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의 기도 – 장재형목사

1. 겟세마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그분의 기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마가복음 14장 32절부터 42절까지 전개되는 내용을 주목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극한 고난을 앞에 두셨을 때의 심정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땅에 엎드려 간구하셨고, 제자들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잠에 빠져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참된 기도의 모범”이 되심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도가 단순히 ‘담대한 확신’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로 표현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을 중요한 핵심으로 언급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여러 차례 기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환자들을 치유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권능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기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어떠한 고난도 피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능력을 통한 고난 회피’가 아니라, “전인격적 순종”을 통하여 이 길을 선택하셨음을 본문에서 드러내신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막 14:36)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절대적 신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도 위대한 지점이라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연약한 인간적인 면모가 배어 있으나, 바로 그 인간적 두려움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향한 신뢰가 함께 결합되어 “온전한 복종”을 이뤄낸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현실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예수님조차도 십자가를 앞두고 “이 잔을 옮겨달라”는 간구를 드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뜻이라면 감당하겠다”는 결단에 이르기까지,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고독한 기도의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배울 수 있는 본질적 교훈을 찾아낸다.

장재형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지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앞둔 상황에서 힘겨워하셨다’는 역사적 서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고난을 온전히 감내하는 상징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겟세마네라는 이름 자체가 “채유소”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올리브 열매가 압착되어 기름이 나오듯, 예수님 역시 ‘죄인을 구원할 대속물’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이 압착되는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왕을 세울 때, 예언자나 제사장이 머리에 기름을 붓곤 했다. 그 상징은 “왕권”을 의미하며, 동시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백성을 인도한다는 소명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즉시 오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에 수많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리면, 기드론 시내를 따라 핏물로 물든 붉은 물이 내려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이후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붉은 피로 흘러가는 시내를 건너시는 구세주의 고독한 뒷모습”으로 그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마치 이 양들의 피처럼 흘러가야 함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 잔인한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셨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을 동행해야 할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고, 의지를 다지기는커녕 잠에 빠져버렸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고독이 한층 부각된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독은 단순히 ‘인간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물론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넘겨줄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제자들조차 주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막 14:37)라며 슬픔 어린 책망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사명자로서의 고독이었다. 홀로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셨기에,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 위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이 고독이 예수님의 인생 전반에 흐르는 어떤 필연적 흐름과 맞물려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반부터 주변인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지나친 환대를 받다가, 때로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진심으로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론하실 때마다 겉으로는 “아멘”이라고 화답했어도, 실제로 그 말씀의 본질에는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난 예고에 대해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들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그런 무지와 둔감함은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좀 더 가까이 데리고 가셨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따르면, 이 세 제자는 변貌산 사건에서도 함께했던 핵심 인물들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들이 모두 특별히 용기 있고 신실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줄 만한 이들로 선택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던(눅 22:44) 예수님의 옆에서, 그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졸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주님의 ‘극한 고통’을 미처 받아들일 정신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시는 순간에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길이 바로 ‘고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하는데, 이러한 고독 속에서도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매달리는 기도를 드리심으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요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다짐으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결국 실패하고야 만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인간적인 ‘결단’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낸다고 설교한다. 베드로는 인간적 의지만으로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영적 깨어 있음은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실제로 주님이 체포되자 그는 겁에 질려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처참한 상황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의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간구하시는 연약한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고백하며 십자가를 스스로 감당하시는 강인한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상반된 두 모습의 결합이야말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즉, 진정한 신앙의 담대함이란 결코 ‘인간적 무감각’이나 ‘사고의 단순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직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복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셨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는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 길은 바로 “기도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를 “고독한 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예수님 개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도 종종 인생의 골짜기에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떠올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세상 모든 이가 잠들고, 내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 사라져버린 그 밤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라 부르며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대신 13장부터 16장까지 최후의 만찬과 고별설교가, 그리고 17장에 긴 고별기도가 기록된 뒤, 18장부터 예수님의 체포 장면이 진행된다. 장재형목사는 그 이유를 두고 “요한이 이미 예수님의 결단이 최후의 만찬(요 13:1~)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내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며 수난을 ‘영광’으로 규정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다만 마가복음 14장에서 읽히는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그 결단의 뒷면에 어떤 통곡과 눈물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을 서로 보완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종합해보면,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만을 부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인간적 면모를 함께 드러냄으로써 예수님의 희생이 어떤 각오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전폭적 신뢰로 승화되어, 십자가를 향한 담대한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강조되듯,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도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주님 안에는 “이 쓴 잔을 옮겨달라”는 인간적 바람과 동시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앙적 결단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어려움과 고통을 직면했을 때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결국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전한다.

