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계산기를 부순 어느 여인의 거룩한 낭비, 그리고 십자가,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어스름이 짙게 깔린 예루살렘의 한 화려한 연회장. 사람들의 나지막한 담소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를 날카롭게 가르며,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습니다.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전 재산이자 가장 귀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진동하는 향기 속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화의 낭비를 지적했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광신이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파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단순한 값비싼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골고타 언덕에서 처참하게 부서질 예수의 몸통에 대한 예표였으며, 그보다 앞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한 영혼의 순전하고도 맹렬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리며, 진짜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파편, 효율의 시대를 역행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조차 손익계산서의 항목처럼 취급받는 오늘날,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거액을 일순간에 바닥에 쏟아버린 여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이 강렬한 복음서의 장면을 두고 장재형 목사는 세상의 눈에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이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는 역설적인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의 깊이 있는 설교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효율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민 구제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이 당신의 장례를 온전히 준비했다며 극찬하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허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십자가 은혜의 법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부를 내어준 자만이 아는 사랑의 무게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과 헌신의 메시지는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저작들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C.S. Lewis)의 고전 명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는 이 ‘거룩한 낭비’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시간이나 잉여의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전체’라고 역설합니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의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원한다”는 그의 선언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향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 즉 인생 전부를 부어드렸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진짜 사랑은 쪼개어 계산할 수 없으며 미래의 안정을 기약하며 유보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여인은 ‘지금 당장’ 전부를 내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영혼의 직감으로 알았고, 그 즉각적인 순종이 그녀를 영원한 복음의 역사 속에 살게 했습니다.

화폭에 담긴 눈물, 영원한 복음의 흔적이 되다

이 숨 막히는 헌신의 순간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며, 시대를 초월한 성경 묵상의 장이 되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파올로 베로네세가 남긴 대작 ‘시몬의 집에서의 잔치’를 보면,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호화로운 연회석 한가운데서 오직 한 여인만이 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주변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각자의 세속적 관심사에 빠져 있는 동안, 오직 그녀만이 하늘의 왕에게 온전한 경배를 올립니다. 훗날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역시 이 장면을 극적인 명암 대비로 화폭에 담아내며, 차가운 세상의 시선과 여인의 뜨거운 회개를 강렬하게 대조시켰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비효율적이었을 이 예술적 ‘낭비’의 산물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미술사적 증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쏟아부은 눈물과 헌신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원한 복음의 향기가 됨을 역설합니다.

오늘, 나의 깨어지지 않은 옥합을 마주하며

그렇다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옥합은 과연 무엇일까요? 장재형 목사는 그 옥합의 범위가 단순히 금전적 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움켜쥔 나의 진로, 황금 같은 시간,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 그 모든 것이 주님 발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각자의 옥합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볼 때, 죄인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만큼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의 죽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계산을 뛰어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권면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적당한 타협을 멈추고 오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효율이라는 이름의 계산기를 부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낭비를 선택할 때, 우리의 투박한 삶은 비로소 거룩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걸작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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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의 온기와 먹이는 사랑, 부활이 일상이 되는 기적에 대하여,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숲의 가장 깊은 적막은 나뭇잎의 마찰음으로 깨진다고들 하지만, 내가 기거하는 숲속 마을의 고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창밖, 발톱의 미세한 긁힘과 마른 흙을 밟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기척을 확인하는 숨의 교환. 어느덧 스무 마리가 훌쩍 넘는 고양이 대가족이 숲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은 세계의 시작은 거대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연민이 베란다에 놓아둔 사료 그릇 하나, 그 작은 친절이 숲의 결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고독과 존재를 채우는 응시

그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 흰 고양이였습니다. 신비로운 외양과 달리 녀석은 무리 안에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따뜻한 밥자리에 발도 붙이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배회하던 녀석이 비를 피하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뻣뻣한 경계심 뒤로 느껴진 것은 지독한 허기와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료를 씹는 작은 소리와 사람의 손길을 확인하는 미묘한 망설임 속에서 나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거친 야생에서도 돌봄과 수용을 갈구하는 그 마음은, 실상 우리 인간의 영적 기갈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사유는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1장 강해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단순한 에필로그가 아닌, 부활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사명으로 응결되는 결정적 장면으로 읽어냅니다. “부활 이후의 세계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니라 동선이며, 신앙은 감상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그의 강조는 숲속 고양이에게 내밀었던 내 손길 위로 겹쳐졌습니다.

디베랴 새벽, 빈 그물을 채우는 말씀의 권위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허탈함은 성실하게 살아도 결과가 비어 있을 때 느끼는 실존적 무능을 상징합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를 떠올려 보십시오. 화면 속 제자들의 몸은 긴장으로 팽팽하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근육은 역동적이지만,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는 고요한 권위로 서 있는 예수가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인간의 분투가 한계에 부딪힐 때 비로소 열리는 ‘타자의 개입’을 시각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인간의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라고 정의하며, 제자들이 ‘더 열심히’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비로소 153마리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음에 주목합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어획량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비전입니다. 밤의 공허가 새벽의 충만으로 바뀌는 찰나, 그것은 인간이 자기 중심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시작되는 복음의 사건입니다.

정죄를 넘어 치유로 흐르는 반복의 리듬

부활하신 주님의 첫 사역이 화려한 설교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조반의 준비’였다는 사실은 눈물겨운 은혜입니다. 숯불의 온기와 빵의 냄새로 인간의 절망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 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물음은 베드로가 가졌던 세 번의 부인을 거울처럼 비추지만, 장재형 목사는 이 반복을 추궁이 아닌 ‘치유의 리듬’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처는 한 번의 선언으로 봉합되지 않기에, 사랑의 물음을 반복함으로써 실패의 기억을 회복의 통로로 재배치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큰 사랑(Agape)’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우정조차 버거워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주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조차 버리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자가 사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인정하며 사랑의 질문 앞에 울컥하는 자가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역설적인 힘입니다.

흩어져서 먹이는 삶, 교회의 살아있는 본질

마침내 주어지는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예수 사랑의 진위를 판별하는 실천적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먹인다’는 행위를 단지 양식을 주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상처 입은 자의 피를 닦아주고 미성숙한 자를 양육하는 전인격적 헌신, 즉 목양(Shepherding)으로 해석합니다. 예배당 안에 모이는 것(Gathering)도 중요하지만, 세상으로 흩어져서(Scattering) 굶주린 영혼을 먹이는 존재로 살아갈 때 교회는 비로소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눈이 다르게 생긴 고양이가 내게 몸을 비비며 신뢰를 보낼 때,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선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무리에서 소외되고 연약함 때문에 주저앉았던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받은 양들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처럼, 목양은 맞춰진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어긋난 사람을 사랑으로 길들이는 예술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수많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부활 신앙은 먼 곳의 기적이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외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소박한 동행에서 완성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이 이제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먹이는 삶’으로 번역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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