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목욕한 자 – 장재형목사

1.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이미 목욕한 자’의 의미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2-11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발 씻김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장면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주는 메시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이 본문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마귀가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배반의 생각을 심어 놓았다는 점에서 극도의 긴장과 비극이 예고된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돌이키기 원하시는 사랑을 베푸신다. 특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라는 말씀은, 중생한 자와 매일의 회개가 필요한 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먼저 “이미 목욕한 자”라는 표현이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중생(重生) 체험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새 삶으로 옮겨지는 근본적 변화다. 비유하자면, 잔칫집에 초대받아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미 몸을 씻고 가는 것이 예의이며, 그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동안 발은 먼지와 흙탕물로 더러워질 수밖에 없기에, 잔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에는 발을 다시 씻어야 한다. 이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죄 짓기에 빠른 발’을 갖고 있기에, 늘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함을 상징한다.

장재형목사는 중생의 체험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자 필수 요소임을 거듭 강조한다. 만일 아직 목욕(중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 예배와 봉사에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주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 이는 마치 가룟 유다가 주님 곁에 있었으나, 끝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배반의 길로 가버린 것과 상통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중생한 사람들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목욕한 자라 해도 매일의 삶에서 발이 더러워질 수 있으므로, 날마다 자신의 발을 씻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발을 씻는 과정은 ‘자범죄(自犯罪)’를 다루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에도 남아 있는 죄성(罪性)과 매일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위는 스승과 제자의 전통적 위계를 뒤엎는 듯하다. 당대에는 스승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자나 하인들에게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예수님은 거꾸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사랑의 종’이 되신 예수님의 극단적 낮아지심으로 설명한다. 그분은 진정한 권위와 영광은 섬김에서 온다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몸소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본 시몬 베드로는 반발한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는 놀람은 예수님이 왜 그런 겸손의 행동을 취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제 아무리 자격 없다 생각하고,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긴다 해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씻김을 받지 않으면 결코 주님과 연합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교만일 수 있다.

베드로가 이에 놀라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대목이 곧 믿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매일의 죄 씻음’이지, 거듭난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새로 중생 의식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세례의 의미도 이와 연관해 해설하는데, 물로 받는 세례는 이미 내면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세례를 공적으로 표현하는 외적 표지라는 것이다. 교회 전통에서 세례 의식을 매우 중시하지만, 그 의식 자체가 중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개인이 죄로부터 돌이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근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단 ‘목욕’을 마친 사람도 발을 씻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육체와 본성이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세상 안에서 살면서 탐심, 미움, 시기, 음란, 교만 등 각종 죄의 요소를 접하게 되고 때로는 그것에 굴복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는, 즉 날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경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자리에 대한 귀한 통찰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을 좇아 살기보다 육체의 소욕에 발목 잡히는 일이 잦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5)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발은 너무도 쉽게 죄를 향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곧장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 제 발을 씻어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이미 목욕한 자’는 이렇게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미 구원받은 존재로서 하나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발을 씻음으로써 주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은혜에의 무모함’과 ‘은혜 안의 깨어 있음’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한편으로는 아무 자격 없는 죄인을 끝까지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은혜를 등한시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늘 점검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하게 촉구한다.

이 ‘이미 목욕한 자’의 신분을 소중히 여기고, 발을 씻는 매일의 회개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단지 개인적 경건 생활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은,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낮아짐과 사랑의 실천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서로의 죄와 허물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을 씻어주는 마음으로 돌보고 기도하며 권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런 문화가 없다면, 교회는 금세 인간적 다툼과 분쟁에 파묻혀버린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 다투고 있었음을 누가복음 22장이 보여주듯, 섬김보다 지배와 위계를 앞세우려는 인간적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를 폭로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안팎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따라 살라는 초청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미 중생으로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매일 발을 씻지 않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친히 손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매달려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해간다.

이처럼 소주제 1에서 다룬 ‘이미 목욕한 자’의 의미는, 근본적인 중생과 매일의 회개가 긴장 속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개인의 구원 확신에 머무르지 말고, 계속해서 자기 발을 씻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죄와 타협하지 않는 거룩과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 모든 ‘발 씻음’의 과정은 스스로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며, 그 은혜에 응답하고 또 서로에게 나누어줄 때 교회 공동체는 새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무정함,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2절, 즉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는 부분을 매우 심각하고 비극적인 장면으로 해석한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원수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가 극적으로 맞부딪히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음에도, 끝내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배반의 길로 들어선다.