또한 그는 이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단지 옛날 예루살렘의 한 밤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혹은 뜻밖의 시험과 고난 앞에 놓인 순간, 우리에게도 “겟세마네의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힘 주세요”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아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복종의 기도다. 장재형목사는“인생에 찾아오는 고독한 밤, 아무도 곁에 없어 보이는 바로 그때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설 때”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거룩한 발자취를 따르는 길임을 힘주어 말한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고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굳이 그런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을 경험하실 필요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해도, 실제로 몸소 겪으신 “죽기까지의 복종”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성경이 그것을 자세히 증언하고,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통곡과 땀흘림을 여실히 드러내며, 장재형목사 같은 사역자가 계속해서 그 의미를 풀어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고독의 밤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동시에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서 이 고독한 순종의 길을 배우도록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이제 때가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1-42)라고 선포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전진”이며, 고독을 넘어서는 ‘구속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온갖 눈물과 통곡 가운데서도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사실 예수님 자신만의 결단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이 고난의 길에 동참하라”고 초대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동행’의 의미를 본다. 본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고, 주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이후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기 시작했고, 교회는 이 ‘고난과 영광’을 계승해 왔다. 장재형목사는“오늘날에도 교회는, 그리고 개인 성도들은, 겟세마네의 밤에 오롯이 깨어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우리 역시 주님이 감당하신 고독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는 길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베드로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제자의 길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장면에 이어, 같은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세밀히 살펴본다. 그중 특히 마가복음 14장 50절 이후,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이 도망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서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던 한 청년”이 무리에게 잡히자 그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전승적으로 이 청년이 곧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해석이 많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제자들과 마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점이야말로 복음서가 가진 생생한 정직성이라고 설파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결심했었다.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막 14:29).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결심은 무너졌고, 베드로의 맹세는 부질없는 말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오직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연약함’을 대변한다. 장재형목사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몸에 위험과 공포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피하려 드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신앙이 깊어 보이는 사람도,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압박 앞에서 철저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교훈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복음서는 베드로가 부인한 직후 쓴맛을 보았고, 결국 회개하여 다시 주님의 제자로서 새롭게 서는 과정을 전한다(요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장면).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쓰임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겟세마네에서 잠들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치고, 심지어 스승을 팔아넘기거나 부인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지극히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 즉, 제자들의 실패가 곧 영원한 버림이 아니었고, ‘비겁한 제자들’이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지닌 은혜를 여실히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마가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진 ‘마가’다. 장재형목사는 마가가 14장 51-52절의 부끄러운 사건을 굳이 자기 복음서에 기록해두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대개라면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복음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실패를 낱낱이 기록하면서, “인간은 이렇게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부족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마가는 베 홑이불을 걸친 채 몰래 예수님을 좇아갔을 정도로 한편으로는 ‘주님을 떠나고 싶지 않은’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리에게 잡힐 뻔하자 공포에 질려 옷을 내던지고 도망칠 정도로 연약했고, 결국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과오를 복음서 기록에 담아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장치가 된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이렇게 비겁하고 부끄럽게 물러갔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홀로 견뎌야 했던 십자가의 중량감을 한층 더 짙게 해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이런 점을 예리하게 부각한다.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실패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고독한 순종과 희생이 이렇게까지 우리 가슴에 와닿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도행전 이후 성령의 강권적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 복음 전파의 일선에서 영적 대각성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된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배신과 도주, 잠과 무지였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신앙은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격이나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음으로써 얻게 되는 은혜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토대로, “우리도 연약함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 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실패가 곧 끝이 아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신다”고 역설한다. 이 메시지는 2천 년 전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선교지에서, 혹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 앞에 무너질 수 있다. 