혹 불완전함에 머무르고 있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도움을 받은 아볼로처럼,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배우고, 바울처럼 목회적 돌봄을 줄 수 있는 지도자에게 인도함을 받으며, 무엇보다 성령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는 서로의 부족함을 함께 채워 주는 영적 가정(family)이 되어야 한다. 불완전함에 머물러 있는 이는 공동체의 돌봄을 통해 온전함으로 나아가고, 이미 성령의 능력을 누리고 있는 이는 더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더 정확한 복음”을 전해 주는 상생의 구도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있으며, 이것을 현실에서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성령 안의 동반자적 제자도”는 이런 교회 모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있었다. 교리에 대한 이해도도 상당히 높았고, 회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성령’이 빠지면, 회개와 열심, 그리고 지식마저도 그 깊은 사랑의 실천과 십자가적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처럼 회개에서 성령으로 나아가는 ‘전환’은 우리 신앙의 필수적인 도약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동력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묻지 않았는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도 유효하며, 우리 개개인의 신앙 상태를 날카롭게 점검한다. 만일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양육,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고 목회자나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성령의 임재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실천”과 “겸손히 섬기는 태도,” 그리고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라는 열매가 반드시 함께 나타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이끄는 목회 현장에서도, 처음부터 성령 체험이 강력하게 부어지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지적 이해와 회개만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뒤집어지는 성도들도 있다. 이처럼 시기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목적지는 한결같다. “온전한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 속에서 실제로 살아내는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교회를 세우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아볼로와 브리스길라·아굴라, 에베소 열두 제자와 바울의 관계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더 깊은 복음을 전수하는 역할을 하고, 누군가는 겸손히 배우고 체험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며, 세상을 섬기게 하는 복음의 확장”으로 귀결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불완전한 신앙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은 회개와 예수 지식을 가진 신앙인들이었지만,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사랑의 능력과 공동체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의 적극적인 돌봄과 가르침이 그 결핍을 채워 주어, 결국 강력한 교회로 서게 하고 복음 사역이 지경을 넓혀 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였으며,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지식이 아닌‘삶’으로 현실화하는 열쇠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적 목회 현장에 적용하여, 교회가 서로 섬기고 동역하며, 성령 체험을 통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힘써 왔다. 이는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한 도전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믿었음에도 불구하고‘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라면, 혹은 예수님을 믿고 봉사하고 헌금도 하지만, 내 안에 사랑이 식어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다면,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실제 삶에선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우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불완전함을 벗어나, 아볼로처럼 능력 있는 증인이 되고, 에베소 열두 제자처럼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장재형목사가 늘 역설하듯이, “생명력 넘치는 영적 가족”으로 세워져 간다.
이는 성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교회는 예배와 프로그램, 교리 교육, 봉사 등의 외형적 요소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사랑과 동역”으로 세워진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예배당도, 재정도, 제도적 기반도 없어 보였지만, 온 세상을 뒤흔드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 능력의 출발점은 성령이었고, 그 성령이 창조해 낸‘십자가적 사랑’이었다. 요한의 세례에서 성령의 세례로 넘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가 성도를 움직이는 살아 있는 동력이 되며, 그곳에서 참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볼로의 한계와 돌파, 에베소 제자들의 회개와 성령 체험이 보여 준 이 드라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다. “너희는 과연 성령으로 충만한가? 너희의 교회는 과연 성령으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부디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공동체가 늘어나길 소망하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불완전함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 가야 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성령과 동행하는 교회,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사도행전의 정신이 다시금 살아나고, 초대교회가 지녔던 뜨거운 성령 충만과 헌신이 현대 교회에서 재현될 때,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능력을 진정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이 남긴 귀중한 교훈은, 바로 이 역동적 신앙의 길 위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한의 세례에 머무르지 말라, 성령의 세례로 나아가라.” 이것이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19장 7절이 우리가슴에 새기는 분명한 메시지이며, 동시에 장재형목사가 오늘 교회 앞에 제시하는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