먼저, 장재형목사는 마귀가 “주님과 제자를 갈라놓는 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제자 중 하나를 골라 주님께 반역과 배반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마귀에게 가장 큰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배반과 분열, 불신과 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해준다. 유다와 예수님은 분명히 한 식탁에서 함께 떡을 떼고, 예수님은 그런 그를 끝까지 붙드려 노력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그 사랑의 초청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시고, 마지막까지 사랑과 기회를 주어도, “마귀가 넣은 생각”이라는 거짓된 씨앗이 이미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3장 2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셔도, 제자들은 유다가 구제할 물건을 사러 가는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도 그가 배반하려고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무정함과 둔감함, 그리고 타인의 영적 상태를 깊이 살피지 않는 태도가 결국 공동체 안에서 큰 배반이 벌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교회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가 겉으로는 함께 예배하고 식탁을 나누지만, 누군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배반의 씨앗을 키우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둔감하고 서로의 영혼에 무관심하다면, 어느 순간 마귀가 그 빈틈을 노려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영적으로 경계하며, 동시에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그를 끝까지 붙드셨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주님께서 배반자에게 베푸시는 마지막 사랑의 손길”이라고 부른다. 유다가 만찬을 함께 하고, 심지어 발까지 씻김을 받은 상태에서 떠나고 말았는데,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반이다. “유다가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는 성경 구절은 이 비극의 절정을 보여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다의 모습은, 결국 자신의 의지로 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내버려진다는 것,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시는 것’의 무서움을 말한다. 로마서 1장 24절과 2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거절하는 자가 결국 스스로 돌아설 수 없는 심연으로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유다는 자신의 탐심과 배반의 마음을 스스로 거두지 않았고, 주님의 거듭된 사랑의 권면을 내쳤다. 결국 그는 내버려진 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내버려짐은 하나님이 단지 냉혹하고 무정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등을 돌리며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유다의 예를 통해, 우리도 언제든지 죄와 유혹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유다와 같은 배반자가 나타날 수 있으며, 혹은 내가 곧 그 유다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에도, 그 사랑을 거부하거나 남용하여 결국 신앙의 어둠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제자들의 둔감함에 대해서도 장재형목사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최후의 만찬 직전, 제자들은 다투고 있었다. 누가 더 높은지,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지 경쟁하는 모습이 누가복음 22장 24절에 나타나는데,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는 결코 타인의 내면적 갈등이나 죄악의 소용돌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오히려 각자의 욕심과 자리다툼에 빠져 있기에, 자기 곁의 형제가 배반자로 전락해 가는 과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교회 공동체가 새겨야 할 교훈으로 삼는다. 우리는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누가 더 높은가”로 다투며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생길 때, 혹은 누군가 영적으로 크게 흔들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진심으로 끝까지 붙드는 사랑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나는 아니겠지’라고 하며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곁에 있는 이의 파멸을 방치하는가?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유다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밤” 속으로 들어갔다는 요한복음 13장 30절을 매우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밤’이란 단순히 해가 진 시간만이 아니라 영적 어둠, 죄와 절망의 자리가 된다. 유다가 주님의 만찬을 떠나 그 어둠에 들어갔듯,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면 더 이상 빛 안에 거하지 못하고 어둠의 사로잡힘을 당한다.

결국 이 모든 장면은 배반자 유다와 무정한 제자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극단적 대비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고, 또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발을 씻어주며, 마지막 권면의 손길을 내미셨지만, 유다는 그 사랑을 뿌리쳤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이 그 과정을 막아낼 정도로 성숙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종종 접하는 갈등과 배반은 이 장면이 반복되는 작은 축소판일 수 있다. 우리가 겉으로는 함께 찬양하고 봉사하고 식탁을 나누지만, 내면에서는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경쟁하며, 심지어는 배반과 분열의 씨앗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시는가? 장재형목사는,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며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유다처럼 그의 손길을 배반할 수도, 혹은 주님의 은혜로 눈물로 돌이켜 회복될 수도 있다.

이처럼 소주제 2는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교회 공동체와 개인 신앙인 모두가 경계해야 할 죄와 배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심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지 일깨워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 단순히 “유다는 나쁜 제자였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유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붙드신다”라는 경고이자 위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석한다.

3.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과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명령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 4-5절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며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으시는 장면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극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당시에 발을 씻는 일은 보통 하인이나 종의 역할이었다. 혹은 랍비와 제자의 관계에서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길 수는 있었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한 사람씩 발을 씻어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이 종 중의 종이 되셨다”라는 표현으로, 이것이 단지 예의상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진정한 ‘낮아지심’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내가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명령하신다(요 13:14). 이는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 곧 서로를 향한 섬김과 사랑의 본보기가 된다.