한때 베드로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다가도, 막상 곤경에 처하면 기도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듯이, 우리 또한 회개하면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는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다시 일으키신다”는 그 복음의 핵심을 강조한다. 그는 베드로가 눈물로 통곡하고 나중에 예수님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을 세 번 받으면서(요21장), 같은 횟수로 회복되는 장면에서 큰 희망을 발견한다. “실패로 끝난 인생은 없다.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가와 베드로처럼, 가장 부끄러운 순간에도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주님이 부활로써 완성하신 승리에 동참할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의 연약함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철저하게 ‘홀로의 길’이었는가”를 다시금 부각시킨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희생이며,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지셨다. 물론 기드론 시내를 함께 건넌 제자들도 있었고, 겟세마네까지 함께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예수님 혼자 남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구원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예수님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죄의 문제 앞에서는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 또한 역설적인 길이 된다. 한편으로는 “같이 가자”라는 예수님의 부름으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홀로 져야 할 십자가”가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다른 이들의 기도나 위로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장재형목사는 “각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마16:24)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잠들어버린 모습은 그 ‘영적 실체’를 우리에게 직면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은 자기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십자가가 있으며, 그 길을 막는 온갖 시험이 눈꺼풀을 무겁게 하듯이 우리를 짓누른다. 그때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인간적 한계만을 의지하면 베드로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너짐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장재형목사는 줄곧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옮겨 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가장 가르침 받았어야 할 기도였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 깨어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 실패를 토대로 교회의 사도로 자라나고, 나중에 성령 충만함을 입은 뒤에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거는 순교자적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고난이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 속에서 회개하고 다시금 제자로 서는 사람이 훨씬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와 마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허물과 실패를 “감추지 않고 있는” 복음서의 정직함을 높이 사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고 말한다. 만약 성경이 “제자들은 언제나 대단히 훌륭했다. 어떠한 배신도 없었다”고 기술했다면,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현재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결코 투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되, 예수님이 그 연약함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시켜주셨음을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연약함이 드러난 자리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하고 무너져서 내 안의 한계를 철저히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리가 열린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결연히 다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를 다시 찾아“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는 단순히 베드로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신앙인에게 주시는 위로이자 사명이다.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바라보면서,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모색할 수 있다. “주님, 저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만으로 제자의 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세워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스토리이며, 믿음의 여정은 바로 이 패턴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도, 넘어지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반드시 오지만, 그때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을 기억하며, 다시금 제자의 길로 돌아설 수 있다.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째 일어나면 된다”는 세간의 문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복음의 진리가 여기에 스며 있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가 되면, 정죄하기보다는 ‘내가 바로 그 연약한 자 중 하나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 베드로 한 사람이 실패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돌아서서 그를 나무라고 정죄했다면, 그것은 복음적 태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로 묶으셨고, 베드로와 함께 다른 이들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셨다. 훗날 사도행전에 이르면,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고, 물건을 통용하며, 때로는 넘어진 형제를 다시 세워주는 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이다. 십자가 이후의 부활, 그 이후의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겟세마네의 잠든 제자들이 깨어나 “이제는 함께 깨어 기도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장재형목사는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고독과, 그 앞에서 부각되는 제자들의 한계를 정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다음의 결론을 전한다. 첫째,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의 길’이었고, 우리 죄인을 위해 대속의 잔을 홀로 마신 길이었다. 둘째,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도망가거나, 스승을 배반하고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실패조차 용서하시고 다시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곧, 우리 역시 예외 없이 연약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가 이 ‘십자가와 회복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지금 당장 고난 중에 있을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완전한 복종, 그리고 그 복종에서 빚어지는 구원의 역사”로 귀결된다.