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고린도전서 7장에 담긴 종과 자유

고린도전서 7장은 얼핏 보면 결혼과 독신, 부부 간의 성적 윤리라는 실천적 주제를 다루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시선으로 따라가면 그 밑바닥에는 세상의 위계를 거꾸로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또렷하게 흐른다. 그는 7장 21–24절이 왜 신학사에서 난해한 본문으로 남아 있는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 단락이 즉흥적 삽입이 아니라 본문의 중심맥을 드러내는 의도적 전개임을 차분히 밝혀 간다. “결혼을 말하다가 왜 종과 자유를 꺼내는가?”라는 물음은 바울의 글쓰기 전체를 보아야 풀린다. 장재형목사는 6장에서 음행을 다루다가 갑자기 세상 법정의 송사를 책망하는 전환을 떠올리게 한다. 문맥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음란과 가정 파괴의 문제가 신자들의 송사로 번졌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수치를 불신자들 앞에 내보이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더 깊은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사회법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을 지키는 공동체 치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동시에 장재형목사는 균형을 분명히 한다. 교회 밖에서 부당한 피해를 당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시민으로서 정당한 보호를 구해야 한다. 바울의 경계는 어디까지나 “교회 내부의 부끄러운 일”을 세상 법정으로 퍼뜨리는 무책임을 겨냥한 것이지, 법 질서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 관점을 7장으로 가져오면, 결혼 담론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듯한 종과 자유의 언급이 놀랍도록 설득력을 얻는다. 로마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였고, 여성은 법적·사회적 권리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기 쉬웠다. 남편은 아내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강한 권한을 행사했고, 아내가 남편의 의사에 반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버림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7장 21절의 “종”이 단지 경제·법적 신분으로서의 노예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사실상 종처럼 취급된 아내들까지 아우르는 다층적 지시어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뿐 아니라 불의한 질서 속에서 존엄을 잃은 여성 신자들에게 건네는 근원적 위로다. 이어지는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구절은 더욱 급진적이다. 억압적 관계에서 벗어날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면, 신앙은 체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의 선택을 독려한다. 구원의 영성은 현실을 떠난 관념이 아니라, 몸과 관계와 제도 속에서 존엄을 회복시키는 능동적 힘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빛난다.

7장 22절은 이 위로를 신학적으로 마무리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사회가 매긴 위계는 복음 안에서 전복된다. 종이라 불리던 자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정체성이 선포되고, 사회적 자유인·가정의 가장으로 군림하던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새로운 훈련이 시작된다. 힘 있는 자의 자유는 더 이상 사적 이익을 지키는 면허가 아니라 섬김의 소명으로 바뀐다. 그래서 7장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선언이 절정을 이룬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20장 28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피 값으로 산 존재는 어떤 인간 권력의 소유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사병도, 누구의 전리품도 아니다. 이 품격의 신학은 7장 24절의 권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서 구체가 된다. 신분, 가족 역할, 직업과 형편이 우리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부르심이 우리의 정체성과 실천을 이끈다는 뜻이다.

이 전복의 원리는 바울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라 예수께서 삶과 가르침으로 열어 보이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영광을 청탁하자, 주님은 세상의 권력 구조와 제자의 길을 대비시키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주관하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바울의 가정 윤리에 연결한다. 가정의 주도권을 권력으로 행사하던 남편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랑과 희생의 섬김을 명하고, 종처럼 취급받던 아내에게는 주께 속한 자유인의 존엄을 회복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낮아짐과 순종, 섬김과 자기 비움으로 드러난다. 그 공기가 교회와 가정에 흐르기 시작할 때, 세상의 위계는 사랑의 질서로 바뀐다.

마태복음 19장에 드러나는 이혼 논쟁은 당시 여성의 취약한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 자체가 남성의 자의적 이혼 관행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준다. 신명기 24장의 이혼증서는 그나마 피해 여인에게 사회적 재진입의 최소한을 보장하려는 방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허용의 배경을 “마음의 완악함”으로 진단하시고 창조 원리를 회복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규정하심으로써, 주님은 남성 중심의 이혼 관행에 제동을 걸고 혼인 언약의 거룩을 재건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울타리가 억압의 족쇄가 아니라 약자를 위한 정의의 방패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가 이 사랑의 법을 붙잡을 때, 약한 지체의 눈물을 비용으로 삼는 손쉬운 해체의 문화를 거부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이 미혼자와 과부에게 말하는 대목으로 시선을 옮기면,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권면이 등장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열쇠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시간의식, 곧 카이로스에서 찾는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라는 표현은 허무의 구호가 아니라, 다가오는 주님의 날 앞에서 집중과 절제를 요청하는 부름이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권면은 관계와 감정과 소유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에 예속되지 말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선권을 두라는 지침이다. 장가간 자가 아내를 기쁘게 하느라 마음이 나뉠 수 있고, 장가가지 않은 자가 주의 일에 더 전념할 여지가 있다는 바울의 설명은 소명 배분과 삶의 질서에 관한 성숙한 분별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경우를 상기시키며, 초대교회가 혈연 가족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영적 가족 공동체를 더 큰 질서로 삼았음을 짚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의 이름이 복음서에 분명히 기록된 사실은, 여성의 이름과 증언을 공동체 기억 속에 새겨 넣은 교회의 역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헌신의 전통은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제도화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수도 전통은 마태복음 19장 12절,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에 기대어 온전한 전념을 선택한 이들의 길이다. 개혁 전통이 같은 제도적 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때가 단축된” 시대 감각 앞에서 주를 위하여 독신의 재화를 귀히 여긴 마음은 배울 가치가 있다. 바울의 의도는 결혼을 금령으로 묶으려는 것이 아니라, 혼인의 선함과 독신의 유익을 함께 인정하며 각 사람의 은사와 형편에 따라 “분요함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7장 36–38절에서 딸을 시집보내도 잘하는 일이나 보내지 아니함은 더 잘하는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임박한 때의 영적 집중이라는 특별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부에 대한 권면 또한 재혼은 “주 안에서만” 자유이며, 바울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되다 하되, 누구에게도 일률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소명과 양심, 공동체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메시지를 오늘에 심으려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가정 폭력과 강압, 불의한 구조 앞에서 침묵하거나 영적 언어로 덮어서는 안 된다.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말씀은 피해자에게 탈출과 보호, 법적 구제를 권하는 적극적 사랑의 명령이다. 교회 치리는 죄를 숨기는 내부 논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 회개를 요구하고 약자를 지키는 정의의 실천이어야 한다. 둘째, 힘 있는 자의 회심은 특권의 보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재사회화되는 변혁이어야 한다. 남편의 권위는 군림의 인가가 아니라 책임의 십자가다. 직장과 사회에서의 자유도 자기실현의 전리품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자원이다. 복음은 억압받는 이를 자유인으로 일으키고, 자유인을 섬기는 종으로 낮춘다. 이 역설이 교회와 가정의 체질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다.

결국 관건은 7장 24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에 모인다. 소명은 자리 이동의 명령이기 전에 자리 성화의 사건이다.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회적 약자이든 강자이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질서를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 우리를 이끈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복음은 먼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망과 제도, 일터와 가정, 교회와 도시 속에서 몸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의 난해함을 이유로 본문을 비껴 가는 대신, 그 난해함이 열어 주는 더 깊은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권위는 섬김으로 성화되며, 결혼은 예배로 승화된다.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더 분주해질 이유가 아니라 더 단호해질 이유를 얻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생활의 언어로 바꾸어 가는 일, 그것이 종과 자유, 결혼과 독신의 구분을 넘어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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