문제는 제자들이 그 상황에서조차 누가 더 높으냐를 다투고 있었다는 것이다(눅 22:24). 장재형목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인간의 보편적 죄된 본성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누가 더 인정받는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가를 계산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경쟁과 다툼 한가운데서 스스로 종이 되심으로, 참된 섬김이란 무엇인지, 사랑의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사랑의 종 된 자유”라고 표현한다. 즉, 예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은 지배나 군림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종”이 될 때 참된 자유가 온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그 삶을 통해 오히려 어떤 억압이나 두려움도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사건과 그대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예수님의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째, 개인 차원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비움과 낮아짐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발은 언제든지 죄로 더러워질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삶을 선택하려면 반드시 자기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십자가가 바로 그 ‘자기 부정’의 자리다. 십자가가 교회나 가정, 혹은 내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기보다는 지배와 이익 추구의 태도로 돌아가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는 결국 교만한 인간들의 모임이 될 뿐”이라고 강하게 말한다.

둘째,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는 실제로 상대방의 육체적 필요를 보살피고, 그의 삶을 섬긴다는 물리적 차원도 있고, 더 나아가 영적으로 형제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덮어주고 회복시키며, 회개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준다는 차원도 있다. 교회가 진정 ‘발 씻김’의 의미를 실천한다면, 그곳에는 정죄나 수치심이 아닌, 회복과 화해와 사랑이 충만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모든 성도가 “남의 발을 씻길 대야와 수건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이와 함께 강조되는 것이 “내가 너희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너희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의 심각성이다. 이는 우리가 내 힘으로 내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생을 통해 이미 목욕한 자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금 발이 더러워질 때,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씻음을 받아야 한다. 동시에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내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발 씻김’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갈등은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옳으냐’ ‘누가 더 많이 기여했느냐’ 같은 비교의식과 자기주장이 부딪칠 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셨다. 스승이자 주인 되신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져 종이 되었듯이, 우리도 바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왕이 되어 통치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성공과 지배, 영향력을 추구하는 문화 한가운데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삶은 역설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역설 속에 진정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이의 발을 씻어줄 때, 그 행위는 곧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능력이 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이 발 씻김의 메시지가 사순절과 부활절에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고 설명한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순종의 길을 함께 걷는 영적 훈련 기간이다. 이 기간에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다시 되새길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예배당에 모여 의식을 치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의 회개와 섬김, 나눔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부활절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선 예수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자기 낮춤과 희생은 결코 실패나 패배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 영광스러운 승리로 나타났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는 이 작은 섬김의 실천도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세상이 볼 때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솟아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3장 2-11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발 씻김 사건은,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교회의 본질이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중요 장면이다. 첫째, 이미 목욕한 자는 거듭난 존재이지만, 매일 자신의 발을 씻어야 하는 회개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둘째, 가룟 유다의 배반과 제자들의 둔감함은, 교회 안에 여전히 자리할 수 있는 무서운 죄와 불신, 무관심을 상기시킨다. 셋째, 예수님이 직접 발을 씻어주신 행동은, 사랑이야말로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 섬기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해서만 참된 공동체와 구원의 기쁨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원수’처럼 느끼는 사람 혹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섬기기 어려운 사람의 발을 씻길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예수님조차 가룟 유다의 발을 씻으셨는데, 우리는 과연 누구의 발을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은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가, 아니면 실제로 낮아져 형제를 섬기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발을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은 기준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놀라운 은혜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줄 능력이 없음을 아시기에, 먼저 우리를 씻어주신다. 그리고 매일 더러워지는 우리의 발을 기꺼이 닦아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교회의 구체적인 사명과 존재 목적이 있다.

이처럼 소주제 3에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서 ‘발 씻김’이 지닌 영적·실천적 의미를 살폈다. 장재형목사는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증언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은 사순절을 지나 부활의 아침에 다다르는 순례자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낮아짐과 희생의 모범을 참으로 좇아가기만 한다면, 비록 발을 씻기는 행동은 작고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로 이루어가는 기적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다.

장재형목사의 이 모든 해설을 종합할 때, 요한복음 13장에 담긴 발 씻김의 본질은 구원받은 이들의 지속적 회개, 교회 안의 배반 가능성에 대한 경계, 그리고 종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섬기는 삶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길이야말로 은혜와 진리, 그리고 사랑의 완성임을 우리는 매일 묵상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목욕한 자”로서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동시에 서로를 섬기는 교회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