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신앙 고백이, 그 길로 동행하지 못하고 이탈한 제자들을 다시금 “같이 가자”라고 부르시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러나 동시에 소망을 잃지 않는 “부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난의 현장 속에서도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이 넘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며,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통곡과 제자들의 실패는 그 신앙이 얼마나 인간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꽃피우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겟세마네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을 함께 조망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밤이 결코 예수님 한 분의 희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난과 구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장재형목사의 표현대로, “예수님이 가장 심히 통곡하셨던 그 순간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은 다 잠들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졸음과 배신, 도주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부활로 이어지는 복음의 결론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애초에 자기 자신만 믿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조차, 실패를 딛고 교회 초대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주님 곁에서 도망친 과거가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비극과 고독의 절정으로 보이지만,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새벽”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그 십자가가 부활의 문을 여는 핵심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날 밤 깨지 못했으나, 부활과 성령의 임재 이후 비로소 “깨어 있는” 제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겟세마네 기도를 되새기며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의 길이 예수님의 길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할지라도, 혹은 오히려 예수님이 겪으신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미 걸어가신 그 고독의 길이 “우리를 위한 길”이었고, 동시에 “우리에게 동행하자고 권면하시는 길”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의미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땀방울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으나, 그 기도는 ‘우리를 대속하시려는 중보의 기도’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결국은 회복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았다. 이는 우리도 “주님, 제가 깨어 있고 싶었지만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영혼을 깨워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다시 일으키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매년 우리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반복해서 기념하지만,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이 고독한 순종의 역사 위에 세워진 구원이 ‘오늘의 나에게도’ 실제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결론맺는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설교에서 “만약 내가 그 밤에 예수님 곁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적으로는 “나도 아마 잠에 들었을 것이고, 도망쳤을 것”이라고 답하곤 한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인간의 나약함은 본질적으로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 한 분이 충성스럽고 완전하셨기에, 우리 모두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 메시지가 바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여전히 절실한 이유라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강조한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란, 고난과 시련이 없는 평탄한 동행이 아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그것을 목전에 두신 채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길이었고, 그 길이야말로 구원을 이룬 길이었다. 제자들은 그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했으나, 부활 이후에는 각자 십자가를 품고 새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고난과 은혜의 길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제자의 길은 실패할 때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길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고독은 철저했지만, 그 고독이 결국 전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고, 제자들처럼 연약한 자들을 다시 부르시어 세워주셨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장재형목사가 줄곧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은, “아바 아버지여”라는 예수님의 기도 한 마디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처절하게 순종하시고 복종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을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있기에, 실패한 제자도, 잠들어버린 우리도, 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마가도, 다시금 공동체로 돌아와 기도로 깨어날 수 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우르는 복음의 정수이며, 우리의 회복과 승리의 관건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우리는 늘 좌절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끝없는 은혜의 길이 열려 있다.” 겟세마네의 긴 밤은 그런 은혜의 길이 시작된 자리였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상황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나, 억울함이나, 두려움 앞에서 “이 잔을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때, 예수님이 보이셨던 그 길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낙심이 깊어도, 심지어 실패와 부끄러움이 커도,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제자들의 실패마저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출발하고, 그 신뢰를 끝까지 붙드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집약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길은, 바로 이 기도를 삶 가운데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 안에서, 제자들의 연약함이 강함이 되어가듯,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간다.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의 기도와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독, 그리고 그 앞에서 드러난 베드로와 제자들의 비참한 연약함이야말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얼마나 값비싼 은혜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의 길인지를 보여준다. 이 고난의 밤은 결코 비극적 마침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 14:42)는 주님의 음성으로 이어졌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점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도 각자의 겟세마네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깨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결국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겟세마네의 기도와 베드로 및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 주는 장면 중 하나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독은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그 앞에서 무너진 제자들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가 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우리가 실패해도, 끝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그렇기에 신앙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복된 길은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그리스도와의 동행’의 핵심이며, 겟세마네 동산의 밤이 오늘에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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